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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로마 유적지 발굴 보존과 역사교육의 활용 사례에 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영국의 로마 유적지 발굴 보존과 역사교육의 활용 사례에 대한 연구 | 2008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차영길(경상국립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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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1
선정년도 2008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2월 2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역사 유물을 어떻게 역사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 보고하는 것으로 그 대상은 영국의 로마 유물, 유적들이며, 특히 바스의 온천장 유적과 빈돌란다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집중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표본 조사의 학술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80년대 이래로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개별 단위의 문화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모델에서 유동성과 상호연계성을 강조하는 모델로 이행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세계화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고대사 학계에서 거론되지 않던 패러다임이 이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이른바 지중해를 중심으로 고대 세계를 이해하자는 접근방법이다. 그것을 "고대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했다"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이상과 같은 최근의 연구동향에 주목하면서 본 연구에서는 연구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접근하고자 한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의 '세계제국'의 하나이며, 또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정치조직체 중의 하나였다. 로마 제국이 점령하였던 영토는 지금 20 개 이상의 민족국가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인구는 대략 5-6천만 명으로 당시 세계인구의 1/5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국의 거대한 크기는 로마가 전쟁과 정복에 얼마나 헌신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아울러 제국이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은, 비록 피정복민의 기층문화가 수세기 동안 살아남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전의 정치조직체를 파괴하고, 그들이 정복한 왕국이나 부족들의 문화적 동질감을 파괴하거나 심지어 말살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제국의 영토와 크기는 로마인들이 통제하고 있는 자원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다. 로마인들은 더 많은 토지를 정복함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들이 징수할 수 있는 세금과 지대도 더욱 증대되었다. 또 그들이 관리하는 부가 점점 더 많아짐에 따라 축적하고 방어해야 하는 영토도 더욱 확대되었다. 제국의 통치하에서 평화란 로마화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따라서 정치적 지배, 교통, 통합의 문제들은 산업화 이전의 제국에서 보다 로마제국에서 더욱 심각하였다. 정치적으로 로마는 안정된 군주국이었던 반면에, 귀족들은 정치적으로 허약하게 분해되었으며, 인민들은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결국 로마의 중앙은 허약하였던 것이다. 제국의 엘리트와 하위 엘리트들도 보통의 문자문화권에 의해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었다. 쓰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문화적 통합은 결국 보편 종교인 기독교의 상징적 깃발 아래에서야 통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로마제국의 '세계화'의 과정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상호 적응과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스의 로마 온천장과 빈돌란다의 로마 군 요새가 증언하고 있다.
    한편 역사의 발굴과 보존 및 교육은 진실의 발견과 전달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전문가 영역의 문헌 자료를 통한 역사 이해 못지않게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 할 수 있는 유적지의 발굴과 보전 및 대중교육에의 활용은 연구기반의 확대에도 기여한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 상황 속에서 역사의 진실에 대한 상반된 대중의 갈망을 순기능적으로 소화하여 낼 수 있는 적절한 계기를 제공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간 역사 연구 측면에 비해 연구성과의 대중 교육으로의 전환이 그 과정이나 전달수단의 정비란 측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특히 유적의 발굴과 보전 및 전시의 경우에는 연구와 교육 및 대학과 사회의 역할분담 및 상호협조가 충분하지 못한 것 역시 현실이었다. 그래서 본 연구의 목표는 역사 연구와 대중 교육이 상호 상승효과를 내고 있는 외국의 사례에 주목하여 그것의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 비교하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을 찾아보려는 것이며, 그 대상으로 영국에서의 로마 유적 발굴과 보전 및 전시를 연구과제로 설정하였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영국 남부의 바스(Bath)의 로마 시대 온천장 유적과 영국 중부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성벽 중의 빈돌란다 요새 두 곳을 대상으로 어떻게 영국인들은 그곳을 발국하고, 보존하고 있으며 또 대중 역사교육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 헐리우드의 영화스타들도 바스에 휴양 별장을 하나 가지고 있고 싶어 하듯이, 현재 불과 인구 8만 밖에 안되는 그 작은 도시에 그렇게 대규모의 상가 거리와 명품 ?事? 번성할 수 있는지, 즉 어떻게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그렇게 극대화 시킬수 있었는지도 살펴보고 조사하려 하였다.
