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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한국 신파연극계의 위기의식과 연쇄극의 등장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910년대 한국 신파연극계의 위기의식과 연쇄극의 등장 | 2007 년 | 김재석(경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G00060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1월 2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한국 신파극은 1910년대에 가장 활발했다. 1920년을 넘어서면서 신파극은 예전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도생에 급급하게 된다. 신연극으로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신파극이 한국 연극사에 별다른 의미를 남기지 못하고 퇴장한 이유를 1910년대 신파극계의 위기의식을 통해 살펴보았다.
    1910년대 한국 신파극은 일제의 검열과 󰡔매일신보󰡕를 통한 훈육에 의해 조정되었다. ‘풍속괴란과 안녕질서 유지’ 차원에서 연극 검열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뜻을 거스르는 연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매일신보󰡕는 연극개량론을 통해 한국의 고전극이 상풍패속의 극임을 널리 전파하고, 새로운 연극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혁신단」의 등장은 󰡔매일신보󰡕의 훈육에 대한 식민지 조선 연극인의 응답이었다. 󰡔매일신보󰡕는 「혁신단」의 연극을 신연극이라 불렀지만, ‘신’에 대한 연극적 합의는 없는 상태였다. 1910년대 초기 신파 연극인들은 일본 신파극을 모범으로 삼아 신연극의 구체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일본 신파극이 곧 신연극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한국 신파극계는 일본 신파극 작품을 복사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으며, 일본 신파극을 번안한 작품이 한국 신파극의 표준이 되었다.
    한국 신파극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신파극=신연극의 구도에 안주하고 있던 1910년대 한국 신파 연극인들은 1915년을 지나면서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 까닭은 시마무라 호게츠의 서울 공연과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를 통해 신파극이 곧 신연극이라는 구도가 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신연극의 자리는 신극이 차지하고 있으며, 신파극은 고전극과 함께 과거의 연극으로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한 위기의식을 벗어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시도가 있었다. 윤백남과 이기세는 「예성좌」를 조직하여 <코-시카의 형뎨>, <카츄샤>를 공연하였으나 곧바로 신파극단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임성구는 <정부원> 공연에서처럼 무대를 서양풍으로 꾸며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보려 했으나 오래 가지를 못하였다. 이들은 시마무라 호게츠의 신극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지향점을 공부하지 않고, 서양 번역극 공연이라는 외양에만 초점을 맞춘 까닭에 신극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신파극의 몰락에 대한 위기감은 신파 연극인들이 자기 파괴적인 방법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도록 하였다. 1910년대 자생적 신파 연극인을 대표하는 임성구는 은퇴를 선언하였고, 김도산은 연쇄극에 뛰어들었다. 연쇄극은 관객 동원에서는 성공하였으나 신파극의 종말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연극공연이 아니라 영화 상영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연쇄극은 연극을 축소하고 영화 상영 분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연극이 영화에 의해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일본 신파극을 전범으로 삼은 식민지 조선의 신파극계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질 즈음에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근대사회의 연극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늦었던 것이다. 신파극을 근대사회에 적합한 연극으로 발전시킬 동력을 발견해내지 못한 것이 1910년대 한국 신파 연극인들의 비극이었다.
  • 영문

