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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의 위반과 문학 과정: <신곡>의 “지옥” 26곡에 나타난 오디세우스 주제에 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기원의 위반과 문학 과정: & lt;신곡& gt;의 “지옥” 26곡에 나타난 오디세우스 주제에 대한 연구 | 2006 년 | 박상진(부산외국어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1234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4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단테가 <신곡>에서 추구한 주제는 단연 구원이었다. 본 연구는 그 구원을 단테가 독자들을 하느님에 의해 미리 예정된 구원을 향해 떠밀기보다는 그들을 하나의 문학과정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출발한다. 이런 식의 이해는 서양의 단테 연구자들도 오디세우스의 여행과 관련시키면서 제시한 바 있다. 나는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관련하여 단테의 순례의 의미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향한 영원히 순환하는 여행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런 여행은 소위 ‘문학’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게 이해되는 단테의 순례에 우리가 독자로서 참여할 때 우리는 단테와 대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거기서 그가 생각하는 ‘구원’을 문학과정과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본 연구의 방향과 대립되는 경향을 보인다. 오디세우스의 여행이 길고 험난하긴 하지만 분명 미리 예정된 목적지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이전에 지녔던 모든 것을 회복한다. 이런 식의 ‘귀환’의 개념은 그리스 서사시에 일반적으로 내재하며, 서양 고전의 허구 세계에서 전형적으로 펼쳐지는 생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오디세우스의 여행은 수평적인 반면 단테의 여행은 수직적이다. 그러나 둘 다 어떤 궁극적인 지점을 지향하는데 한정된다는 면에서 그 둘의 여행의 형태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궁극적 지점이란 호메로스에게서는 인간의 이성이 창조하고 조절하는 이상이었고 단테에게서는 하느님이었다.
    다른 한편, 나는 이러한 기존의 견해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면서 거기서 말하는 ‘귀환’이 진정한 의미의 귀환인지 묻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귀환’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을 의미한다. 과거에 익숙했던, 원래의 자기의 안정된 자리, 즉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귀환은 동시에 과거(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나 미래 혹은 기원(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으로 돌아가기보다 그들의 상실을 뜻할 수도 있다. 역설. 귀환하는 사람은 언제나 집, 즉 귀환의 지점을 상상하고 추구하지만, 일단 성공적으로 귀환을 이루고 집에 정착을 하게 되면, 이전에 그가 상상하고 추구했던 집, 즉 과거의 기원은 이제 사라지고 그 안정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시 말해, 귀환하는 여정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귀환을 (집이라는 안정된 곳에 이르기 전의) 불안정성(그 상상과 추구의 불안정성)으로 경험하지만, 귀환을 이루는 순간 과거-집-기원이 그에게 부여했던 안정성이 그 불안정성을 대체한다. 여기서 그의 귀환은 과거-집-기원을 회복하는 동시에 상실하고 귀환 자체는 사라진다. 즉, 돌아가면서 어느 곳에도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귀환이 기원에 정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원으로 돌아가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귀환은 그 자체가 자체의 목적지를 부정하는 모순을 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귀환은 문제적으로 된다.
    따라서 과정으로서의 귀환은 언제나 과거-집-기원을 미성취된 미래로 연기하는 한에서만 자체의 개념과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식의 귀환은 자체를 늘 현재적 과정으로 유지하면서 어떤 기원의 회복도 필요하지 않도록 만든다. 즉, 귀환하는 자는 기원에 도달할 때에도 그가 추구했던 기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감하게 기원을 버리고, 그럼으로써 그의 성취된 과거-집-기원을 그가 다시 미래에 성취할 회복의 대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집-기원은 영원히 반복되는 상실의 장소가 된다. 영원한 상실이 주는 상처(혹시 있다면)를 치유하는 방법은 귀환을 그 상실의 계기로 유지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귀환을,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현재에 스스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만들면서 어떤 것도 기억하거나 기대하지 않도록 한다.
    이제 오디세우스의 여행이 앞서 제시한 소위 ‘현재적 귀환’을 함축하는지 탐색하는 일이 남아있다. 오디세우스의 여행이 오디세우스 자신의 귀환을 성취될 수 없는 것으로 유지한다는 전망에서 볼 때, 그의 집은 불확실한 경우들에 의지하는 불안정한 장소가 된다. 실제로 우리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가 귀환하는 마지막 양상, 즉 이타카에 돌아온 후 벌어지는 온갖 역동적 양상들에 <오디세이>의 반을 할애한다. 그의 귀환은 집에 돌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귀환을 어떤 가변성도 허용하지 않는 완결된 것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영원한 미완성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의 기원과 동화되려는 그의 끝없는 시도와 함께 나타나고 사라지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그는 그의 귀환을 연기하는 한에서만 귀환을 성취할 수 있다.
  • 영문
  • The premise is that the true meaning of Dante's salvation can be understood as 'literary procedure' to which inviting the readers, instead of forcing them to the salvation pre-completed or pre-destined by God. This kind of interpretation was suggested by Dante scholars, for example by relating it effectively to Odysseus' journey; but if I may add, I should like to clarify the meaning of Dante's pilgrimage in relation to Odysseus' 'return' (which may well be linked to the Buddhist way of salvation) from which we can consider Dante's pilgrimage as an unstoppably continuous, circulative journey toward incessantly changeable reality. This kind of journey is rather an appropriate figure of 'literature'; only if we as the readers participate in Dante's pilgrimage, we are able to make conversational relationship with him.