  • 영문
  • The aim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visible remains of a typically Roman institution in the most northerly province of the Roman Empire. At the same time, however, it sets out to survey why and how the Roman remains in Britain became and become a rewarding one. My first study was Bath(AQUAE SULIS). Unlike all other Romano-British towns, Bath existed solely as a spa and, except for London, was the most cosmopolitan town in the country. From the thermal spring flowed the sacred water of the Celtic spirit Sulis, whom the Romans identified with Minerva, the goddess of healing. They built a temple to Sulis-Minerva and channelled the spring water into a huge lead-lined bath. Round this they built a full-scale bath complex and exercise hall. The temple, unlike other Celtic-Romano ones, was a full-scale classical building with a magnificent head of Medusa sculpted in the likeness of a barbarian Celt. The temple became the centre of a cult to Minerva with its own priest, the only such one in Britain, who interpreted omens and prepared sacrificial victims. Both the temple and the baths were visited by people from all over Europe, particularly those seeking cures. Not only were baths a focus of social, cultural, aesthetic and physical life in the Roman Empire; in constructing and operating them the Romans made use of almost every technology available at the time. To investigate baths in detail is to look at the manufacture, transport and use of a wide range of building materials from natural stones to concrete and glass, from lead pipes to bronze faucets, from painted plaster to splendid mosaics. It is to look at materials used in construction, at the provision of fuel for a sophisticated system of heating, and at the supply of water by hydraulic engineering which can be highly ingenious. Roman baths evolved rapidly, particularly during the early principate, and evidence of many of the changes and experiments can be seen in the remains preserved on sites and in museums in Britain. This study hopes to give a coherent and plausible history of the evolution, which is both consistent and convincing, not to say the present situation of excavation and preservation of bath relics.
    Another experiment is Hadrian's Wall, especially Vindolland forts. Why the Romans bulit the Wall Standing on a high point of Hadrian's Wall, buffeted by a keen Northumbrian wind and looking out over the wide-open, sparsely inhabited landscape to an horizon cloaked in mist, the Roman soldier from a far-off corner of the empire must have thought that there to the north were not only barbarians but, surely, the ends of the earth. Following the Claudian invasion of 43AD, it took another 60 years before the country was pacified as far north as a chain of forts along the Stanegate, a military road running east-west across the Tyne-Solway isthmus to form a border that remained disputed, undefined and under almost continual attack until Emperor Hadrian visited Britain in 122AD. He decided on a policy of damage limitation and ordered a wall to be built across England from the Tyne estuary to the Solway Firth, a distance of 73 miles(117km) or 79 Roman miles. Hadrian's Wall was built not by slave labour but by legionaries, the elite troops of the Roman army who were as skilled in civil engineering as they were in fighting. It was a massive engineering feat requiring immense manpower, finance and logistic support. A force of between 11,000 and 12,000 men was needed to build its 156 turrets, 79 mile castles and 16 forts. The garrisons were auxiliaries, not legionaries, who acted as frontier police collecting tolls from the customs posts at the mile castles, as well as front-line troops taking the brunt of tribal attacks. The legions remained in their permanent forts and were used only in major campaigns, for heavy punitive expeditions or to repel invaders. What remains is an impressive monument to the greatest civil engineering project undertaken in pre-modern Britai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역사 유물을 어떻게 역사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 보고하는 것으로 그 대상은 영국의 로마 유물, 유적들이며, 특히 바스의 온천장 유적과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빈돌란다 요새를 집중 조사 대상으로 하였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의 '세계제국'의 하나이며, 또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정치조직체 중의 하나였다. 로마 제국이 점령하였던 영토는 지금 20 개 이상의 민족국가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인구는 대략 5-6천만 명으로 당시 세계인구의 1/5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국의 거대한 크기는 로마가 전쟁과 정복에 얼마나 헌신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아울러 제국이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은, 비록 피정복민의 기층문화가 수세기 동안 살아남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전의 정치조직체를 파괴하고, 그들이 정복한 왕국이나 부족들의 문화적 동질감을 파괴하거나 심지어 말살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또다른 한편으로 로마제국에 의한 '세계화'의 과정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상호 적응과정을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스의 로마 온천장과 빈돌란다의 로마 군 요새의 할수적 의미는 이 점을 증언하는 것이다.
