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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15865&local_id=10014588
淸.敎皇廳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淸朝 관리의 인식과 실천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淸.敎皇廳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淸朝 관리의 인식과 실천 | 2007 Year | 최병욱(강원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87
Year(selected) 2007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9년 05월 28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9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교안의 발생은 중국사회뿐만 아니라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프랑스가 중국에서 천주교 보호권을 조약 체결을 통해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것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청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프랑스 보교권 아래 있는 선교사의 부당행위를 제약하고 교안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교황청과의 외교수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교황청 역시 포르투갈의 보교권 폐지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교계제도의 건립을 계획하며 중국 천주교를 직접 관할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양측의 노력은 1880년대 이홍장의 주도 하에 청조와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직접적인 교섭으로 이어졌다. 결국 프랑스의 간섭 때문에 청조와 교황청 사이의 외교수립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이후 이러한 교섭의 여파와 국제환경 등의 변화에 따라 청조 관리들은 적극적으로 청과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홍장의 실패 이후 청조는 왜 교황청과 외교관계의 수립을 시도하지 못했는가.
    우선 당시 외교관계 수립의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 그 첫 번째 요인이다. 청정부는 말할 것도 없이 교황청도, 그들이 취한 실질적인 행동은 모두 열강의 감시, 특히 프랑스의 감시 하에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 정교관계에 비록 변화가 발생했지만, 결코 중국에서의 실질적 이익을 버릴 수가 없었고, 완전히 중국의 천주교 사무에 대한 간섭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진정으로 프랑스를 배제하고 직접적으로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면 프랑스는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청 왕조 이후 민국 시기에도 그러하였다. 민국 시기에 중국정부가 교황청과 왕래할 때, 여전히 프랑스의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청 정부 방면에서 당시 외교 사무를 주관하는 혁광 등은 정치적인 안목이 이전의 이홍장 등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했다. 비록 청조 관리들 사이에서 교황청과의 외교수립 요구의 소리가 높았고, 입안한 방안도 우수했지만, 혁광 등은 부정적인 효과만을 부각시키며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1902년에 장식성이 상주하여 제기한 교황과 연락하여 교회를 자립시켜 관리하려는 등의 건의에 대해서 "일이 많고 장애가 있어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 외무부의 대답은 그 견해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교황청이나 청정부 모두 외교관계의 수립의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다음으로 民敎 사이의 모순이 완화되어 청정부가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요구가 그렇게 긴박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청정부가 바티칸과 외교수립을 하려는 목적은 중국에서 천주교의 활동을 제약하고 규범화하려고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기 의화단운동을 거쳐 교회는 스스로 선교활동 중에 나타나는 몇몇 잘못된 문제를 바로 보기 시작했고, 과거 선교사무 중의 부당한 것을 검토하고 시정하기 시작했다. 신사층이나 일반 민중들은 이제 모두 교회가 중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승인하고 맹목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점차 버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청정부는 바티칸과 외교관계 수립에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 English
  • China's anti-Christian movement after the Opium War was a very serious problem not only for the Chinese society, but also for its diplomatic relations. In particular, France's legal rights approved by the Protectorate over Catholic Missions in China caused many problems. The Qing Dynasty planned to establish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to restrict unjust acts of Catholic missionaries of France and solve religious education problems. The Vatican also planned to establish a hierarchy in China and tried to administer China's Catholic authorities after the abolition of the Protectorate over Catholic Missions in Portugal.
    Such mutual efforts led to direct negotiations between the Qing Dynasty and the Vatican under the leadership of Lihongzhang for a diplomatic relationship in the 1880s. Although these direct negotiations did not succeed because of France's interference, they, and the changing international circumstances, motivated the government officials of the Qing Dynasty to actively promote a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the Qing Dynasty and the Vatican. However, the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of the Qing Dynasty was not very active. Then, why did the Qing Dynasty failed to establish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after Lihongzhang's failure
    First of all, the conditions of a diplomatic relationship were not very mature at that time. France underwent changes in political and religious relationships, but it could not renounce its substantial benefits from China and did not completely withdraw from intervening in China's Catholic affairs. If the Chinese government had turned its back on France and established a direct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France would not have tolerated it. Later as a democratic state, the Chinese government was still intervened in by France when interacting with the Vatican.
