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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과 약탈경제 ― 中世 日本 해적을 중심으로 ―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해적과 약탈경제 ― 中世 日本 해적을 중심으로 ― | 2006 년 | 김보한(고려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281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12월 23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일본사에서 인적, 물적 교류의 통로로서 해로(海路)의 활용은 매우 중요하였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일본해적의 활동과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해로의 점유자로서 중세 일본의 해적에 주목하였다.
    일본열도에서 해적은 세토(瀨戶)내해 연안을 중심으로 8세기경부터 사료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동아시아 해역에서 13세기부터 16세기 해상의 경계를 넘어서 재물을 약탈하는 왜구와, 한편에서는 약탈을 자행하고 때로는 선박의 안전 항해를 보장하면서 일정액의 통행료를 징수하는 세토내해 도서연안의 세력이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시기별로 약탈행위와 경제활동을 오가면서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는 자유분방한 해상집단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본 해적은 정권이나 권력에 이단적이거나 저항하는 세력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바다를 배경으로 등장한 해상집단이다. 중세 일본해적 활동의 확대는 가마쿠라막부의 사회적․정치적 혼란시기와 일맥상통하며, 활동세력의 다양화와 약탈지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들은 고대 말부터 규모의 확대와 역할의 다양화를 통하여 동아시아 해역에서 약탈의 경제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면서,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시기의 차이를 두고 출현하는 해적과 왜구는 해상권 확보와 상품, 물자, 교역품, 사람 등을 약탈 대상으로 하는 동질의 집단이었다. 즉 일본 세토내해에서 수세기에 걸쳐 축적해 온 항해 기술을 발판삼아 마침내 바다건너 고려로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에 끼친 영향을 심대하여 고려 민심의 동요, 재정의 고갈, 국가존망의 위기라는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후 조선의 對왜구 정책에서 회유책의 성과는 고려 약탈품만큼의 경제적 부담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것은 고려시대 약탈품의 총량이 조선으로 그대로 전가된 것을 의미한다. ‘해동제국기’와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순수 접대비 매년 1만석과, 1509년(중종 4) 2만 2천석의 왜인 접대비용은 고려가 해마다 약탈당한 곡물의 양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왜구의 출현이 점차 사라져 가는 대가로 고려의 약탈총량에 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일본 해적이 보유하고 있는 약탈경제의 잠재적 가치이며, 13-5세기 대외 관계의 핵심 주제어인 것이다. 아울러 중세 일본해적의 경제활동은 동아시아에서 약탈과 교역을 통해서 확보한 물품의 경제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봄으로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영문
  • The practical use of the sea route was very important as a passage of the material interchange in Japanese history. There were not little at all activity and influence of the Japanese pirate in comparison with the other countries of the East Asia. This report aims at such a point and is going to pay attention to a Japanese pirate as an owner of the sea route in the Middle Ages.
    A pirate began to appear in historical materials around the Inland Sea coast in the Japanese Islands from the time in the eighth century, and they were the most active from the thirteenth century to the 16th century.
    The Japanese pirate was the Japanese pirates where plunder did property across the marine border in East Asia sea area from the thirteenth century to the 16th century. So the Japanese pirate was pirate power of the Inland Sea which collected the toll of the constant sum in one. Therefore, these were the sea groups which were free wheelingness in pursuance of a duty of two folds while changing a plunder act and economic activities.
    The Japanese pirate is generally the sea group which appeared for the government and the power not a heretical mark and power to resist naturally in a background in the sea. The Japanese pirate recognized economic value of the plunder through the diversification of expansion and the duty of the scale enough in East Asia sea area from the ancient times. And developed plunder activity in an object with Korea.
    I was very big under the influence that I gave to Korea. The nursery rhyme of the Korai confidence of the people, the fiscal drying up, the crisis of the national life and death brought a big social wavelength. Because the result of the Korean conciliation policy just received an economic burden of the Korai plunder dignity, it was possible. This means that the gross weight of the plunder product was just imputed to Korea in the days of Korea. Therefore, with the value that the appearance of the Japanese pirates disappeared slowly, Korea could not but just undertake a burden of the economy equal to the plunder gross weight of Korea. It is the potential value of the plunder economy that a Japanese pirate holds of this, and it is to be the core keyword of foreign relation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에서는 일본사에서 8세기부터 등장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던 일본 「해적」과 이들의 역할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 해역에서 약탈과 물자유통의 담당자로서 활략하던 일본해적의 경제적 기능을 탐구하였다.
    고대 말부터 일본 해적은 도서지방에 기반을 둔 영주계층을 중심으로 교역에 헌신적으로 종사하였다. 이후 규모의 확대와 역할의 다양화를 통하여 동아시아 해역에서 약탈의 경제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면서,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시기의 차이를 두고 출현하는 해적과 왜구는 해상권 확보와 상품, 물자, 교역품, 사람 등을 약탈 대상으로 하는 동질의 집단이었다. 즉 일본 세토내해에서 수세기에 걸쳐 축적해 온 항해 기술을 발판삼아 마침내 바다건너 고려로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에 끼친 영향을 심대하여 고려 민심의 동요, 재정의 고갈, 국가존망의 위기라는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후 조선의 對왜구 정책에서 회유책의 성과는 고려 약탈품만큼의 경제적 부담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것은 고려시대 약탈품의 총량이 조선으로 그대로 전가된 것을 의미한다. ‘해동제국기’와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순수 접대비 매년 1만석과, 1509년(중종 4) 2만 2천석의 왜인 접대비용은 고려가 해마다 약탈당한 곡물의 양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왜구의 출현이 점차 사라져 가는 대가로 고려의 약탈총량에 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일본 해적이 보유하고 있는 약탈경제의 잠재적 가치이며, 13-5세기 대외 관계의 핵심 주제어인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기존의 '일본해적' 연구는 다분히 일본 중심의 질서에서 다루어졌지만, 본 연구는 <동아시아 海域>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여 <동아시아 해양사>라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였다. 즉 <일본 해양사> 중심의 해적 연구가 斷代的이고 특정지역에 편중되어 있었으나, 본 연구는 이 같은 한계에서 벗어나 <일본 해양사>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해양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결과를 이끌어 냈다. 따라서 본 연구 결과는 고려사와 조선시대 초기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해양사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첫째, 현재 일본사의 對동아시아 정책을 학문적으로 파악하는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둘째, <동아시아 해양사>에서 일본 해적이 갖는 경제적 의미를 파헤치고 일본 해적경제의 현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셋째, <동아시아 해양사>속에서 일본 해적 연구가 주는 메시지를 통해서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대일본정책을 기획하는데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공할 것이다. 넷째, 본 연구결과를 토대로 <동아시아의 해양사> <해상 역사문화 탐방>과 같은 강의와 역사기행으로 연계하여 교육 현장에서 활용 가능할 것이다.
  • 색인어
  • 일본 해적, 약탈품, 약탈경제, 承久의 난, 고려사. 해동제국기, 조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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