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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대의 麗元關係의 형성과 그 특징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려 충렬왕대의 麗元關係의 형성과 그 특징 | 2007 년 | 김현라(부산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32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5월 0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려는 몽골과 접촉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몽골의 내부사정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세조 쿠빌라이는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제국의 통합을 위한 방법으로 한법적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집권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쿠빌라이가 바라는 한법적 체제라는 것은 바로 중원을 지배해 왔던 한족이 지향했던 중화사상, 즉 황제지배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이러한 한법적 체제의 적용도 몽골 내부 사정으로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몽골민족의 근원지인 막북지역을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전통인 유목적 습속을 버리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목적 습속은 바로 분봉체제를 가리킨다. 쿠빌라이가 충렬왕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던 것은 바로 혈족에게 수여하는 분봉체제를 통하여 그의 정권의 안정화를 바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편으로 쿠빌라이의 견제대상이었던 요동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동방제가의 옷치긴 왕가의 견제로서 실행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가 1260년대부터 설치한 많은 기구도 옷치긴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쿠빌라이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어느 정도 실현되자 중화사상을 본격적으로 고려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중화사상은 바로 황제지배체제를 통한 제후국의 실질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에 충렬왕 5년을 전후로 고려에 대한 지배의 틀을 마련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하였다. 충렬왕 13년에 옷치긴 왕가의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지만 쿠빌라이가 70대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친정군을 이끌었다는 것은 쿠빌라이정권에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쿠빌라이가 바라던 한법체제에 의한 실질적 지배가 실현되었다.
    몽골제국기에서 가장 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성종치세기이다. 성종은 자신과 혈족관계가 더 깊은 충선왕을 고려왕위에 올려 대고려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고려왕조 본연의 제도로 회귀하고자 하자 즉각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그는 충렬왕을 복위시켰지만 다루가치의 파견 등을 통하여 고려의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이러한 대몽골제국의 대고려정책의 변화 속에서 충렬왕은 먼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그는 국내의 부원세력을 견제하고, 또한 친조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러한 결실이 충렬왕 4년에 부마라는 관직의 하사이다. 충렬왕은 비록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부마의 위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것이 이때에 실현되었고 이후 대몽골제국에서 파견한 사신이 비로소 충렬왕과 신하의 위치에서 공무를 보았다.
    이후 그의 대몽골제국에 대한 의무는 부마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책임으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어 충렬왕 13년 나얀반란이 발발했을 때 적극적인 참전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 점을 두고 세조구제와 관련된 ‘6사’의무의 변질이며 세조구제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실제 충렬왕은 고려와 인접한 옷치긴 왕가의 견제라는 쿠빌라이의 정책의 실현과 관련된다. 그러나 세조의 황제지배체제의 구현은 나얀반란 이후 잘 시행되지 못하였고, 그것은 그의 뒤를 이은 성종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 충렬왕은 나얀반란 이후 나얀의 잔당인 카단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려의 사정을 악화시켰다. 고려민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고 심지어 강화도로 국왕이 피신을 가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자인 충선왕의 입지는 다져졌고,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충렬왕은 8개월 이후에 복위하였다. 그러나 복위 이후에도 충렬왕은 이전의 위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과 무종 등의 대고려정책은 실질적 지배를 지향하였고, 그 거점은 요동지역이 되었다. 이에 대몽골제국은 충선왕을 심왕으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혈족에게 사여하는 분봉체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 영문
  • Geryeo had been changed a lot after making a contact with Mongolia. Phenomenally Geryeo had to accept a direct and indirect influence by Mongolia. The influence was deeply related with Mongolia’s internal affairs. After Kublai Khan acceded to the throne, He wanted to set a "Hanbub"system as a way of unification of the empire. However, his grasping political power was not normally accomplished; he did not overcome his own ultimate limitation. The "Hanbub" systemKublai Khan wanted to set in his country was the "Sinocentrism"(the Emperor system) that Hanjok headed for. Therefore, in the areas Kublai Khan conquered, they let them keep their own tradition but in stead, had a courtesy etiquette. After the centralization of Kublai Khan Regimecame out successfully, Kublai Khan decided to control Geryeo substantially that meant participating in throne as well as internal affairs. The participation of Mongolia could it be possible because a particular area called Yodong was under Kublai Khan Regime.
    Chungnyeol of Goryeo conducted many political measures in order to strengthen a career of himself under the Kublai Khan’s political changes to Goryeo. First of all, he checked a power that was in collusion with Won and grew his statue through having an audience of the Emperor of Won. Chungnyeol established the son-in-law status of the Emperor of Won and took a full responsibility of the position for Won. For instance, he expressed an active participation in internal disturbance of the Mongolian Empire.
