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회고의 양상과 논리를 파악하고, 그 근간에 위치한 권력 의지를 구명하고자 했다. 일정한 의도에 따른 기억과 망각의 교차, 이것이 회고의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회고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었다. 하나는 자신의 활동이나 주장을 문학 장의 중심 ...
이 연구는 회고의 양상과 논리를 파악하고, 그 근간에 위치한 권력 의지를 구명하고자 했다. 일정한 의도에 따른 기억과 망각의 교차, 이것이 회고의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회고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었다. 하나는 자신의 활동이나 주장을 문학 장의 중심에 놓으려는 의도이다. 다른 하나는 앞선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문학 활동을 사적 흐름으로 체계화하려는 것이다. 회고는 직접적인 체험이라는 데서 사실성을 보증 받아 문학사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하고, 그 논리 역시 문학사의 체계나 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문학(문화) 제도에 초점을 맞춘 논의는 근래 (탈)근대성 담론에 기반한 문학 연구의 주된 경향을 이루고 있다. 제도에 관한 고찰은 그것이 텍스트 내부의 자질들을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해명할 수 있을 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회고는 문학사의 질서를 이루는 원리이자, 사회적· 역사적 관계를 통해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회고에 대한 논구는 그것의 물적 토대이자 존립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문화) 제도가 어떻게 문학사의 질서로 체계화되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또 그것은 문학(문화) 제도의 근간에 자리잡은 사회적·역사적 관계, 곧 식민체제의 논리에 대한 검토이기도 했다. 이 연구가 근대 문학(문화) 제도의 문학적 내화이자 식민체제의 투영으로서 회고에 주목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연구 결과를 「박영희의 초기 행적과 문학 활동」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박영희의 회고를 통해 실증적 사실을 재구하고 문학사적 서술과의 간극을 검토한 글이다. 논문은 박영희가 문학에 뜻을 두게 되는 때로부터 <카프>에서 활동하기까지의 행적과 문학 활동을 재구하고자 했다. 이는 <신청년>, <장미촌>, <백조>, <개벽> 등으로 이어지는 매체에서의 활동과 부르주아적 예술지상주의로부터 신경향파 문학으로 이어지는 문학적 변모에 대한 실증적인 검토와 맞물리는 작업이었다. 1921년 박영희는 나도향, 최승일 등과 <경성청년구락부>에서 활동하면서, 그 기관지인 <신청년> 4, 5, 6호에 글을 실었다. 1922년 1월 <백조> 1호가 발행되는데, 박영희는 박종화, 홍사용, 나도향, 현진건, 이상화, 노자영, 이광수, 원우전, 안석주, 오천원 등과 함께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한다. 1922년 말에 이르러 박영희는 <백조>의 동인 관계에 대해 숙고하는데, 이는 새로운 경향의 문학에 대해 소개하고 설득했던 김기진의 영향 때문이었다. 박영희가 <개벽 편집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7월부터였다. 이듬해 문예부 주임이 된 박영희는 눈에 띄는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박영희는 <개벽> 문예부 주임이 된 직후 <파스큐라>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한다. 이 글은 <파스큐라>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김석송, 이익상 등이 결성을 주도했고, 결성 시기는 1925년 1월이고 <파스큐라>라는 이름은 1925년 2월 <문예강연급시각본낭독회> 당시 붙여졌음을 밝혔다. 1925년 8월 23일 <카프>가 결성되고 박영희는 그 동맹원이 된다. <카프>의 결성에 대해서 역시 보다 엄밀한 접근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