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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 수집 정리 1874-1919년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 수집 정리 1874-1919년 | 2007 년 | 정상수(명지대학교& #40;서울캠퍼스& #41;)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1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1년 05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1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1차 연도
    본인은 국사편찬위원화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를 모두 복사하면서 본 연구를 시작했다. 1897년까지의 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들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면서 사료 해제를 완료했고 문서 내용의 중요성과 복사 상태에 따라서 400여개의 편집대상사료를 선정했다. 선정된 편집대상사료에는 서울, 북경, 동경에 주재하고 있는 독일 외교관들이 보낸 보고서가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보고서에 첨부된 신문기사, 신문기사의 번역도 중요도에 따라서 편집대상사료에 포함시켰다. 1885년 거문도 사건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베를린 독일 외교부가 영국과 러시아 정부와 의견을 교환하는 문서들도 편집대상으로 결정했다.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에 해당하는 1897년 이전의 편집대상사료에 대한 1차 탈초는 현재 완료했다.
    (2) 2차 연도
    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들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면서 사료 해제를 완료했고 문서 내용의 중요성과 복사 상태에 따라서 900여개의 편집대상사료를 선정했다. 선정된 편집대상사료에는 서울, 베이징,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독일 외교관들이 보낸 보고서가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보고서에 첨부된 신문기사, 신문기사의 번역도 중요도에 따라서 편집대상사료에 포함시켰다.
    2차 연도 연구 초기인 2009년 2월 본인은 베를린 소재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를 3주 동안 방문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지 않은 자료들에서 복사를 주문했고 한국에서 우편으로 수신했다. 새로 수집한 Japan 20 Nr. 3는 4개의 문서철로 구성되어있으며 러일전쟁 기간 중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1910년 이후 일본 문서군(Japan 22)에 있는 한국 관련 독일 외교문서들은 주로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의 부당성에 대한 문서들이다. 그리고 서울 주재 독일 공사 잘데른의 개인인사목록인 Personalakten Salden과 청일전쟁 시기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독일과 영국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Botschafter London 등의 자료를 복사했다.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에 해당하는 편집대상사료의 1차 탈초를 완료했다. 교정, 주석, 편집은 3차 년도에 총괄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다.
    (3) 3차 연도
    3차 연도의 당초 연구계획은 베이징 주재 독일 공사와 서울 주재 독일 공관 사이에서 왕래한 문서들, 이른바 대사관 문서(이전에는 R9208이라는 명칭으로 연방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로 이관되면서 Peking II로명칭이 변경되었다)를 수집, 정리할 예정이었지만 2009년과 2010년에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를 방문서해서 2주일 이상 조사해 본 결과 1883년 한독 수교가 체결되어서 공관이 파견되기 이전의 자료를 제외하고는 한국 문서군 Korea 1 - Korea 10에 있는 자료들과 동일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비교 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34개의 문서철을 모두 복사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과 대조를 해보아야 하지만 복사에 필요한 엄청난 비용 때문에 1883년 이전 자료인 Peking II 127, 128, 153, 154, 156 등 5개의 문서철만을 복사했다. 그러나 이 5개의 문서철에 문서들은 서기들에 의해서 정서로 작성된 문서들이 아니라 당시 베이징 주재 독일 공사 브란트의 친필 초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탈초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정서로 된 외교보고서의 완성본은 독일 외교부에서 접수했고 이는 한국 문서군에 보관되어있다.

    3개년에 걸쳐서 진행된 본 연구는 자료의 선정과 탈초는 완료되었지만 교정, 주석, 편집 작업이 남아있다. 사료집 출판을 위해서는 아직 상당한 시간과 경비를 필요로 한다.

