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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韓, 中, 日 三國의 華夷論에 대한 비교 연구 - 宋時烈(1607~1689), 王夫之(1619~1692), 山崎闇齋(1618~1682)의 저술을 중심으로 -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7세기 韓, 中, 日 三國의 華夷論에 대한 비교 연구 - 宋時烈& #40;1607~1689& #41;, 王夫之& #40;1619~1692& #41;, 山崎闇齋& #40;1618~1682& #41;의 저술을 중심으로 - | 2006 년 | 우경섭(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234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4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7세기 중반 淸朝가 등장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한편,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세계질서를 해석하는 전통적 사유인 華夷論의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부각되었는데, 조선의 宋時烈, 중국의 王夫之, 일본의 山崎闇齋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화이론에서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지역 종족 문화 등 세 가지 요소가 거론되었는데, 그 중 문화적 요소가 화이를 구분하는 근본적 기준으로 중시되었다. 이때 문화란 周나라로부터 이어지는 유교문화를 가리키며, 禮樂文物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孔子에 의해 확립된 이같은 인식은 송대 朱子에 의해 신유학의 핵심 담론으로 자리잡았고, 주자학이 동아시아 각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보급되면서 화이론 또한 세계질서를 인식하는 보편적 사고방식으로 정착되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처음으로 北伐論을 제기했던 송시열은 天理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존중화 양이적의 필연성을 강조하며 청나라 정벌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송시열의 화이론은 尊周論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질서의 파괴자인 청나라를 문명의 중심인 중화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저항의식의 발로였다. 이때 존숭의 대상인 명나라 또는 중화란 중원지역 혹은 漢族을 의미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존주론은 예악문물로 상징되는 유교문화의 소유 여부에 따라 중화와 이적의 可變性을 인정하는 문화적 화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즉 조선 역시 지역적으로는 동쪽에 치우친 東夷라 칭해지지만 문화의 啓發 정도에 따라 중화로 변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17세기 후반 유일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로서 조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즉 朝鮮中華主義로 변모하였고, 이제 조선은 명나라의 뒤를 이어 유일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로서 위상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1619년 중국 湖南省 衡陽에서 태어난 王夫之는 1644년 청군이 북경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던 이후 직접 反淸擧兵을 주도하는 한편, 전도된 화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던 漢族 志士였다. 그는 인간의 性情이 생장한 지역의 자연 환경에 영향을 받고, 이에 따라 고유한 풍속과 습관을 지니게 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지역적 차이로부터 시작하여 문화적 혈연적으로 구분되어 형성된 집단인 중화와 이적은 상호 별개의 세계를 구성하며,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貴賤과 愚劣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이적에 대해서는 중화와 같은 인간의 규범으로 대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제기하였던 그는 중화와 이적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이치임을 주장하며, 중국사의 전개 과정을 북방 유목민의 영역 침탈에 대한 한족의 항쟁으로 이해하며, 영토적 관점에서 이적에 대한 배척을 중심으로 삼은 화이분별론을 중국사 해석의 주된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1618년 京都에서 태어난 山崎闇齋는 위의 두 사람과 달리 명청교체의 현실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화(명)와 이적(청)이 자리를 바꾼 이른바 華夷變態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던 막부체제 하에서, 변화한 세계질서 가운데 새롭게 성립한 江戶幕府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곧 중국이며 그 밖의 다른 나라가 이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각기 태어난 나라에 따라 화이가 정해진다는 주관적 화이론을 제기하며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인식을 부정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논리가 곧 특정 집단 사이의 우열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을 대신하는 세계의 중심으로 분명 일본의 존재를 인식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거론된 것이 바로 혈통의 문제였다. 그는 유학의 핵심 개념인 敬의 가르침이 국가의 성립부터 일관되게 이어지는 나라로서 일본의 정체성을 묘사하였고, 天照大神 이후 皇統이 끊임없이 계승되는 사실에 근거하여 중화인 일본의 역사가 주위의 이적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 영문
  •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which marked the advent of the Chinese Qing(淸) dynasty, the intellectuals of many East Asian countries were facing the task of devising new theories that would explain and justify the new world order surrounding them, and also the task of newly establishing their countries' own identities. And in the process, 'the theory of the civilized and the barbarians(華夷論)' became a hot subject of debate throughout East Asia. For entities who engaged in discussing such subject, we can examine many people. In Joseon there was Song si-yeol/宋時烈, in China there was Wang Fu-zhi/王夫之, and in Japan there was Yamazaki Ansai/山崎闇齋.
