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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몽골의 민족통합운동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910년대 몽골의 민족통합운동 연구 | 2007 년 | 이평래(한국외국어대학교& #40;글로벌캠퍼스& #41;)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7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1년 02월 1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1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20세기 몽골사의 주요과제의 하나인 1911년 몽골 독립과 그 후 전개된 민족통합운동과 그 역사적 성격을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몽골인들은 1368년 원나라 멸망 후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다가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중엽에 걸쳐 청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따라서 청 지배기 또는 그 이후 몽골인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청으로부터 독립과 민족통합이었다. 1911년 몽골 독립을 주도한 세력들이 독립 모의단계에서부터 민족통합을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독립선언 직후부터 이를 실천해나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11년 독립과 민족통합운동은 몽골 근현대사의 핵심과제라는 점에서 몽골사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사안의 성격상 당시 몽골과 만주를 놓고 치열하게 각축하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파워게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동북아 국제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데도 중요하다. 또한 본 연구주제는 제국주의 시대 한 약소국이 열강들의 크고 작은 압력을 받으면서 어떻게 독립을 이루고,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해나가고, 그들의 노력이 무슨 이유로 좌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1911년 몽골 독립이 끝까지 지켜지지 못하고 민족통합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몽골사의 발정과정에서 찾지 않고, 주변국의 세력관계에서 찾아왔다. 즉 1911년 독립은 러시아의 사주에 의한 것이고, 1915년 캬흐타 삼국 협정으로 독립이 취소되고 중국 종주권 하의 ‘외몽골만’의 자치국이 된 것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몽골 지역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일본 등 주변세력들의 협상과 흥정의 결과로 설명해왔다. 기존 연구자들은 본 연구의 핵심주제인 독립과 민족통합 문제를 몽골사 발전과정이라는 네적 요인보다는 몽골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열강의 세력관계라는 외적 요인에 중점을 두고 연구해왔다는 뜻이다.
    필자도 주변열강들이 20세기 초기 몽골사 전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한 나라 역사발전의 동력을 전적으로 외부요인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상기 두 가지 주제를 몽골사 자체 발전과정으로 설명해보려고 하였다. 예컨대 1915년에 조인된 캬흐타 삼국 협정으로 몽골 독립이 취소된 것은 외형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지만, 당시 몽골 정부 내 심각한 권력투쟁과 몽골 지배층의 분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또한 내외몽골 통합이 실패한 것도 전적으로 열강들의 압력 때문이라는 설명에 반대하고, 그 원인을 외몽골 지배층과 내몽골 지배층의 현실인식의 차이, 특히 중국과의 정치경제적 끈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내몽골인들의 처지가 여기에 중요한 몫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필자는 세 가지 방향에 연구를 수행하였다. 첫째는 1911년 독립과정과 민족통합운동의 초기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통합운동의 초기과정은 외몽골 지역 통합이다. 두 번째로 1912년-1913년에 전개된 몽골 신정부(복드 정부)의 내몽골 통합운동의 경과를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독립과 민족통합운동을 주도하고 복드 정부에서 고위관료를 지냈지만, 캬흐타 협정 이후 결국 중국으로 돌아간 비운의 내몽골 자식인의 일생을 통하여 내몽골인들이 1911년 독립과 민족통합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았다.
  • 영문
  •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Mongoilian independence of 1911 and the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of Bogd's government. This study is composed of three sujects.
    The first suject examines that the early development of the Mongol national movement for unity pursued at the time of its independence in 1911.
    The second suject examines that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Inner Mongolia unification movement of Bogd's government in 1912-1913. The second suject examines that the proceedings of independence in 1911 and the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through the life of Inner Mongolian intelligentsia, Khaisan(海山). I emphasize the following matters in this study.
