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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록] 시비의 사상적 기반에 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사변록] 시비의 사상적 기반에 대한 연구 | 2007 년 | 김태년(인하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187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5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斯文亂賊’ 시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朴世堂(西溪, 1629-1703)은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관료로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는 한 계기를 제공하면서 상대방인 노론측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52-65세 14년에 걸쳐 <<四書>>와 <<尙書>>·<<詩經>>에 대해 주석을 붙인 <<思辨錄>>의 저술 때문이었다.
    <<사변록>>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시비는 환국을 통한 당파간의 부침이 심했던 숙종대 대표적인 학술논전이자 사문난적 논란이었다. 그리고 金昌協(農巖, 1651-1708)은 노론의 입장에서 <論思辨錄辨>을 저술함으로써 그 논란의 한 가운데 서게 된 인물이다. 洪啓迪 등의 상소에 의해 박세당의 <<사변록>>이 문제가 되자 숙종은 이를 변파하라는 명을 내렸고, 李觀命과 함께 숙종의 명을 받은 權尙游는 <思辨錄辨>을 작성하여 <<사변록>>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한편, 그 내용을 김창협에게 보내 질정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김창협은 이에 대해 장문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사변록>> 논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권상유에게 보낸 김창협의 견해는 노론측의 본격적인 학술적 비판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박세당의 󰡔사변록󰡕과 김창협의 비판, 그리고 논점에 대한 朱熹의 견해를 대조하면 노론측이 제기한 "성인을 모독하고 경전을 훼손했다"는 의혹, 구체적으로는 주희의 해석을 부정하여 ‘사문’의 종지를 무너뜨렸다는 문제 제기가 정당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변록>>에 드러난 박세당의 주석을 분석해보면 그는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주희의 주석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그가 주자학, 혹은 폭을 더 넓혀서 성리학의 틀을 벗어난 어떤 새로운 사상 체계를 제시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주희의 해석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한 그의 논의를 보더라도 그의 주 관심은 여전히 도의(理)의 실현에 있었고 인식틀 또한 전통적인 성리학의 자장 안에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론 측의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은 분명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게다가 주희 이후 중국의 주자학자들은 물론 노론계 학자들 내부에서도 주희의 주석이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박세당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적 공세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주희의 학설에 대한 비판의 ‘태도’가 문제였다면 몰라도 ‘내용’만 가지고는 ‘斯文’을 배신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 김창협은 주로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구사하는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가 주희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물론 자신이 이해한 주희의 견해에 기반을 둔 것으로, 그 이면에는 李珥에서 宋時烈로 이어지는 노론계의 방대한 주자학 연구와 理氣論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창협은 그저 박세당이 ‘朱子’와 다른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만 비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자기가 볼 때 박세당의 학설이 ‘正學’의 틀을 벗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비판했던 것이다.
    박세당과 김창협은 모두 성인의 무오류성을 전제하고 성인의 본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태도, 현실적으로는 성인의 ‘말씀(經)’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자신의 생각과 일치시키려는 경학적 태도를 견지했다. 다만 김창협은 이러한 태도를 주희의 ‘말씀’에도 적용했고, 따라서 주희의 경전 해석이 만약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함으로써 자기 견해와 일치시켜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려 한 반면, 박세당은 주희가 성인의 뜻을 가장 잘 드러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자기 견해와 다른 주희의 해석은 부정했던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김창협과 박세당의 대립을 탈성리학 대 성리학의 구도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성리학계 내부의 노선 다툼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 영문
  • This study aims at clarifying philosophical context of samun ranjeok(斯文亂賊) debate which was caused by Sabyeonrok(思辨錄) written by Park Sedang(朴世堂, 1629-1703), a scholar and civil official.
    Park was main focus and motive of Noron's crticism in the debate against Soron. What made him a man of the debate was the publication of Sabyeonrok which was a result of his own critical reading of Confucian classics such as The Four Chinese Classics, The Book of Odes, and Book of History.