    한편 역사의 발굴과 보존 및 교육은 진실의 발견과 전달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전문가 영역의 문헌 자료를 통한 역사 이해 못지않게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 할 수 있는 유적지의 발굴과 보전 및 대중교육에의 활용은 연구기반의 확대에도 기여한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 상황 속에서 역사의 진실에 대한 상반된 대중의 갈망을 순기능적으로 소화하여 낼 수 있는 적절한 계기를 제공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간 역사 연구 측면에 비해 연구성과의 대중 교육으로의 전환이 그 과정이나 전달수단의 정비란 측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특히 유적의 발굴과 보전 및 전시의 경우에는 연구와 교육 및 대학과 사회의 역할분담 및 상호협조가 충분하지 못한 것 역시 현실이었다. 그래서 본 연구의 목표는 역사 연구와 대중 교육이 상호 상승효과를 내고 있는 외국의 사례에 주목하여 그것의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 비교하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을 찾아보려는 것이며, 그 대상으로 영국에서의 로마 유적 발굴과 보전 및 전시를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그 표본으로 영국 남부의 바스(Bath)의 로마 시대 온천장 유적과 영국 중부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성벽 중의 빈돌란다 요새 두 곳을 집중 조사하였다.
    바스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온천의 모습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실제하는 것이란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하나 본 연구자가 이 유적에 주목고 조사하려 한 것은 그것의 고대적 모습의 복원의 역사성이 높아서 라기 보다 오늘날 우리가 아테네나 카이로에서 보게 되듯이, 방대하고도 엄청난 양의 유물과 유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부분을 거의 사장시키다 시피 하는 지역과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규모와 양이면서도 그것의 역사교육의 소재로서 및 관광자원으로서의 기능을 극대화 한 사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밝혀보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바스와 빈돌란다의 표본 조사 대상으로서의 선택은 긍적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를 통해 몇가지 학술적 및 사회적 효과가 기대된다. 우선 학술적 효과로는 역사에 대한 진실의 파악과 역사지식의 습득이다. 처칠이 영국의 문명화의 과정은 로마 지배하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듯이, 로만 브리튼의 유적에 대한 이해는 곧 영국 고대사와 서유럽 고대사 및 로마 제국에 대한 이해로 직결된다. 이것은 제국과 속주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학계의 활발한 관심에도 기여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가 모든 학문에서 중요한 분석 틀이자 담론의 대상이듯이, 로마 제국의 연구에서도 그분석 대상의 틀이 보다 광역화되는 추세가 나타나며, 이와 더불어 하부단위 간의 상호관계의 문제도 보다 활발하게 다루어진다. 이런 관심에서 보면, 바스와 빈돌란다의 유적지는 변방 속주의 삶의 특징과 제국의 중심과 변방 속주 사이의 상호 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세번째로는 본 연구의 경우, 연구대상인 유적지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연구와 교육이 상호 상승작용을 할 수 있는 사례가 지닌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영국의 경우, 유물의 발굴과 보존 및 전시로 이어지는 실제 활용이 매우 뛰어난 지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유적지 활용방식의 장단점에 대한 분석 또한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유익한 소재를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색인어
  • 세계화, 로만 브리튼, 바스, 온천장, 하드리아누스 성벽, 빈돌란다 요새, 지중해 제국, 페르낭 브로델, 루시앙 페브르, 지중해, 아날 지, 고대사, 패러다임, 작은 단위의 자급자족, 새로운 정통론, 지중해화 하기, 모지스 핀리, 키스 홉킨스, 막스 베버, 이안 모리스, 고정된 세포형 모델, 상호교류 모델, 토마스 쿤, 마틴 버날, 사라 모리스, 페레그린 호던, 니콜라스 푸셀, 브렌트 쇼우, 이중성, 로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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