    In Joseon, Song si-yeol argued the ultimate necessity of honoring the Chinese essence(尊中華) and repulsing the barbarians(攘夷狄). But when the prospect of defeating Qing and claiming the Chinese territory literally faded away, Song si-yeol's suggestion of the 'Civilized/Barbarian theory' shifted itself to the argument of honoring the 'Zhou/周' Legitimacy(/尊周論). This was Song si-yeol's way of expressing defiance against Qing, declaring that Qing dynasty could not and must not be considered as the center of East Asian civilization. Which he actually considered as the genuine object to receive due respect and honoring did not mean merely the 'China'. The theory of honoring the Zhou Legitimacy was based upon the Culture-based Civilized/Barbarian theory which did acknowledge the possibility that 'the civilized' and 'the barbarians' could switch sides. He was trying to say that even Joseon, even with its East-leaned location and age-old designation as a 'race that belonged to the barbaric circle', could also turn itself into a Chinese essence, when it sufficiently developed and trained itself.
    In the meantime, in China, a person named Wang Fu-zhi was born in 1619. In 1644, when he heard the news that the Qing army entered Beijing, he started to lead the anti-Qing movement. He believed that the nature of a person would generally be affected and influenced by the natural environment of the region in which that person was brought up, and accordingly, that person would end up having unique habits and customs. So, he rationalized that the Chinese essence separated from each other first by regional differences and then later by cultural and racial distinctiveness, would respectively constitute a world of its own, and come to form an insurmountable rift between themselves, with one side noble/superior and one side mean/inferior. Moreover, he argued that one cannot address the barbarians with the same standards applied to the civilized human beings. He viewed the Chinese history as a long-term process of Chinese people's battling such invasions and incursions.
    Yamazaki Ansai, who was born in 1618 in Kyoto, was not forced to witness the transfer process between Ming and Qing. But under the Bakuhu system, which was paying sharp attention to the ongoing situation in which the traditional civilized(Ming) and the traditional barbarians(Qing) changed places(華夷變態), he searched and sought for a proper identity for the newly established Edo-Bakuhu/江戶幕府. He argued that one's own birth country should be considered as no other than 'China', and the other countries as all barbarians. In other words, he clearly denied the validity of the existing East Asian order which had China as its center. Yet, this kind of rationalization did not induce a relativist perspective denying the pre-existing superiority/inferiority status between specific groups or regions or countries. He suggested Japan as the new world center to replace China, and to support his suggestion and justify the superiority of Japan, he mentioned the issue of bloodlines. Based upon the fact that the royal bloodline continued without interruption since the days of Amaterasu Omikami/天照大神, he argued that Japan, as the center of the civilized in East Asia, always maintained superiority over other East Asian countri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7세기 중반 淸朝가 등장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한편,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세계질서를 해석하는 전통적 사유인 華夷論의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부각되었는데, 조선의 宋時烈, 중국의 王夫之, 일본의 山崎闇齋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화이론에서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지역 종족 문화 등 세 가지 요소가 거론되었는데, 그 중 문화적 요소가 화이를 구분하는 근본적 기준으로 중시되었다. 이때 문화란 周나라로부터 이어지는 유교문화를 가리키며, 禮樂文物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孔子에 의해 확립된 이같은 인식은 송대 朱子에 의해 신유학의 핵심 담론으로 자리잡았고, 주자학이 동아시아 각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보급되면서 화이론 또한 세계질서를 인식하는 보편적 사고방식으로 정착되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처음으로 北伐論을 제기했던 송시열은 天理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존중화 양이적의 필연성을 강조하며 청나라 정벌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송시열의 화이론은 尊周論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질서의 파괴자인 청나라를 문명의 중심인 중화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저항의식의 발로였다. 이때 존숭의 대상인 명나라 또는 중화란 중원지역 혹은 漢族을 의미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존주론은 예악문물로 상징되는 유교문화의 소유 여부에 따라 중화와 이적의 可變性을 인정하는 문화적 화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즉 조선 역시 지역적으로는 동쪽에 치우친 東夷라 칭해지지만 문화의 啓發 정도에 따라 중화로 변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17세기 후반 유일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로서 조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즉 朝鮮中華主義로 변모하였고, 이제 조선은 명나라의 뒤를 이어 유일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로서 위상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1619년 중국 湖南省 衡陽에서 태어난 王夫之는 1644년 청군이 북경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던 이후 직접 反淸擧兵을 주도하는 한편, 전도된 화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던 漢族 志士였다. 