    On its publication, the debate between Noron and Soron became fiery and settled itself as major academic debate concerning Confucian orthodoxy in the history of Chosun. In the process of the debate, Kim Changhyeop (金昌協, 1651-1708) distinguished himself by writing Ronsabyeonrokbyeon(論思辨錄辨) - Before that, repeating appeals by scholars like Hong Gyechok(洪啓迪) made Sukjong summon to refute Sabyeonrok, and by the king's designation Yi Gwanmyeong(李觀命) and Kwon Sangyu(權尙游) wrote Sabyeonrokbyeon(思辨錄辨) to criticize Sabyeonrok in detail. Kim Changhyeop's writing was an answer to the Kwon Sangyu's request for supplementing their work and it drew him into main stage of the debate.
    Ronsabyeonrokbyeon remains as single only document to grasp genuinely academic context of the debate from Noron side. Thus, by comparing Park's Sabyeonrokbyeon, Kim's criticism, and original viewpoint of Zhuxi, we can evaluate the legitimacy of Noron side's criticism of Park's stance, which was blamed as "to profane the saints and defame the classics", and as to deny Zhuxi's viewpoint thus to destroy the orthodoxy.
    Analysis of Sabyeonrok does not provide any evidence of Park's developing new realm of thought different from Zhuxi's Neo Confucianism, notwithstanding his interpretation of the classics are different from Zhuxi's. Even in his direct criticism of Zhuxi's interpretation, his main interest is laid in realizing Ri(理) and his epistemology remains in traditional Neo Confucian framework.
    The above analysis leads us to the conclusion that the Noron's criticism against Park was overrated; Noron scholars as well as Chinese scholars after Zhuxi also presented their own interpretation different from Zhuxi's commentaries and arguments. Criticism against Park can be seen as a political attack rather than an academic refutation, because the contents of his work did not betray orthodox Neo Confucianism, even if his attitude was problematic.
    Meanwhile, Kim's criticism against Park was focused at the latter's logical inconsistency or misreading of Zhuxi's works, basing his standpoint on his own interpretation of Zhuxi's works while being influenced by Noron scholars's studies of Neo Confucianism and theories of Ri and Ki(理氣論) since Yi Yi(李珥) down to Song Siyeol(宋時烈). He did not criticize Park for being different from Zhuxi, but for Sabyeonrok's strong possibility of derailing from the orthodoxy.
    Both Park and Kim presupposed the infallibility of saints and tried to grasp the real intent of them. Their effort was centered upon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classics, i.e. the words of saints, and realization of them in the world. Difference between the two laid in the fact that Kim supposed Zhuxi as one of the saints, refraining from denying Zhuxi's words and just trying to reinterpret the words when his own viewpoint was different from Zhuxi's, but Park denied Zhuxi's viewpoint when inconsistencies occurred while admitting Zhuxi's significance of genuine heir of the Confucian saints.
    Conclusion of the above analysis suggests that we are urged to interpret the samun ranjeok debate in the light of inner debate within Neo Confucianists in Chosun Dynasty, rather than in the light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Neo Confucianism versus a new kind of Confucianis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斯文亂賊’ 시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朴世堂(西溪, 1629-1703)은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관료로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는 한 계기를 제공하면서 상대방인 노론측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52-65세 14년에 걸쳐 <<四書>>와 <<尙書>>·<<詩經>>에 대해 주석을 붙인 <<思辨錄>>의 저술 때문이었다.
    <<사변록>>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시비는 환국을 통한 당파간의 부침이 심했던 숙종대 대표적인 학술논전이자 사문난적 논란이었다. 그리고 金昌協(農巖, 1651-1708)은 노론의 입장에서 <論思辨錄辨>을 저술함으로써 그 논란의 한 가운데 서게 된 인물이다. 洪啓迪 등의 상소에 의해 박세당의 <<사변록>>이 문제가 되자 숙종은 이를 변파하라는 명을 내렸고, 李觀命과 함께 숙종의 명을 받은 權尙游는 <思辨錄辨>을 작성하여 <<사변록>>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한편, 그 내용을 김창협에게 보내 질정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김창협은 이에 대해 장문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사변록>> 논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권상유에게 보낸 김창협의 견해는 노론측의 본격적인 학술적 비판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박세당의 󰡔사변록󰡕과 김창협의 비판, 그리고 논점에 대한 朱熹의 견해를 대조하면 노론측이 제기한 “성인을 모독하고 경전을 훼손했다”는 의혹, 구체적으로는 주희의 해석을 부정하여 ‘사문’의 종지를 무너뜨렸다는 문제 제기가 정당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변록>>에 드러난 박세당의 주석을 분석해보면 그는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주희의 주석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그가 주자학, 혹은 폭을 더 넓혀서 성리학의 틀을 벗어난 어떤 새로운 사상 체계를 제시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주희의 해석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한 그의 논의를 보더라도 그의 주 관심은 여전히 도의(理)의 실현에 있었고 인식틀 또한 전통적인 성리학의 자장 안에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론 측의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은 분명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게다가 주희 이후 중국의 주자학자들은 물론 노론계 학자들 내부에서도 주희의 주석이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박세당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적 공세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주희의 학설에 대한 비판의 ‘태도’가 문제였다면 몰라도 ‘내용’만 가지고는 ‘斯文’을 배신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 김창협은 주로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구사하는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가 주희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물론 자신이 이해한 주희의 견해에 기반을 둔 것으로, 그 이면에는 李珥에서 宋時烈로 이어지는 노론계의 방대한 주자학 연구와 理氣論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창협은 그저 박세당이 ‘朱子’와 다른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만 비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자기가 볼 때 박세당의 학설이 ‘正學’의 틀을 벗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비판했던 것이다.