  • 영문
  • (1) The first year
    When I began this research, I copied the german diplomatic documents on Korea in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or the time being the Documents from 1874 until 1897 were grasped in a general way, and in accordance with the importance the documents, which must be edited, were chosen. It is the reports, that the german diplomats were in Seoul, Peking and Tokyo. As circumstances require the articles of newspapers were chosen. The old german letters in this documents were changed in today´s.
    (2) The second year
    In the second year of this research I copied, understood and edited the documents from 1897 until 1919 in the same way as the first year. In order to collect the Documents, which don't exist in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in the three weeks I visited the Politisches Archiv des Ausw rtiges Amt in Berlin. This Documents are the reports of the german diplomats on the korean affairs after 1910. These were kept not in article of Korea but of Japan. And the personal records on Saldern, who was the minister-resident in Seoul 1903-1905, were collected.
    (3) The third year
    In the original project I will collect and study the german diplomatic documents, which were exchanged between the german minister-resident in Seoul and the german minister in Peking. This is R9208, which was changed in the name of Peking II. I visited the Politisches Archiv des Ausw rtiges Amt, and studied these documents. But more documents is the same as in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I collected and copied only Peking II, 127, 128, 153, 154, which don't exist in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After this collection the research was worked in the same way as the first and second year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866/1874부터 1919년까지 독일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를 조사, 수집, 정리하는 연구이다. 연구 작업의 최종적인 결과는 사료집 출간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연구 성과를 학술논문으로 발표할 수 있다.
    1. 사료수집 - 1866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외교부정치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63 문서철의 한국 문서군(Korea 1 - Korea 10), 러일전쟁기 한국 상황을 보고한 3 문서철의 일본 문서군(Japan 20 Nr. 3), 일제강점기(1910-1919년) 한국 상황을 보고한 4 문서철의 일본 문서군(Japan 22), 30개 문서철의 서울주재 독일공관 문서군(Peking II, Korea)이 수집, 정리 대상이다. 일부 문서군은 복사되어서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있다.
    2. 사료해제 - 수집된 사료 전체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파악해서 중심 내용을 리스트로 작성한다. 편집할 사료 선정을 위한 예비작업이다.
    3. 편집대상사료선정 - 사료해제를 통해서 정리된 자료를 기준으로 편집할 사료를 선정한다. 6000여개의 문서들 중에서 대략 1500 여개를 선정한다. 중복을 피하고 한국 상황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서 편집대상사료를 결정한다. 그러나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문서들이 모두 복사물이기 때문에 복사상태도 고려된다.
    4. 독일어 필기체 문서의 탈초(사료해독) -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문서들은 타자기가 도입되기 이전에 작성된 문서들이 95% 이상이다. 관공서에 타자기가 도입된 시기가 1900년경이고 외교부는 군사관련 부서와 비교해서 상당히 늦게 도입되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외교문서들은 대부분이 필기체로 되어있다. 19세기 이전의 영어, 프랑스, 러시아어 필기체는 오늘날의 필기체와 거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해독이 용이하다. 그러나 독일어 필기체는 오늘날의 필기체와 매우 다르기 때문에 탈초가 매우 어렵다. 1900년 이전의 독일어 필기체를 읽을 수 있는 독일인들은 거의 드물다. 독일 대학교 인문학 전공자 대학생들 중에서도 5% 정도가 이러한 필기체 해독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독일어 필기체 해독이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고 독일사 정공자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해독할 수 있다.
    5. 편집교정 및 주석 - 탈초에서 오타가 발생한 부분들을 교정한다. 그리고 외교문서에 황제나 제국수상의 메모가 기입된 부분들은 각주로 처리한다.
    6. 사료해설 - 출간된 사료집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각 권 앞부분 70-80쪽 가량에 외교문서의 내용을 설명하는 해설을 출간한다.
    7. 목차설정과 색인 - 사료집 목차는 먼저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커다란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 한도에서 한국 상황에 따라서 주제별로 배열한다. 색인은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지명도 고려할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
    1) 한국관련 독일 외교문서 수집, 정리 - 자료 선정, 탈초가 완료되었으나 자료의 복사 상태에 따라서 일부 자료는 탈초가 불완전하다. 그래서 교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주석과 편집작업이 완료되면 사료집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2) 고종의 밀서 발견 - 중앙일보 2008년 2월 20일, 2월 23일자에 1면 톱기사로 게제되었다.
    3) 고종의 전보 - 을사늑약 체결 직전
    4) 한국독일사학회 발표 -「독일의 세계정책과 한국 1897-1906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5) 고종의 비자금 발견 - 동아일보 2008년 6월 27일자에 보도되었다.
    6) 일본의 한국 병합의 부당성에 대한 독일 정부 문서 - - 조선일보 2008년 11월 3일자에 보도되었다.
    7) 하와이 대학교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 "일본의 한국 병합(Personality and Politics in Japan's Annexation of Korea)"이라는 주제로 2009년 4월 23/24일에 걸쳐서 하와이 대학교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독일과 일본의 한국 병합(Germany and Japan's Annexation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8)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고종의 전보 - 월간중앙 2009년 8월호에 보도되었다.
    9)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보고한 서울 주재 독일공사 잘데른의 보고서 - 조선일보 2009년 8월 5일자에 보도되었다.
    10) 하인리히 왕자의 대한제국 국빈방문 - 월간중앙 2009년 10월호에 보도되었다.
    11) 빌헬름 2세가 고종에게 보낸 밀서 - 중앙일보 2009년 9월 29일자에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12) 『서양사연구』에 논문 게제 - 2010년 5월 31일 간행된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인 『서양사연구』에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과 강대국들의 대응 1895-1910년」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13) 일본에 의한 고종 납치계획 - Korea Herald 2010년 7월 12일자에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14) 중명전 ‘을사늑약’ 강제일 특별강연회에서 강연 - 2010년 11월 18일 「서양 외교관들이 관찰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이라는 제목으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발표했다.
    15) 한국독일사학회에서 발표 - 2011년 4월 2일 한국독일사학회에서 「하인리히 왕자의 한국 방문 1898/99년」을 발표했고 현재 심사를 통과해서 2011년 6월 30일 발간 예정인 한국연구재단 등재(후보)지인 『독일연구』에 게제될 예정이다.

    2. 활용방안
    1) 학문 발전에 대한 기여
    본 연구의 결과물은 대한제국 연구와 한독관계사 연구를 위한 사료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동안 자료 부족에서 기인해서 진척이 없었던 한국 근대사 연구를 활성화시켜 줄 것이다. 그 동안의 연구 작업에서 밝혀진 을사늑약과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의 부당성에 대한 자료들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한국 근대사와 대한 제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고종은 나약한 통치자가 아니었고 몰락하는 대한제국의 존립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군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 연구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근대 시기의 한국과 독일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상실을 방지하고 한독관계사 연구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이는 우호적 한독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
    20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지 100년이 되는 해를 맞이 해서 본 연구의 성과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의 부당성이 증명되었다. 을사늑약은 객관적인 측면에 본다고 하더라도 강제성이 개입되었고 주권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것을 본 연구에서 독일 측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부당성이 더욱 명확해졌다. 한국이 앞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100년전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 한 것에 대한 부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 연구는 국가정체성 확립에 기여할 것이다.
    3) 후속연구를 위한 기반 조성
    본 연구를 계기로 한국관련 외국자료들 중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에 있는 외교문서들에 대한 수집, 정리 작업이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의 수집 정리는 대학원생들을 활용함으로써 대학원 수업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 색인어
  • 사료, 탈초, 한독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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