    However, his status and effort headed for Won had been weakened because of Kublai Khan’s death and Sungjong’s accession to the throne. Sungjong wanted to have a direct control over Goryeo through Yodong and chose Chungsun who was a son of Chungnyeol.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려는 몽골과 접촉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몽골의 내부사정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세조 쿠빌라이는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제국의 통합을 위한 방법으로 한법적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집권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쿠빌라이가 바라는 한법적 체제라는 것은 바로 중원을 지배해 왔던 한족이 지향했던 중화사상, 즉 황제지배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이러한 한법적 체제의 적용도 몽골 내부 사정으로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몽골민족의 근원지인 막북지역을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전통인 유목적 습속을 버리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목적 습속은 바로 분봉체제를 가리킨다. 쿠빌라이가 충렬왕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던 것은 바로 혈족에게 수여하는 분봉체제를 통하여 그의 정권의 안정화를 바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편으로 쿠빌라이의 견제대상이었던 요동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동방제가의 옷치긴 왕가의 견제로서 실행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가 1260년대부터 설치한 많은 기구도 옷치긴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쿠빌라이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어느 정도 실현되자 중화사상을 본격적으로 고려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중화사상은 바로 황제지배체제를 통한 제후국의 실질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에 충렬왕 5년을 전후로 고려에 대한 지배의 틀을 마련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하였다. 충렬왕 13년에 옷치긴 왕가의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지만 쿠빌라이가 70대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친정군을 이끌었다는 것은 쿠빌라이정권에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쿠빌라이가 바라던 한법체제에 의한 실질적 지배가 실현되었다.
    몽골제국기에서 가장 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성종치세기이다. 성종은 자신과 혈족관계가 더 깊은 충선왕을 고려왕위에 올려 대고려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고려왕조 본연의 제도로 회귀하고자 하자 즉각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그는 충렬왕을 복위시켰지만 다루가치의 파견 등을 통하여 고려의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이러한 대몽골제국의 대고려정책의 변화 속에서 충렬왕은 먼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그는 국내의 부원세력을 견제하고, 또한 친조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러한 결실이 충렬왕 4년에 부마라는 관직의 하사이다. 충렬왕은 비록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부마의 위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것이 이때에 실현되었고 이후 대몽골제국에서 파견한 사신이 비로소 충렬왕과 신하의 위치에서 공무를 보았다.
    이후 그의 대몽골제국에 대한 의무는 부마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책임으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어 충렬왕 13년 나얀반란이 발발했을 때 적극적인 참전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 점을 두고 세조구제와 관련된 ‘6사’의무의 변질이며 세조구제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실제 충렬왕은 고려와 인접한 옷치긴 왕가의 견제라는 쿠빌라이의 정책의 실현과 관련된다. 그러나 세조의 황제지배체제의 구현은 나얀반란 이후 잘 시행되지 못하였고, 그것은 그의 뒤를 이은 성종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 충렬왕은 나얀반란 이후 나얀의 잔당인 카단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려의 사정을 악화시켰다. 고려민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고 심지어 강화도로 국왕이 피신을 가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자인 충선왕의 입지는 다져졌고,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충렬왕은 8개월 이후에 복위하였다. 그러나 복위 이후에도 충렬왕은 이전의 위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과 무종 등의 대고려정책은 실질적 지배를 지향하였고, 그 거점은 요동지역이 되었다. 이에 대몽골제국은 충선왕을 심왕으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혈족에게 사여하는 분봉체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첫째, 한중관계사의 연구에서 고려만의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 속의 고려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동아시아의 외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공-책봉체제에 대한 보다 정치적인 구명을 통해 새로운 고려시대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이 외교사적으로 인연을 맺어온 2000여 년의 역사를 보다 역동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까지도 제시가 가능하리라 본다.
    둘째, 동아시아 속의 고려의 위상이 잘 구명된다면 원간섭기 고려의 정치․경제․사회 전 부분에 이르는 변화상의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 시기 고려의 정책을 고려의 자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주체로서 국왕의 위상 또는 역할을 가늠하거나 또는 국내의 정치를 단순히 부원세력 대 반원세력으로 구분하여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계가 극복된다면 고려의 내부변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역사의 발전상을 구명해 볼 수 있다.
    셋째, 이상의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 일정한 결과가 도출된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해야할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역사관과 국가관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현재 중국에서 연구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쿠빌라이칸, 충렬왕, 외교, 한법체제, 세조구제, 성종,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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