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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기 山林과 그 문인의 사상적 동향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세도정치기 山林과 그 문인의 사상적 동향 | 2006 년 | 노대환(동양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230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4월 1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오희상과 홍직필은 산림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던 세도정치기에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노론 산림이었다. 산림직에 초치되어 산림으로 대접받았지만 이들은 정치 참여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세도정치기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이들은 척리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는 상황에서 현실을 개혁할만한 역량도 없으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하여 출세를 포기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지식인들의 의리인식의 약화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파악하였던 이들은 理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의리지학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태도와 관련하여 산림들의 학문을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적절하지 못한 지적이다. 이들이 정치 참여를 거부하였던 것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원칙론에 해당하는 理 영역에 공부를 집중한 것은 비록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공허한 것은 아니었다. 재야에 머물면서도 이들은 현실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의리지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경세학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반계수록󰡕에 대한 평가를 통해 오희상과 홍직필의 경세인식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의리지학을 기본으로 하는 한 경세학의 수용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오희상과 홍직필은 천주교가 확산되는 있는 상황에도 주목하였다. 천주교의 확산 역시 의리인식이 약화된 결과라고 보았던 이들은 그에 대응하기 위해 지식인 사회에 척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나섰다. 척사론을 구체적으로 개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척사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서양 세력의 동향에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하였다. 이들의 척사적 태도는 물론 매우 부수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서양 세력의 움직임에 별다른 위기인식을 갖지 못하고 고식적으로 대응하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오희상과 홍직필의 현실인식 내지 대응방식은 그들을 추종하던 후배 문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후배 문인들은 적극적인 현실개혁 의지를 표명하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선배들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였으며 척사론 역시 선배들의 그것을 참조하여 󰡔벽위신편󰡕과 같은 척사서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 영문
  • Oh, Hui-sang(오희상) and Hong, Jik-pil(홍직필) were representative members of Sallim of Noron(노론 산림) in the era of so-called in-law government during which the influence of the Sallim faction was significantly weakened. Although they were appointed to the official position of Sallim scholar and treated as such, they showed a slight willingness to participate in politics. That was because they were critical of the reality of the era of in-law government. Thinking that when the authority of the throne was dominated by royal in-law families, participating in politics with little capacity to reform society was only to pursue practical benefits, they gave up entering government service and devoted themselves to academic activities.
    With regard to such attitudes, it is generally appreciated that what Sallim scholars studied failed to reflect reality, and thus futile. This is not appropriate. Their refusal to participate in politics virtually originated from vigorous interest in reality, and their academic concentration on Ri or principle was somewhat outdated but not futile. While keeping a distance from politics, they had consistent interest in social matters and even showed interest in the study of governance based on Uirijihak.
    Oh, Hui-sang and Hong, Jik-pil also observed the spread of Catholicism. They thought Catholic expansion was attributed to the weakened consciousness of righteousness. In order to respond expanding Catholicism, they aroused intellectuals' interest in rejecting heterodoxy. Although they did not specifically state the doctrine of rejecting heterodoxy, they showed the fundamental direction of rejecting heterodoxy and urged attention to the movement of Western powers. Such attitudes were short-sighted and close-mined. However, given that the government resorted to stopgap measures to respond to the movement of Western powers with little awareness of the crisis, their attitudes are considered quite meaningful.
    Oh, Hui-sang's and Hong, Jik-pil's way of recognizing and handling reality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junior literati who followed them. While agreeing to their seniors' consciousness concerning social problems, junior literati expressed their willingness to reform reality and acted differently from their seniors. As for the doctrine of rejecting heterodoxy, they published 󰡔Byeogwi Sinpyeon󰡕, a book about rejecting heterodoxy, in consultation with their seniors' doctrine of rejecting heterodoxy.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valuate again Sallim scholars and related people in the era of in-law governmen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오희상과 홍직필은 산림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던 세도정치기에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노론 산림이었다. 이들은 산림직에 초치되어 산림으로 대접받았지만 정치 참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세도정국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이들은 척리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는 상황에서 현실을 개혁할만한 역량도 없으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라고 보아 출세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의리인식의 약화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파악하였던 이들은 理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의리지학에 치중하였다.
    산림들의 자세와 학문에 대해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적절하지 못한 지적이다. 이들의 정치참여 거부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理 영역에 대한 탐구에 집중한 것은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공허한 것은 아니었다. 재야에 머물렀지만 이들은 현실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의리지학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경세학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반계수록󰡕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에서 이들의 경세학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다.
    오희상과 홍직필은 천주교가 확산되는 상황에도 주목하였다. 천주교의 확산 역시 의리인식이 약화된 결과라고 보았던 이들은 그에 대응하기 위해 지식인 사회에 척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나섰다. 구체적으로 척사론을 개진하지는 않았지만 척사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고 서양 세력의 동향에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하였다. 서양 세력의 움직임에 별다른 위기인식을 갖지 못하고 고식적으로 대응하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산림들의 태도는 의미있는 것이었다.
    오희상과 홍직필의 현실인식 내지 대응방식은 그들을 추종하던 후배 문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후배 문인들은 적극적인 현실개혁 의지를 표명하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선배들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였으며 척사론 역시 선배들의 그것을 참조하여 󰡔벽위신편󰡕과 같은 척사서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오희상과 홍직필로 대표되는 세도정치기 산림과 그 주변의 모습은 흔히 세도정치기 산림에 대해 흔히 지적되는 것과 같은 퇴영적인 지식인들의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1. 효종대부터 숙종대에 사이에 권력의 실세로 정국을 주도하였던 산림은 영조대에 들면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전반적으로 유학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었고 정부의 지속적인 견제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세도정치기에 들자 산림은 거의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였으며 산림들은 출사 거부로 그에 대응하였다.

    2. 세도정치기에 산림으로서의 명성을 지닌 인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희상과 홍직필이었다. 산림을 대표하던 이들은 세도정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과거제 등을 주목하면서 정치권과 사류들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출세를 도모하던 당시 산림들은 재야 비판세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산림들의 가장 큰 관심은 의리의 재확립에 있었다. 이들의 의리 인식의 실종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였으며 때문에 의리의 가치를 확인하는 데 전력하였다. 의리지학 내지 심성지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오희상에게 대표적인 나타나듯 학문연구에서 매우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의리지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그렇다고 경세학을 무시하였던 것은 아니다. 의리지학을 바탕으로 경세학을 연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그런 점에서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후배 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세학에 대한 관심은 선배 산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이들은 척사론에 매우 깊은 관심을 지녔다. 서양의 천주교가 의리적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인데 점차 서양의 침략성에 대해서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척사론은 주변 문인들의 척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척사적 관심이 경세학적 관심과 결부되면서 문인들 단계에 가면 동도서기적 인식을 보이는 '벽위신편'의 찬술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활용방안
    1. 세도정치기 산림과 관련한 기존의 부정적인 이해틀에서 벗어남으로써 당시 지식인 사회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2. 19세기 후반 정계에서 활약하는 산림 문인들의 사상경향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산림들과 연결해 계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 색인어
  • 오희상, 홍직필, 산림, 벽위신편, 척사론, 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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