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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주거주 몽골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변화 : 호적중초에 보이는 본관명 ‘大元’ 가문의 사례분석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조선후기 제주거주 몽골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변화 : 호적중초에 보이는 본관명 ‘大元’ 가문의 사례분석 | 2007 년 | 김동전(제주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44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5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제주도는 1273년(원종 14)부터 1374년(공민왕 23)까지 100여 년 간 원나라의 직·간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즉, 세계대제국 건설을 위해 일본침략을 도모하던 원나라는 제주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를 토벌하고 제주를 원의 관할로 삼았다. 그후 100여 년간 제주에는 원나라에서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들이 제주로 건너오게 된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나라가 제주를 통치하기 위하여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 등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는데, 다루가치 등의 통치자, 제주인들을 억압하기 위한 군인들이 제주에 건너왔다. 둘째, 원나라는 1276년(충렬왕 2) 제주에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을 설치하였다. 목장의 말을 관리하는 전문 마필사육자들을 목호(牧胡)라 칭하였는데, 이들이 제주로 파견되어 왔다. 셋째, 원은 죄인 뿐만 아니라, 왕족들까지 제주에 유배시켰으며, 명나라는 원의 황실가족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따라서 유배인으로 제주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넷째, 원이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원나라 군대의 일부는 명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제주로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에 건너온 그들의 후손들은 본관을「대원(大元)」이라 칭하였다. 제주읍지류에는 본관을 대원이라 칭한 성씨들로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씨 등 10개 성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성씨들은 제주가 원나라의 관할하에 있을 때는 제주인을 대상으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였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이들은 조선전기까지도 나름대로 제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조선후기 제주지역 호적중초자료를 통해 분석하였다. 즉,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매 3년마다 작성된 호적중초 자료에서 본관이 ‘대원’으로 기재된 사람들의 정보를 분석함으로써 몽골인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해 보았다. 그 결과 10개 성씨 외에도 차(車), 강(康), 좌(佐)씨 등이 대원을 본관으로 하고 있었음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대원’ 본관은 사라지지만, 일부의 성씨는 19세기 후반까지 ‘대원’ 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문 분석을 통해서 볼 때, ‘대원’ 본관을 지속해 가는 가문의 경우에 교노(校奴), 답한(畓漢), 아병(牙兵), 모군(募軍), 과직(果直), 군두(群頭), 석장(席匠) 등의 직역(職役)을 칭하고 있었다. 이들 직역은 신분적으로 매우 열악한 계층들로 19세기 몽골인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부의 가문은 ‘대원 강씨(大元姜氏)’를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바꾸는 등 ‘대원’ 본관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대원 본관에서 벗어남으로써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의 19세기 존재형태는 사회적 지위가 낮았음을 의미한다.
  • 영문
  • Jeju island was under the direct and indirect reign of Yüan for over 100 years from 1273 A.D. (Wonjong 14) to 1374 A.D. (King Kongmin 23). During this period, some people of Yüan established in Jeju island as a ruler, a soldier, a herder, and an exile. Their descendants called their places of origin 'Daewon' (Great Yüan). In the journals of Jeju town, we can recognize some last names such as Jo (趙), Lee (李), Seok (石), Cho (肖), Kang (姜), Jung (鄭), Jang (張), Song (宋), Ju (周), Jin (秦). I examined the last names which has their origin places as 'Daewon' in the family registers of Jeju of late Chosun Dynasty. As a result, some last names such as Cha (車), Kang (康), Jao (佐) are added. In the 19th century, the origin places of Daewon gradually disappeared, but until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some last names maintained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In light of the analysis of some family clans which continued to keep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those