    As a result, Inner Mongolia unification movement of Bogd's government was failed. The reason was, of course, objection of the Republic of China and Russia. Bogd's government was too weak to keep Outer Mongolian independence, so it was impossible to unify Inner Mongolia as the two big countries are against it. However, it also is not the accurate judge of the situation at that time to blame only foreign countries for everything about the failure on national unification. There is lack of persuasion and it is hard to agree because this is excluding the role of Mongolians in the history of Mongol. The Mongolians cannot be freed from their responsibility for the failure on national unification though it must be difficult for them to improve their own destiny in the complicated situation that Russia and Japan were struggling and the Republic of China was claiming the suzerainty on them.
    In regard of this, we need to keep it in mind that Inner Mongolian princes did try not to disconnect the relationship with China. On the contrary, the commons positively supported the independence of Outer Mongolia. This tells us that princes of Inner Mongolia should be blamed for the failure on unification in many aspects. In fact, some of princes refused to join Bogd's government in the first place, while some others finally turned to the side of the Republic of China after all the hesitation of choosing between Bogd's government and China. That is because of the political and economical interests started from the Qing dynasty era. Also, the reluctance against the independence led by Outer Mongolia was the big reason for princes of Inner Mongolia to refuse to unite Bogd's governmen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20세기 몽골사의 주요과제의 하나인 1911년 몽골 독립과 그 후 전개된 민족통합운동의 始末과 그 역사적 성격을 분석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몽골인들은 1368년 元朝 멸망 후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다가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중엽에 걸쳐 淸朝에 복속되었다. 따라서 청 지배기 또는 그 이후 몽골인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청조로부터 독립과 민족통합이었다. 1911년 몽골 독립을 주도한 세력들이 독립을 구상단계에서부터 민족통합을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독립선언 직후부터 이를 실천해나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11년 독립과 민족통합운동은 몽골 근현대사의 핵심 고리라는 점에서 몽골사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사안의 성격상 당시 몽골과 만주를 놓고 치열하게 각축하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파워게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동북아 국제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데도 유효하다. 또한 본 연구주제는 제국주의 시대 한 약소국이 열강들의 크고 작은 압력을 받으면서 어떻게 독립을 쟁취하고,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그들의 노력이 무슨 이유로 좌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1911년 몽골 독립이 끝까지 지켜지지 못하고 민족통합운동이 좌절된 이유를 몽골사의 자체 발정과정에서 찾지 않고, 당시 주변국의 세력관계에서 찾아왔다. 즉 1911년 독립은 러시아의 전적이 지원 하에서 이루어졌고, 1915년 캬흐타 삼국 협정으로 독립이 취소되고 중국 종주권 하의 ‘외몽골만’의 자치국으로 전락한 것이 모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몽골 지역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일본 등 주변세력들의 협상과 흥정의 결과로 설명해왔다. 기존 연구자들은 본 연구의 핵심주제인 독립과 민족통합 문제를 몽골사 발전과정이라는 內因보다는 몽골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열강의 세력관계라는 外因에 중점을 두고 연구해왔다는 뜻이다.
