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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고종의 정치사상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대한제국기 고종의 정치사상연구 | 2007 년 | 장영숙(상명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61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5월 1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친정 초기 고종의 정치사상은 서기 수용보다 동도 수호가 중시된 동도서기론이었다. 이 시기 동도는 유교적 강상윤리로 범주화 되고 있었지만, 유교이념에 입각한 사회질서와 전제군주체제를 포함한 국가운영체제 등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갑오․을미년간 일본의 간섭과 대한제국기 러일의 각축에 시달리게 되면서, 동도는 더 이상 군주권의 위상과 사회적 위계질서를 지켜주는 이데올로기로 역할하지 못했다. 이 시기 동도는 단지 협소한 의미로서의 삼강오륜과 종교의 범주인 東敎로 퇴영되었다. 대한제국기의 개혁논리로 구현된 ‘舊本新參’은 東敎西法으로서 동도 보다 서법, 즉 축소된 동도 보다는 상대적으로 외연이 확대된 서기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변법의 맹아는 독립협회의 활동에 자극받은 민중들이 정치의식을 향상시켜 나간 것과 더불어 중추원을 통해 민선의관제도를 마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중추원이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하고, 근대 민주적 절차와 방법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초기 입헌민주주의 제도라 할만하다. 고종이 이를 수용한 것은, 민권의 성장을 바탕으로 군주권을 강화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가 강성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의회로서의 기능이 민들에게 주어질 경우, 독립협회와 민중이 연대하여 군주권을 제한할 수도 있어서 고종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었다.
    따라서 서기도입이 보다 중시된 변법을 지향하는 논의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고종은 강력한 황제권 구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고종은 근본을 튼튼히 하여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하는 통치질서를 정립해 나갈 때 국왕권이 공고해지는 것은 물론, 국권도 강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고종이 종교적 범주로 퇴영화한 동도에 여전히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 서법의 확대 수용 열기 속에서 고종은 근대적 개혁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다. 개혁은 정치체제 면에서 서양의 입헌정체만 수용하지 않았을 뿐, 각종 사회․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변법의 범주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외연이 넓었다. 또한 근대사회의 기초를 다졌다는 면에서 의의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재원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민중에게 고통이 전가되었고, 군 지휘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기기반을 허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고종은 변법에 가까운 폭넓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동교, 즉 퇴영되고 있던 동도였다. 성리학에 기반하여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꾼 군주는 아니었지만, 서양문명과의 절충을 꾀하면서도 통치규범과 윤리는 유교의 정신적 가치에 의존하는 과도기적 군주였던 것이다. 때문에 동도와 서기, 동교와 서법의 이중적 가치가 내면에서 혼란스럽게 충돌하면서 한편으로는 유교에 기반한 절대군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기를 수용하는 개명군주로서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퇴영된 동도에 기반한 통치사상의 外化는 황제권 강화에 몰입하는 보수성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개혁의 동력을 잃고, 민중과의 화합에서 멀어졌다는 점에서 한계로 작용하였다.
  • 영문
  • During the early days of his direct ruling of the country, Gojong's political philosophy was based essentially upon the so-called 'Dongdo-Seogi' argument("putting the Eastern essence into Western devices"). Yet it should be noted that Gojong's emphasis was placed upon the 'guarding the Eastern way & essence' part, instead of the 'embracing Western methods & devices' part.
    At the time, the concept of 'Dongdo' was essentially a Confucian moral basis, and it also referred to the entire social order based upon Confucian ideology and the dynastic structure that was the royal kingdom. Yet the Japanese intervention in Joseon affairs during the Gabo and Eulmi years, and the spillover from the Japanese-Russian conflicts of the Daehan imperial period, the scope of the Dongdo concept was reduced to a much smaller one, such as only referring to the 'Eastern teaching'(東敎) of three principles and five morals, featuring certain qualities in the vein of religion. The argument of 'basing reforms on the old ways while consulting and embracing the new ways(舊本新參)’ was the Daehan empire days' equivalent of the 'Eastern teachings and Western methods(東敎西法)' sentiment of the early Gojong years. This new argument actually embraced more strongly the 'Western devices and methods', which came to display a relatively wider scope and more immediate priority than the already significantly reduced 'Eastern way'.
    The seeds for changes(변법) were apparent in the people's elevated political consciousness which was inspired by the activities of the Independence Association(독립협회), and the launch of a civilian election system(민선의관제도) through the Jungchu-weon office. Gojong accepted such new ideas because he figured that the country would become strong and benefit from a reinforced king's authority which could only be possible to achieve based upon the evolution in human rights. Yet, on the other hand, the status of representatives vested in the hand of the people could indeed pose a threat to the king as well.
    So Gojong tried to build a strong ruling authority of his own as the empire's emperor, and also establish a strong sovereignty for the country. And modern reforms accompanied such efforts as well. Among the reform efforts, only the Western constitutional system was not picked up, and other institutional reforms regarding social and economic issues all went forward, in a magnitude that could really be called as a 'change'. Such efforts were very important as they laid out the ground work for the Joseon society to enter a modern period. Yet in the process of securing necessary funding for such reforms, the civilian population was urged to pay for it, and Gojong's efforts to secure his authority over the military cost him of his own base of support.