  • In 1910s the Korean Shinpa drama was arranged by Japanese censorship and the discipline through the Maeilsinbo Newspaper. At that time it was basically impossible to perform the dramas which were against Japanese because of censorship. Maeilsinbo informed widely that Korean Old dramas are poor plays and suggested that the new dramas be needed. The appearance of the group of Hyuksindan was the Korean theatrical people's answer to the discipline of Maeilsinbo. It called the Hyuksindan's drama as New drama but the consent on "New" was not done in the theatrical field. In the early 1910s, the Korean people of Shinpa drama tried to make a model of the Japanese Shinpa one and achieve the concreteness of New drama. Then the equality that the Japanese Shinpa drama is the New drama was formed, the field of Korean Shinpa drama remained copying the Japanese ones and the works adapted the Japanese ones became the standard of Korean Shinpa drama.
    The Korean Shinpa theatrical people of those days who stayed in this structure without any agony felt immense crisis after 1915, because they realized, the structure that Shinpa drama is the New drama began to break through Simamur Hogetsu's performance in Seoul and the Lee Kwangsoo's What is Literature They were greatly shocked at the fact that in Japanese Sin drama(New-drama) was regarded as the new drama and Shinpa drama was considered as the old drama together with the classical dramas. They made various trials to escape this crisis : Yoon Baeknam and Lee Kise formed the theatrical group of Yesungza and performed the Brothers in Kosica and Katusa but soon they returned to the Shinpa drama. Im Sunggu tried to catch the audience's curiosity by making Western style stage in the performances like Jungbooweoun but it didn't keep long. They couldn't proceed to the New-drama because they didn't study the theatrical target which Simamur Hogetsu's dramas have and focused on the performance of the works which they adapted Western plays.
    Because of this crisis on the Shinpa drama's fall, they committed the foolish things which destroyed themselves. Yim Sunggu, the representative man of the autogenous Shinpa drama in 1910s declared retirement and Kim Dosan, the another representative man fell into the kino-drama. It succeeded in drawing the audience but urged the Shinpa drama to come to a close. Because the audience preferred the movie to Shinpa drama, kino-drama was compelled to curtail the drama and lengthen the time of movie. In the end the drama was destroyed by the movie. When the people of Shinpa drama in colonized Korea who had made a model of Japanese one took a serious interest in their identity, it was already late, that is to say, it was late for them to reflect on what the drama should be in the modern society. So it was tragic that the Korean people of Shinpa drama in 1910s couldn't find the motive power which could make Shinpa drama the form fitted for the modern socie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 신파극은 1910년대에 가장 활발했다. 1920년을 넘어서면서 신파극은 예전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도생에 급급하게 된다. 신연극으로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신파극이 한국 연극사에 별다른 의미를 남기지 못하고 퇴장한 이유를 1910년대 신파극계의 위기의식을 통해 살펴보았다.
    1910년대 한국 신파극은 일제의 검열과 󰡔매일신보󰡕를 통한 훈육에 의해 조정되었다. ‘풍속괴란과 안녕질서 유지’ 차원에서 연극 검열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뜻을 거스르는 연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매일신보󰡕는 연극개량론을 통해 한국의 고전극이 상풍패속의 극임을 널리 전파하고, 새로운 연극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혁신단」의 등장은 󰡔매일신보󰡕의 훈육에 대한 식민지 조선 연극인의 응답이었다. 󰡔매일신보󰡕는 「혁신단」의 연극을 신연극이라 불렀지만, ‘신’에 대한 연극적 합의는 없는 상태였다. 1910년대 초기 신파 연극인들은 일본 신파극을 모범으로 삼아 신연극의 구체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일본 신파극이 곧 신연극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한국 신파극계는 일본 신파극 작품을 복사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으며, 일본 신파극을 번안한 작품이 한국 신파극의 표준이 되었다.
    한국 신파극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신파극=신연극의 구도에 안주하고 있던 1910년대 한국 신파 연극인들은 1915년을 지나면서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 까닭은 시마무라 호게츠의 서울 공연과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를 통해 신파극이 곧 신연극이라는 구도가 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신연극의 자리는 신극이 차지하고 있으며, 신파극은 고전극과 함께 과거의 연극으로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한 위기의식을 벗어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시도가 있었다. 윤백남과 이기세는 「예성좌」를 조직하여 <코-시카의 형뎨>, <카츄샤>를 공연하였으나 곧바로 신파극단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임성구는 <정부원> 공연에서처럼 무대를 서양풍으로 꾸며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보려 했으나 오래 가지를 못하였다. 이들은 시마무라 호게츠의 신극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지향점을 공부하지 않고, 서양 번역극 공연이라는 외양에만 초점을 맞춘 까닭에 신극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신파극의 몰락에 대한 위기감은 신파 연극인들이 자기 파괴적인 방법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도록 하였다. 1910년대 자생적 신파 연극인을 대표하는 임성구는 은퇴를 선언하였고, 김도산은 연쇄극에 뛰어들었다. 연쇄극은 관객 동원에서는 성공하였으나 신파극의 종말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연극공연이 아니라 영화 상영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연쇄극은 연극을 축소하고 영화 상영 분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연극이 영화에 의해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일본 신파극을 전범으로 삼은 식민지 조선의 신파극계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질 즈음에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근대사회의 연극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늦었던 것이다. 신파극을 근대사회에 적합한 연극으로 발전시킬 동력을 발견해내지 못한 것이 1910년대 한국 신파 연극인들의 비극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1910년대 한국 신파극 연구 활성화의 계기로 활용

    그 동안의 연구 상황을 고려할 때, 미발굴 대본의 발견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1910년대 한국 신파극에 대한 연구는 답보 상태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신파극 공연의 구체적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는 결국 주변적인 부분에 매어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 상황에서 한일 신파극의 비교연극학적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의 신파극이 일본 신파극의 영향 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일본 신파극의 자료들을 잘 활용한다면 한국 신파극 연구의 최대 고민, 즉 자료 부족에서 오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번 연구도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1910년대 한국신파극에 대한 연구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하여, 고전극(전통극)에서 근대극으로 전환되는 시기 한국 연극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함으로써 한국 연극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었다고 본다.

    2) 한국 연극사 서술에 활용

    1910년대 한국 신파연극계의 위기의식을 조망한 이번 연구는 올바른 한국연극사 서술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1910년대 한국 신파극의 전개 과정을 제대로 밝혀내지 않고서는 한국연극사의 서술이 무척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통극과 근대극의 관계, 일본연극과 한국연극의 관계, 전통연극의 배우들과 신극 배우들의 성향 등등의 산적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1910년대 연극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의 결과는 신파극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 외에도, 영화의 활성화를 맞이한 1910년대 한국 신파 연극계의 위기감과 대처 방안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 얻어진 성과는 한국 연극사 서술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는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색인어
  • 1910년대, 한국 신파극, 일본 신파극, 신연극, 신극, 연쇄극, 임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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