    박세당과 김창협은 모두 성인의 무오류성을 전제하고 성인의 본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태도, 현실적으로는 성인의 ‘말씀(經)’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자신의 생각과 일치시키려는 경학적 태도를 견지했다. 다만 김창협은 이러한 태도를 주희의 ‘말씀’에도 적용했고, 따라서 주희의 경전 해석이 만약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함으로써 자기 견해와 일치시켜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려 한 반면, 박세당은 주희가 성인의 뜻을 가장 잘 드러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자기 견해와 다른 주희의 해석은 부정했던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김창협과 박세당의 대립을 탈성리학 대 성리학의 구도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성리학계 내부의 노선 다툼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당초 연구계획에서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들을 제시한 바 있다. 1) 박세당의 경전 해석이 경학사상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고, 박세당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학문적으로 정당한지 아니면 단지 정치적 마타도어에 불과한지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정치적 권력투쟁(당쟁)과 학문적 사상투쟁(이단시비)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확보하는 한편, 철학과 역사를 사상사 속에서 만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3) 또한 본 연구를 통해 경학을 철학사상사의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법론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박세당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반대당의 비판에 깔린 사상적 기반을 살펴봄으로써 흔히 권력투쟁의 전형으로만 알려진 당쟁의 사상적 토대를 찾아내 학문·도덕과 정치의 통일이라는 중세적 특징을 더욱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주자학과 탈주자학(혹은 성리학과 탈성리학), 그리고 성리학과 실학의 구도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데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로 200자 원고지 150매로 한정되는 논문의 분량에 대한 현행 관례를 고려할 때, 한 편의 논문을 통해 이러한 기대를 다 충족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또한 박세당의 <<사변록>>과 김창협의 <논사변록변>이 다루고 있는 논점만 해도 그 양이 방대하여 한 편의 논문에 실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성과를 3개의 논문으로 나누어 학술지에 발표하고, 향후 단행본 저술에 한 부분으로 포함시킬 계획이다. <서계 박세당의 <<대학사변록>> 검토>, <서계 박세당의 <<중용사변록>>에 대하여>, <박세당의 <<논어·맹자사변록>>과 김창협의 비판> 등이 논문으로 발표될 예정이고, 향후 이 논문들에 <<사변록>> 시비의 전말과 노소 양측의 입장, 그리고 윤휴 등의 ‘탈주자학’적 경서 해석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연구 등을 더하여 조선시대 ‘사문난적’ 시비에 관한 저서를 저술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연구의 일부이고 등재지가 아니라서 따로 사사표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본 연구와 관련하여 <<맹자사변록>>에 나타난 호연지기론에 대한 박세당의 해석과, 그에 대한 김창협의 비판을 다룬 <<논사변록변>의 호연지기론에 대한 고찰>(<<기전문화연구>>34, 2008, 6)을 학술지에 발표했고, <서계 박세당의 <<대학사변록>>에 대한 검토>를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표했다(제8회 연구발표회, 2009, 2). 후자는 사사표기를 하여 등재학술지에 게재할 예정이다.
  • 색인어
  • 사변록, 서계, 박세당, 농암, 김창협, 노론, 소론, 사문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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