본 연구는 발췌본을 대상으로 국문장편소설 독자들의 작품 수용의식을 고찰한 것이다. 발췌본은 완질본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뽑아내어 필사한 이본으로서, 낙질본, 낙장본과는 다른 것이다. 그동안에는 발췌본을 앞뒤가 떨어져나간 이본으로서 가치없는 것으로 처리했다. ...
본 연구는 발췌본을 대상으로 국문장편소설 독자들의 작품 수용의식을 고찰한 것이다. 발췌본은 완질본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뽑아내어 필사한 이본으로서, 낙질본, 낙장본과는 다른 것이다. 그동안에는 발췌본을 앞뒤가 떨어져나간 이본으로서 가치없는 것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필자는 현전하는 발췌본을 두루 검토한 결과, 발췌본 중에는 글씨 연습, 소일, 유적 보존 등의 목적으로 필사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평소에 공감하거나 기억하고 있던 인물이나 이야기를 따로 뽑아내 필사한 것도 존재한다는 점을 주목했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발췌본이 독서의 산물로서 사전에 의도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제호연록>, <이씨충효록>, <벽허담관제언록>, <유씨삼대록>의 일부를 각각 뽑아 필사한 발췌본, 30장본 <천수석전>, 고려대본 <소현성록>, 사재동 소장 18장본 <유씨삼대록> 등의 사례를 통해 확인했다. 그런 다음 독자들이 읽은 후 발췌본으로 남길 때, 어떤 인물과 내용, 그리고 이야기의 어떤 점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국문장편소설 중에서 유통이 가장 활발했으며, 그에 따라 완질본과 발췌본을 가장 많이 남기고 있는 <소현성록>과 <유씨삼대록>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발췌본으로 판단되는 것으로서 <소현성록> 발췌본은 7종, <유씨삼대록> 발췌본은 17종을 검토하였는데, <소현성록> 발췌본의 필사자들은 ‘소수주가 황후로 등극하는 이야기’와 ‘석파가 소현성에게 석소저를 천거하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주목했고, 다음으로 명현공주로 인한 형부인의 수난과 시가 구성원들로 인한 소수빙의 수난을 다룬 이야기를 주목하였다. 그리고 <유씨삼대록> 발췌본의 필사자들은 전체 내용 중 ‘진양공주 이야기’, ‘유현영 이야기’, ‘양벽주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발췌했다. 대상으로 한 17종의 발췌본 중 15개의 발췌본이 이들 내용을 다루고 있었는데, 매우 특기할 만한 사항이었다.
발췌본의 내용상 공통점은 여성인물과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국문장편소설의 주독자층이 양반 계층의 여성들이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재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여성인물들 중에서 소수주와 진양공주는 부덕과 함께 식견, 지혜, 능력을 대변해 주는 인물이고, 소수빙과 유현영은 거기에 더하여 효심과 공경심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과 이야기를 즐겨 읽고 발췌했다는 것은 독자들이 그러한 인물의 형상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본받고자 한 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본다. 소수빙과 유현영, 형부인의 이야기에는 시집살이의 괴로움과, 그것이 악인 적대자인 동렬이나 시가 구성원들에 의해 주로 야기되었다는 점도 나타나 있는데, 이것 역시 다처와 다첩이 공공연했던 당대의 양반사회에서 여성이라면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충분한 공감 대상이 될 수 있다. <소현성록>의 석파, 양부인, 소현성, 화부인 등은 당대 양반사회에서 첩, 여가장, 가부장, 종부로서의 자질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대변해 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발췌본은 당대 여성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인물과 형상, 그리고 사건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내용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