    필자 역시 주변열강들이 20세기 초기 몽골사 전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一國의 역사발전의 동력을 전적으로 외인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상기 두 가지 주제를 몽골사 자체 발전과정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였다. 이를 테면 1915년에 조인된 캬흐타 삼국 협정으로 몽골 독립이 취소된 것은 외형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지만, 당시 복드 정부 내 심각한 권력투쟁과 몽골 지배층의 분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또한 내외몽골 통합의 불발도 전적으로 열강들의 압력 때문이라는 설명에 반대하고, 그 원인을 외몽골 지배층과 내몽골 지배층의 현실인식의 차이, 특히 중국과의 정치경제적 끈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내몽골인들의 처지가 여기에 중요한 몫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필자는 세 가지 방향에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첫째는 1911년 독립과정과 민족통합운동의 초기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통합운동의 초기과정은 외몽골 지역 통합이다. 두 번째로 1912년-1913년에 전개된 몽골 신정부(복드 정부)의 내몽골 통합운동의 경과를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독립과 민족통합운동을 주도하고 복드 정부에서 고위관료를 지냈지만, 캬흐타 협정 이후 결국 중국으로 돌아간 悲運의 내몽골 자식인의 일생을 통하여 내몽골인들이 1911년 독립과 민족통합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았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몽골 근대사의 핵심주제인 1911년 독립과 그 후 전개된 민족통합운동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20세기 초기 민족통합은 독립과 함께 몽골인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역사적 과제였다. 그래서 1911년 독립 주도세력들이 독립 구상단계에서부터 민족통합 문제를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독립선언 직후부터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런 점에서 민족통합운동은 1911년 독립의 마무리이자 민족재흥의 신호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민족통합 문제는 강대국의 강압으로 그것이 파기될 때까지 몽골 독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대외협상의 공식의제로 등장하고, 협상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본 연구는 제국주의 시대 약소국의 민족문제 해결의 모델을 제시해 줄 것이다. 본 연구의 대상 시기는 제국주의시대로 몽골인들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한 때이다. 제국주의시대 약소국의 운명이 그렇듯 몽골인들도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의 틈새에서 고난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그 이듬해(1911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그 후 1921년에 다시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함으로써 우리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몽골의 독립과 조선의 식민지화는 국제질서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지만, 한 나라는 독립국이 되고, 한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한 것을 전적으로 열강의 이해관계의 산물로 돌려버리는 것도 온당하지 못하다. 여기에는 제국주의 열강을 상대한 조선과 몽골 지배층의 정국 대처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당시 몽골 지배층들은 최소한의 독립만 보장되면, 나머지 부분은 러시아에게 일임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몽골의 독립과 조선의 식민지화의 분기점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본 연구는 민족통합운동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의하고, 그 이유를 외몽골과 내몽골 지배층들의 인식 차이 및 중국에 경도된 내몽골 지배층들의 처지에서 찾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민족문제 해결에서 자민족의 역할의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외몽골 통합운동은 실패하였다. 몽골 신정부가 민족통합을 이룩하지 못한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압력 때문이었다. 몽골 신정부는 외몽골의 독립마저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체였고,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는 한 민족통합은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민족통합 실패의 모든 책임을 외세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정확한 진단은 아니다. 이는 몽골사에서 몽골인의 역할을 송두리째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하고 중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몽골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들도 민족통합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1911년 독립선언 이후 내몽골인들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인들은 외몽골의 독립을 지지한데 반하여 대대수 지배층들은 철저하게 중국화 되어 있었고 중국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는 통합실패의 일부 책임이 내몽골 왕공들에게 있었음을 말해준다. 독립선언 직후 일부 내몽골 왕공들은 몽골 신정부에의 합류를 거부했고, 또 일부는 양자 사이에서 주저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중국 측으로 돌아섰다. 그 이유는 청조 때부터 맺어온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본 연구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20세기 초기 동북아 국제관계를 이해하고, 그 중심에 위치하는 몽골의 민족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 주제는 몽골의 민족통합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중화민국의 변강정책, 러시아의 극동정책, 일본의 대륙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20세기 초기 몽골 민족해방운동사는 물론, 몽골과 만주를 에워싸고 치열한 각축을 벌인 러-일-중 관계를 파악하는데도 기여를 할 것이다.
  • 색인어
  • 내몽골 통합운동, 복드 정부, 할하, 내몽골 왕공, 청조, 러시아, 중화민국, 1911년 몽골 독립, 민족통합운동, 독립운동, 젭춘담바, 몽골 왕공, 할하, 복드 칸, 청조, 하이산, 후레, 다 라마 체렌치메드, 한드도르르지, 캬흐타, 람스테드, 히트로보, 페테르부르크, 코트비치, 러시아 영사, 원세개, 북경 정부, 외몽골, 내몽골, 서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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