    At that time, Yikuang was steering the foreign affairs in China. However, his political insights and leadership qualities were far inferior to those of Lihongzhang. Many Chinese officials demanded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with a much more detailed and attainable plan, Yikuang only stressed its negative effects and refused to promote it. Thus, neither the Vatican nor the Qing Dynasty established matured conditions for their diplomatic relationship.
    Second, the conflicts between citizens and religion alleviated and the Qing Dynasty was not very desperate about its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Qing Dynastic attempted to establish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to regulate and uniform the Catholic activities in China. However, the Catholic Church began to see the problems of its missionary activities after the shock of the Boxer Rebellion and other anti-church conflicts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result, it reviewed and improved a few unjust customs of its missionary affairs. In return, the Chinese people, including the folk religious leaders and the commoners, approved of the fact that the Church exists in China and discarded blinded doubts and exclusion.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was not very desperate for the Qing Dynasty to establish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Vatican to dispatch envoys, and instruct and regulate the Catholic missions in China.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의 교안은 중국사회뿐만 아니라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프랑스가 중국에서 보교권을 조약 체결을 통해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것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청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프랑스 보교권 아래 있는 선교사의 부당행위를 제약하고 교안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교황청과의 외교수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교황청 역시 포르투갈의 보교권 폐지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교계제도의 건립을 계획하며 중국 천주교를 직접 관할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양측의 노력은 1880년대 이홍장의 주도 하에 청조와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직접적인 교섭으로 이어졌다. 결국 프랑스의 간섭 때문에 청조와 교황청 사이의 외교관계 수립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이후 이러한 교섭의 여파와 국제환경 등의 변화에 따라 청조 관리(장식성, 여해환, 세증, 장서음 등)들은 적극적으로 청과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을 제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조 외무부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당시 외교 사무를 주관하는 혁광 등은 정치적 안목이나 일을 처리하는 방면에서 이홍장 등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비록 청조 관리들이 바티칸과 외교수립 요구를 했고, 그들이 입안한 방안도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치밀하고 실천적인 것이었지만, 혁광 등은 부정적인 효과만을 부각시키며 외교수립을 고려하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만한 요인들이 있었다. 프랑스가 국내의 정교 문제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 천주교 사무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 사실 민국 시기에도 프랑스의 방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民敎 사이의 모순이 완화되어 청정부가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요구가 그렇게 긴박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세 아래 청과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의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본 연구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거의 다루지 못한 19세기말-20세기초의 중국과 바티칸 사이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청조 관리들의 인식과 실천에 대해 살펴보았다. 19세기말부터 국제질서 속의 청 왕조를 인식해 간 관리들은 교안의 원인이 된 프랑스 보교권을 배제하기 위해 교황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등 외교관계의 개선을 통해 국내 천주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에 따른 다양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청조 관리들의 해결책들을 살펴보고, 청조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원인에 대해 분석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청말에 진행되었던 중국과 바티칸 사이의 외교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높이고, 아울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 바티칸 사이의 외교 관계 수립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전망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또한 중국의 기독교사 연구에도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으며, 청조의 기독교 인식 및 정책에 대한 연구에도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학문의 폭을 넓혀 이러한 연구의 결과 교황청과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일반인들의 이해의 폭도 넓혀질 것으로 예상되며, 국내의 기독교사 연구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한 결과물을 학계에 발표한 후, 연구노트의 형식으로 재정리하여 가톨릭 신문이나 가톨릭 잡지에도 기고하여 국내 가톨릭계가 바라보는 교황청과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이 연구의 결과, 정치.경제.문화사의 영역에서 소외된 종교와 관련된 외교관계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좀 더 넓은 학문의 시각을 갖도록 해주며,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외교적 형태들과 과거에 진행되었던 사건들과 연관시켜 봄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도록 할 것이다.
  • Index terms
  • 프랑스 보교권, 청조, 교황청, 외교관계, 이홍장, 장식성, 여해환, 혁광, 정교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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