family clans assumed the positions of Kyono (校奴), Daphan (畓漢), Abyoung (牙兵), Mokun (募軍), Gaojik (果直), Kundu (群頭), Seokjang (席匠), etc. and had difficulty in elevating their social status. Some of the families changed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into Jinju Kang (晋州姜氏) and tried to throw away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This means that even in the 19th century the last names, which has the origin places of Daewon, were low in social standi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제주도는 1273년(원종 14)부터 1374년(공민왕 23)까지 100여 년 간 원의 직·간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원의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건너와서 정착하였다. 그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은 제주를 통치하기 위하여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 등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는데, 통치자 및 군사의 일원으로제주에 건너왔다. 둘째, 원이 1276년(충렬왕 2)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하면서 마필사육 전문가인 목호(牧胡)들이 파견되어 왔다. 셋째, 원은 죄인 뿐만 아니라, 왕족들까지 제주에 유배시켰으며, 명나라는 원의 황실가족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넷째, 원이 멸망한 후 몽고군대의 일부는 명(明)의 신민(臣民)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제주로 건너왔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에 건너온 그들의 후손들은 본관을「대원(大元)」이라 칭하였다. 제주읍지류에서는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등 10개 성씨가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조선후기 제주지역 호적중초자료를 통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차(車), 강(康), 좌(佐)씨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대원’ 본관은 사라지지만, 일부의 성씨는 19세기 후반까지 ‘대원’ 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문 분석을 통해서 볼 때, ‘대원’ 본관을 지속해 가는 가문의 경우에 교노(校奴), 답한(畓漢), 아병(牙兵), 모군(募軍), 과직(果直), 군두(群頭), 석장(席匠) 등의 직역(職役)을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 지위 상승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부의 가문은 ‘대원 강씨(大元姜氏)’를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바꾸는 등 ‘대원’ 본관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여러 가지로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사회적 지위가 열악하였음을 의미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00여 년 간 원나라의 직·간접적인 관할에 놓여 있던 제주도에는 원나라에서 건너온 후손들이 본관을「대원(大元)」이라 칭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호적중초 등 각종 자료에 의하면,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차(車), 강(康), 좌(佐)씨 등이었다. 19세기까지도 이들의 일부는 ‘대원’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잇는 기초자료가 된다.
    1) 제주도에서 몽골의 잔재를 19세기 자료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제주도와 몽골의 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
    2) 제주문화에서의 몽골문화 요소 파악, 제주 문화와 몽골 문화를 비교 연구해 나갈 수 있는 역사적인 기초 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관장 오승언) - 몽골국립자연사박물관과 학술교류 양해각서가 체결(2006. 08)된 상황에서 : 제주와 몽골의 민속문화 비교 조사, 몽골의 지형 및 경관 자원 조사, 몽골의 동식물 조사 등이 추진될 수 있다.
    3) 제주와 몽골간의 교류 확대가 추진되는 현 상황 즉, 제주도의 (사)방성문화원은 2006년 9월 25일 몽골의 차가인 교육문화과학부장관과 문화교류와 사업을 위한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향후 양국간에는 몽골의 날, 제주의 날 지정 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한류의 기반 조성
    4) 몽골에서 추진하려는 몽골문화원 제주 건립을 더욱 촉진 시킬 수 있을 것이며, 몽골과의 문화교류와 국제문화관광 네트워크 확대 추진에 기여할 것이다.
    5) 제주대학교와 몽골국립대학교 학술교류협정 체결(2006. 05. 09)되어 있어서 몽골 유학생들에게 한몽문화, 제주와 몽골과의 역사문화적 교류 특강 등을 통한 몽골연구자들을 양성하는 인력양성에 활용한다.
    6) 몽골 멸망 후 사라져 버린 한 · 몽역사의 복원
    세계대제국 건설에 실패한 이후, 몽골이 멸망함으로써 한 · 몽역사는 상실되었다. 따라서 칭기스칸 후손들이 600여 년간 제주에 살아온 흔적을 마을단위에서 작성된 호적중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그들의 존재를 찾음으로써 잃어버린 한·몽 역사를 복원하는 데 기여한다.
  • 색인어
  • 탐라총관부, 대원(大元), 본관, 직역, 호적중초, 금물로리(사계리), 동성리(안성리), 덕수리, 하모슬리,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차(車), 강(康), 좌(佐), 가계도, 강순완, 강도창, 강봉주, 강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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