    Gojong wished to accept and embrace the Western civilization(and achieve a balance in the process), yet he also relied heavily upon the Confucian set of philosophical values in terms of observing ruling principles and moral duty. He was a king that had to witness a transitional period forming around him. So in his mind and his governance, the Eastern essence and the Western devices, Eastern teachings and Western methods were chaotically colliding with each other, and that resulted in Gojong's own featuring of an image of a monarch pursuing Confucian ruling of the country at one point, and an image of an Enlightened ruler embracing Western things on the other. And in the meantime there were weaknesses on Gojong's part as well, like basing his political philosophy upon a very narrow version of 'Eastern ways' and then inviting his own obsession with reinforcing his own authority to cloud his judgement, or losing the momentum of the reform efforts, and as a result alienating himself from both the public and from the possibility of establishing a certain level of unity with his own subject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친정 초기 고종의 정치사상은 서기보다 동도 수호가 중시된 동도서기론이었다. 이 시기 동도는 유교적 강상윤리로 범주화 되고 있었지만, 유교이념에 입각한 사회질서와 전제군주체제를 포함한 국가운영체제 등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갑오․을미년간 일본의 간섭과 대한제국기 러일의 각축에 시달리게 되면서, 동도는 협소한 의미로서의 삼강오륜과 종교의 범주인 東敎로 퇴영되었다. 대한제국기 개혁논리로 구현된 ‘舊本新參’은 東敎西法에 대치되는 것으로서, 축소된 동도 보다는 상대적으로 외연이 확대된 서기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변법의 맹아는 독립협회의 활동에 자극받은 민중들이 정치의식을 향상시켜 나간 것과 더불어 중추원을 통해 민선의관제도를 마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고종이 이를 수용한 것은, 민권의 성장을 바탕으로 군주권을 강화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가 강성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의회로서의 기능이 민들에게 주어질 경우,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었다.
    따라서 고종은 강력한 황제권 구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국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속에서 국권의 강성함도 꾀하였다. 반면 근대적 개혁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다. 개혁은 서양의 입헌정체만 수용하지 않았을 뿐, 각종 사회․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어 변법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외연이 넓었다. 또한 근대사회의 기초를 다졌다는 면에서 의의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재원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민중에게 고통이 전가되었고, 군 지휘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기기반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고종은 서양문명과의 절충을 꾀하면서도 통치규범과 윤리는 유교의 정신적 가치에 의존하는 과도기적 군주였다. 때문에 동도와 서기, 동교와 서법의 이중적 가치가 내면에서 혼란스럽게 충돌하면서 한편으로는 유교에 기반한 절대군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기를 수용하는 개명군주로서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퇴영된 동도에 기반한 통치사상의 外化는 황제권 강화에 몰입하는 보수성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개혁의 동력을 잃고, 민중과의 화합에서 멀어졌다는 점에서 한계로 작용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대한제국기 고종의 정치사상을 연구한 결과, 친정초기의 동도서기사상은 전반서화와 변법을 주창하는 사회적 요구 속에서 東敎西法으로 변화하여 나타나고 있었다. 동도와 서기, 동교와 서법의 이중적 가치가 내면에서 혼란스럽게 충돌하면서 한편으로는 동교에 기반한 절대군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기를 수용하는 개명군주로서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보였다.따라서 고종은 국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속에서 근대적 개혁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다. 개혁은 입헌정체만 수용하지 않았을 뿐, 각종 사회․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어 변법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외연이 넓었다. 또한 근대사회의 기초를 다졌다는 면에서 의의 역시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장원을 중심으로 개혁재원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민중에게 고통이 전가되었고, 군 지휘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기기반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고종의 정치사상이 동교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권과 지지기반 강화에 몰입하는 보수성을 보다 많이 드러내게 되었으며, 개혁의 동력을 잃고 민중과의 화합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다.

    ① 고종이 추진한 광무개혁의 기본정신인 ‘舊本新參’은 고종의 초기 정치사상인 동도서기와 견주어 볼 때, 동교서법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삼강오륜으로 축소된 동교에 의지하면서 서기를 보다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고종은 폭넓은 개혁을 시도하여 변법에 가까운 개혁성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바탕인 동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때문에 황제권과 지지기반 강화에 몰입하는 모습을 더 많이 드러냈다. 이로써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게 되었고 개혁도 좌초하게 되었다. 결국 고종은 전근대와 근대의 변경에서 과도기적 군주로 존재하였으며, 그가 선택한 보수적인 개혁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통해 개혁의 성공여부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로 활용할 수 있다.
    ② 대한제국기에 고종이 변법으로 정치사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데 방해가 된 계층은 보수화된 관료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입헌정체까지 수용하며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집권관료세력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보수적 개혁의 선에 머무르려 하였다. 고종 또한 한편으로는 황제권이 곧 국권이라 생각하고 국권의 강성함을 위해 황제권 정지작업을 서둘렀다. 이는 민권확대를 열망하던 독립협회 및 민중들의 인식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멸망원인 가운데 하나는 집권층 내부의 알력을 조정하지 못하고, 민중의 요구를 한 곳으로 모아가지 못한, 고종의 리더십 부족에 있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국가의 흥망을 분석하는 활용의 근거가 될 수 있다.
    ③ 동도서기론은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구체제를 옹호하는 정치사상적 기능을 수행함에 따라 전근대적 사상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전근대와 근대의 과도기에서 근대를 지향하는 또 다른 문명개진의 논리가 동도서기 사상에서 분기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國粹主義, 전반서화론, 자강운동, 문명개화론 등이 퇴영적 단계의 동도서기 이후에 분출되어 나옴으로써 근대를 지향하는 새로운 사상이 되었다. 따라서 동도서기론은 근대를 여는 자양분이 된 사상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
  • 색인어
  • 고종, 대한제국, 동도서기, 동교서법, 내장원, 원수부, 유교, 변법, 보수성, 황제권, 독립협회, 의회, 입헌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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