그는 인간의 性情이 생장한 지역의 자연 환경에 영향을 받고, 이에 따라 고유한 풍속과 습관을 지니게 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지역적 차이로부터 시작하여 문화적 혈연적으로 구분되어 형성된 집단인 중화와 이적은 상호 별개의 세계를 구성하며,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貴賤과 愚劣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이적에 대해서는 중화와 같은 인간의 규범으로 대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제기하였던 그는 중화와 이적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이치임을 주장하며, 중국사의 전개 과정을 북방 유목민의 영역 침탈에 대한 한족의 항쟁으로 이해하며, 영토적 관점에서 이적에 대한 배척을 중심으로 삼은 화이분별론을 중국사 해석의 주된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1618년 京都에서 태어난 山崎闇齋는 위의 두 사람과 달리 명청교체의 현실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화(명)와 이적(청)이 자리를 바꾼 이른바 華夷變態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던 막부체제 하에서, 변화한 세계질서 가운데 새롭게 성립한 江戶幕府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곧 중국이며 그 밖의 다른 나라가 이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각기 태어난 나라에 따라 화이가 정해진다는 주관적 화이론을 제기하며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인식을 부정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논리가 곧 특정 집단 사이의 우열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을 대신하는 세계의 중심으로 분명 일본의 존재를 인식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거론된 것이 바로 혈통의 문제였다. 그는 유학의 핵심 개념인 敬의 가르침이 국가의 성립부터 일관되게 이어지는 나라로서 일본의 정체성을 묘사하였고, 天照大神 이후 皇統이 끊임없이 계승되는 사실에 근거하여 중화인 일본의 역사가 주위의 이적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7세기 중반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사건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난 200년 간 지속되어 온 명나라 주도의 안정된 동아시아 질서 속에 살아오던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선택의 방향은 두 가지 뿐이었다. 현실적 지배자인 청나라에 臣服하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새롭게 해석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설정하여 현실을 버텨나가느냐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간의 안정된 국제질서 가운데 실제적 의미를 체감할 수 없었던 華夷論의 문제가 이제 현실 속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주요 담론으로 대두한 화이론은 각국이 처한 상이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宋時烈은 문화적 관점의 화이론을 변용하여 조선이 새로운 중화임을 주장한 ‘조선중화주의’를 제창하였고, 王夫之는 지리적 관점의 화이론을 근거로 청조 축출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한족 중심의 중화질서 재건을 이론화하였다. 山崎闇齋는 혈통적 화이론에서 유래한 天皇 중심의 日本型 華夷觀을 내세우는 등, 동아시아 3국의 지식인들은 제각기 다른 입론에 기반하여 중화와 이적의 분별을 이야기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논의들은 모두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 즉 중화로 인식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화로 규정하려는 이같은 경향은 청나라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康熙 雍正 乾隆의 盛世가 이어지면서 청조의 문화 수준이 향상되자, 문화적 화이론자들이 제발로 청나라 조정에 나아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1729년 옹정제는 ‘만약 태어난 곳에 따라 중화와 이적을 구분한다면 중원에서는 어떻게 짐승이 태어나겠는가 ’라는 말로 지리적 화이론을 조롱하는 가운데, 문화적 화이론의 관점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예악질서를 구비한 중화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 阮朝 베트남에서도 자신들이 유교의 정통성을 청나라보다 더 순수하게 계승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보다 중화적임을 자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족의 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기 위해 마련된 화이론의 이념이 이 시기에 이르러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이론의 중요성은 19세기 후반 근대전환기에 이르러서도 다시금 강하게 부각되었다. 조선의 경우 송시열의 문화적 화이론은 衛正斥邪를 주장하며 반외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華西 李恒老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국에서는 反滿革命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지역적 화이론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고, 왕부지는 譚嗣同, 章炳麟 등 한족 주도의 근대화를 도모하던 이들에 의해 ‘민족주의의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혈통적 화이론과 더불어 垂加神道을 제창하였던 山崎闇齋의 사상은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토대로 재해석되었다.
    요컨대 17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각국은 화이론의 변용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그동안 중국 ‘정통왕조’의 중심축 아래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있던 천하에 대한 관념이 동요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이같은 사상적 움직임이 근대 민족주의 형성에 직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 배타적 집단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하나의 계기를 이루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그동안 ‘전근대’와 ‘근대’의 단절을 전제하고 운위되어 온 ‘민족’의 관념을 재해석하는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 색인어
  • 송시열(宋時烈), 왕부지(王夫之),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화이론(華夷論), 중화(中華), 이적(夷狄), 주자학(朱子學), 문화적 화이론(文化的 華夷論), 지리적 화이론(地理的 華夷論), 혈통적 화이론(血統的 華夷論),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 화이지변(夷夏之辨), 화이변태(華夷變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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