    On the one hand, some say that Odysseus' journey, although it is long and winding, is certainly limited to result in its own pre-fixed destination; he ultimately makes safe journey home wherein recovers everything he had before: truly happy-ending. This kind of signification of the term 'return' is in general inherent in the Greek epic form so as to be conceptualized as the form of life unfolded in the fictional world of classic.
    Odysseus' journey is horizontal while Dante's journey is vertical in geographical and symbolic dimensions; however, the two are converged insofar as they are both limited to be directed toward an ultimate point which was, in the former, an idea created and controlled by human whereas, in the latter, was God which, however, was at some point invented and maintained by human too.
    On the other hand, we should ask a question at this point whether this return was a 'return' in its original meaning. If it means return to past or origin, it too may mean the loss of past or origin. It might sound paradoxical but has something to noteworthy; this is because one who returns always imagines or pursues to restore (or cure) his (or her) home(sick), but once he makes a successful return and settlement at his own home, the past-origin of his home disappears and then he becomes haunted by its stability. In other words, while he is on the way of returning home he always experiences his return as instability, but once he fulfills return, the stability that home-past-origin grants to him replaces that instability. Here his return recovers his past origin but at the same time loses it, and return itself disappears; that is, once he returns, he returns to nowhere. In sum, if we think that return does not indicate only the settlement in its origin but also the process itself to the origin, we can find that the return includes in itself a contradiction to negate its own destination. Now return becomes problematic.
    Thus, we can say that only insofar as return, as a procedure, always postpones home-past-origin to an unfulfilled future, it can maintain its proper function and concept. The kind of return always maintains itself as a present procedure so as not to need any restore of origin; here he does not need origin, even when he arrived at there, that he has pursued, but rather dares to discard it whereby replaces his achieved home-past-origin with an object of recovery that he will achieve again in the future. Here, 'home' becomes a place of eternally repeated losses.
    A way of curing the trauma the eternal loss causes is to maintain return itself a momentum of that loss; in other words, to make it as an event (to use Heidegger's concept) which occurs at present and in itself without recalling or expecting anything. This allows us to understand return in a way that differs from what it has been used to be understood, and to read Homer and Dante newl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단테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신곡>의 ‘지옥편’ 26곡에서 등장시킨다.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오디세우스의 귀환의 여정과 모험을 다루는 그리스의 대표적 서사시다. 그 안에는 권력과 운명, 모험, 그리고 성취 등의 주제들이 수많은 신화와 인물, 괴물, 사건 등과 함께 얽혀 전개된다.
    단테가 <신곡>에서 오디세우스 주제를 다룬 입장과 방식에 대한 비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파도안(Giorgio Padoan)과 돌피(Anna Dolfi)와 같은 비평가들은 <신곡>에 등장한 오디세우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주로 도덕적 관점을 취한 이들은 오디세우스의 방랑과 모험이 그의 죄(재능 남용)에서 기인했으며, 그래서 단테는 그를 지옥에 넣어 마땅한 인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오디세우스의 모험(‘미친 비행飛行folle volo’)이 곧 죄의 증거이자 이유라고 본다. 반면 나르디(Bruno Nardi)에서 푸비니(Mario Fubini), 그리고 팔리아로(Antonino Pagliaro)로 이어지는 무리들처럼, 오디세우스의 주제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평가들은 단테가 그의 모험을 부러운 혹은 찬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것이 <신곡>의 ‘지옥편’ 26곡 구절구절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하느님이 부과한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지식을 추구하는 욕망의 산물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금기의 위반이라는 면에서 아담이 지식의 열매를 맛보면서 에덴의 동산에서 탈출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해석을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획기적인 해석을 거점으로 단테의 <신곡>(‘지옥편’ 26곡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등장한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존의 비평과는 사뭇 다른 방향에서 <신곡>을 읽을 수 있다. 널리 통용되어온 비평이 단테와 그의 <신곡>을 중세의 세계관과 철학, 신학을 집대성한 결과로 본다면, 새로운 해석을 가하는 비평은 <신곡>을 하느님의 세계의 통일된 재현물이라기보다 지식인으로서 작가 단테가 고민하고 방황하는 가운데 (실제로 그의 추방 시기에 쓰였다) 이루어진 일종의 자기 성찰의 문학적 성과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비평이 지니는 가능한 의미를 더 깊이 논구하고자 한다. 오디세우스 주제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이 논문에서는 그를 기반으로 오디세우스의 ‘귀환return’이 갖는 ‘위반’으로서의 가능성과 그것이 ‘문학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테를 중세 신학과 세계관을 집대성한 학자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의식을 갖춘 작가로 조명하는 작업으로 연결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모든 위반은 의미있고 가능하다. 이 진술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단테의 <신곡>과 같은 야심적인 문학 기획에서 더 진정성을 얻는다. 독자의 참여에 대한 작가의 기대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완성을 의도하지도 않음으로써 독자의 자유로운 읽기를 이끈다. 바로 여기서 독자와 함께 이루어나가는 작가의 문학적 기획은 그들 자신을 그 기획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위반은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설정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계속 뻗어나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단테는 그런 맥락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 단테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지식인의 윤리성과 맞물린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권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단테의 오디세우스 주제는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잘 파악될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세계시민주의를 문제화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넘어섰다기보다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게 해주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탈식민의 중첩. 즉, 탈식민의 재구성이다. 이러한 논의는 현재 세계화와 (탈)민족주의, 탈식민주의와 같은 담론들에 대해 일정한 반성과 재성찰의 기회를 줄 것이고, 또한 문학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기획에 기여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문학적 사유의 길을 창출하고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색인어
  • <신곡>, 단테, 오디세우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기원, 문학과정, 위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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