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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상세정보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16045&local_id=10016375
19세기 진주지역 신흥계층의 다양한 존재양상 - 군역충정 과정을 중심으로 -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9세기 진주지역 신흥계층의 다양한 존재양상 - 군역충정 과정을 중심으로 - | 2007 년 | 김준형(경상국립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07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12월 01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글은 진주 이영씨 댁에 소장된 군역 및 신분 관련 여러 자료를 토대로, 19세기 전반 진주의 신흥계층이 유학을 칭하면서 군역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더 나아가 향촌사회 내에서 구래의 사족층에 대항해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해 나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1838년에도 진주에서는 군역사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해 3월경 목사의 지시에 의해 각 리에서 군역사정이 이루어지고 보고서가 만들어졌지만, 모칭자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그대로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 7월에 사정조약이 만들어지고, 이후 7, 8월에 걸쳐 각 리에서 사정작업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작성된 {대곡가좌}에서는 상당수의 모록자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후 이들의 상당 부분은 [민호유학]에 유학으로 기재되고 있다. 이들은 밀양박·경주김·전주이·달성서·파평윤·진주강·경주최씨로서, 이들중 많은 성씨는 같은 가문 내의 인물이면서도 유학으로 인정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즉 교생·원생·군관 등이 섞여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전형적인 양반사족층에 속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신흥계층으로서 교생·원생·군관 등을 거쳐 유학을 모칭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이젠 유학층으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가려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가문 내에 동시에 여러 신분·직역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곡가좌}에 모록자로 기록되자, 이에 항의하여 관아에 상서를 올리는 등 반발하였다. 이에 따라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대곡리박김양성유학별성책}과 [민호유학]이 별도로 만들어져, 이 가문 내의 일부 인물들이 유학으로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신흥계층은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를 유학으로 상승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해왔다.
    신흥계층의 인물들은 1838년 군역사정 작업이 이루어지던 시기 이전에는 구래의 사족층으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구래의 사족층이 주도하던 동약에는 신분적 차별 때문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 이들은 대곡리 리계를 별도로 조직하고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외에 대곡리의 서재 운영에서도 신흥계층은 하재원으로 기재되어 구래의 사족층과는 차별되는 대우를 받고 있었고, {사마소중수수전기}에서도 신흥계층은 배제되어 있었다.
    1838년 군역사정 작업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진주향교수리물재집수기}에서도 신흥계층은 '원유'가 아닌 '별유'로 차별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반발로 구래 사족층들이 어쩔 수 없이 그들중 일부를 원유로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별유에서 원유로 편입되는 현상은 대곡리에서도 나타난다. {유전용하병록책}에 신흥계층의 일부 성씨가 원유로 입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세 속에 일부 신흥계층의 인물은 구 사족층과 교유하며 특정 당파의 논의에도 참여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와 함께 대곡리의 신흥계층은 당당하게 유학을 칭하며 대곡리 행정을 주도해 나간다.
  • 영문
  • This paper looked over the aspect that the newly-rising classes' claimed that they belonged to the sajok(士族) and tried to evade the responsibility for the military service, and the aspect that they were moreover builduping their standing against the original sajoks in the early 19th century in Jinju community by assaying the documents about the military service and the status which were kept in Lee-yong(李永)'s house.
    In 1838, the assessment for the military service was accomplished in twice in Jinju. Many men arrogating the yuhaks appeared in the reports which were made during the work, they might not belong to the original sajoks. But many ones of them were recorded as the yuhaks in the late official documents. As some families who were recorded as the ones arrogating the yuhaks were in great reaction, some of them were recognized as the yuhaks. Thus the newly-rising classes tried to buildup their standing to the yuhaks in many directions.
    The ones who belonged to the newly-rising class were differentiated from the original sajoks in the status before the assessment for the military service. But after that time some families who belonged to the newly-rising class were gradually included into the wonyu(元儒) which meaned the original sajok. In the current of these changes the newly-rising classes in Daigokri(大谷里) claimed that they belonged to the yuhak and were leading the administration of Daigokri.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글은 진주 이영씨 댁에 소장된 군역 및 신분 관련 여러 자료를 토대로, 19세기 전반 진주의 신흥계층이 유학을 칭하면서 군역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더 나아가 향촌사회 내에서 구래의 사족층에 대항해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해 나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1838년 진주에서는 군역사정 작업이 두 차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보고서에는 상당수의 모록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형적인 양반사족층에 속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들의 상당 부분은 공문서에 유학으로 기재되고 있다. 모록자로 기록된 일부 성씨가 이에 반발하자, 이 가문 내의 일부 인물들이 유학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처럼 신흥계층은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를 유학으로 상승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해왔다.
    신흥계층의 인물들은 1838년 군역사정 작업이 이루어지던 시기 이전에는 신분적으로 구래의 사족층으로부터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신흥계층의 일부 성씨가 점차 구래의 사족층을 의미하는 원유로 편입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추세 속에서 대곡리의 신흥계층은 당당하게 유학을 칭하며 대곡리 행정을 주도해 나간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필자는 경남 서부지역의 문헌조사 과정에서 발견한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李永씨댁의 방대한 자료중 군역충정 과정에서 신흥계층의 대응양상을 소상하게 보여줄 수 있는 문헌들, 즉 里(面) 전체의, 또는 마을별 家座成冊이나 軍役관련 성책들과 또 이와 관련된 낱장의 문서들, 그리고 '洞案謄書', '司馬所重修收錢記', '里案', '破齋完文' 등 군역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지만, 신흥계층의 촌락 내에서의 입지를 밝혀줄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당시 신흥계층의 상황을 분석하였다. 이외에 진주 華陽精舍에서 발견된 '晉州鄕校修理物財集收記'도 이미 학계에서 이용되어 왔던 서울대 규장각의 '진주향교수리물재집수기', '儒錢用下幷錄冊'과 함께 보조적 자료로 이용하였다.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19세기 전반 진주의 신흥계층이 유학을 칭하면서 군역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더 나아가 향촌사회 내에서 구래의 사족층에 대항해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해 나가는 모습을 밝혀 보았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한 논문에 담을 수 없었다. 따라서 신흥계층중 여러 종류의 '군관'을 칭하는 자들의 모습은 다음 논문으로 미루고자 한다.
    어쨌든 이 글은 그동안 '신흥계층 유학'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것이어서 아마 또다른 논쟁의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에서 이용한 자료도 널리 공개되어 다른 연구자들의 좀더 다각적인 이용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 색인어
  • 신흥계층, 신분상승, 幼學, 軍役査正, 冒錄者, 舊來 士族, 元儒, 別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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