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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기 일본의 미션 스쿨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메이지 시기 일본의 미션 스쿨 | 2007 년 | 이명실(숙명여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B00502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5월 25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에서는 메이지 초기 개혁·장로파 교회와 감리파 교회의 학교 설립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특징에 관해 살펴보았다. 각 교단의 선교사들은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일본어 연구, 번역 및 저술 활동, 의료 및 교육 활동 등 선교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 갔다.
    특히 서구화주의 시대라고 일컬어졌던 ‘메이지 10년대’는 메이지 정부가 일본의 근대적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던 시기였다. 이는 일본에 온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우회적 방법을 통한 기독교 선교를 가능케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전개된 각 교파의 교육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선교사들은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때에도 정부 설립의 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일본의 지도층을 배출해 내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에 영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조치이기는 했지만, 선교사들에게는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에게서 배운 젊은 인재들은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가 되어 이후의 정치·교육 체제를 구축해가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둘째,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아래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1870년대 전후 다수 설립된 교육시설은 10명 이하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주 교재로 하여 영어를 배우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들 가숙(家塾)이 소규모의 형태로 운영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어 학습의 필요를 강하게 자극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했으며, 이들 선교사의 활동에 제재를 가할 만큼의 여유 없었던 일본 정부의 상황도 있었다. 즉 이 당시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일본 정부가 우려할 만큼의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성장한 상태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셋째, 선교사들은 교육활동 이외에 번역 및 저술 활동에도 진력하였다. 특히 개신·장로교의 선교사들은 성경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이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학교 설립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전파하려고 했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활동이었다.
    넷째, 일본에 온 많은 교파 가운데 특히 개신·장로파와 감리파 교회는 교단 내 통합을 통해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대표적 학교가 메이지 학원과 아오야마 학원이다. 이러한 학교 설립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메이지 학원이 그 모체를 신학교에 두고 일본인 전도사 양성을 우선시했음에 비해, 아오야마 학원은 기독교적 인재 양성을 위한 보통학 과정을 우선시하는 변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는 개신·장로교와 감리교가 지향하는 목표의 차이와 연동하는 것으로, 이후 교육과 종교의 갈등 상황에서 각 교단이 자신의 입지를 결정해 나가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다섯째, 각 교단의 교육 활동 가운데 일본 교육에 끼친 공헌을 지적해야 할 것은 여자교육의 보급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근대적 국민의 양성을 목표로 했던 메이지 정부는 여자교육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전통적 여성관을 불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의 여학교 설립은 서구의 새로운 인간관을 전파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설립된 미션 스쿨 가운데 반 이상이 여자학교였다는 점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characteristics in the foundation process of the mission schools in the early Meiji period of Japan. To accomplish this purpose, I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educational policy in the Japanese Meiji 10s. I also examined the instruction service of the missionaries and the characteristics in the foundation process of the mission schools, especially Meiji Gakuin and Aoyama Gakuin.
    On the analysis, the results appeared as follows: a) The missionaries of each religious association became english teachers of government foundation' schools and produced many men of distinguished talent; b) It is difficult to assert that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the missionaries had been progressed systematically their plan; c) The missionaries exerted the activities, for examples the Japanese language study, translation and literary efforts, medical and instruction service etc; d) Especially, the Reformed & Presbyterian churches and the Methodist churches progressed the foundation of mission schools with the unification inside religious association.; e)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each religious association had affirmative contribution in the spread of women's education.
    As mentioned above, I examined the mission schools' place in the Japanese Meiji 10s. Also I discussed that the missionaries of each religious association had influenced on the social, educational and political aspects of Japan. This study will help examine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mission schools in the modern era of Korea. This study also will offer the key points to examine the connection of the mission schools between Korea and Japa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에서는 메이지 초기 일본에 존재한 교파 가운데, 특히 개혁·장로교와 감리교의 학교설립 과정과 거기서 나타나는 특징에 관해 고찰한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1880년 교육령 개정, 1886년 학교령 등을 통해 미션 스쿨의 설립이나 변경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미션 스쿨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1880년대 중반 이후 천황제 이데올로기 보급을 위한 교육정책의 보수화와 이에 따른 미션 스쿨과의 갈등과 타협의 과정에 초점이 두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교육과 종교와의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기 전,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1880년 중반 이전에 미션 스쿨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가에 주목한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메이지 초기 미션 스쿨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일본의 사회적 상황과 당시 일본 정부의 교육정책의 특징에 관해 살펴본다. 개신교에 대한 사회 각층의 인식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시기에 미션 스쿨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조건에 관해 살펴본다.
    둘째,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와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지 살펴본다. 메이지 초기 서구화 주의를 내세웠던 일본 정부가 이들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일본 근대교육체제 형성 과정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위상에 관해 검토한다.
    셋째, 미션 스쿨이 학교로서의 체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어떤 자기 변혁의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개혁·장로파 교회와 감리파 교회의 학교설립 과정을 통해 살펴본다. 이들 교파는 당시 일본에 있었던 개신교 선교단 가운데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많은 학교를 세워 일본의 근대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작업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기반연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지금까지의 연구는 일본 정부가 천황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기 위해 발포한 사립학교령과 문부성 훈령 12호로 미션 스쿨이 어떤 위기에 처해있었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초점을 두어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런데 미션 스쿨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선택지는 각 학교가 추구하는 목표와 연동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표의식은 학교가 설립되는 과정, 교육내용, 교단의 지원 형태 등에서도 나타난다. 본 연구는 각 교단의 학교 설립 과정에 초점을 두어 논의를 전개한다. 둘째, 일본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이들 교단의 교육 방침과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선교 방침의 차이를 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셋째, 선교 본국이 일본과 한국에서 실시했던 선교정책의 차이와 유사성을 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에서는 메이지 초기 개혁·장로파 교회와 감리파 교회의 학교 설립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특징에 관해 살펴보았다. 각 교단의 선교사들은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일본어 연구, 번역 및 저술 활동, 의료 및 교육 활동 등 선교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 갔다.
    특히 서구화주의 시대라고 일컬어졌던 ‘메이지 10년대’는 메이지 정부가 일본의 근대적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던 시기였다. 이는 일본에 온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우회적 방법을 통한 기독교 선교를 가능케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전개된 각 교파의 교육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선교사들은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때에도 정부 설립의 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일본의 지도층을 배출해 내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에 영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조치이기는 했지만, 선교사들에게는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에게서 배운 젊은 인재들은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가 되어 이후의 정치·교육 체제를 구축해가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둘째,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아래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1870년대 전후 다수 설립된 교육시설은 10명 이하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주 교재로 하여 영어를 배우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들 가숙(家塾)이 소규모의 형태로 운영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어 학습의 필요를 강하게 자극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했으며, 이들 선교사의 활동에 제재를 가할 만큼의 여유 없었던 일본 정부의 상황도 있었다. 즉 이 당시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일본 정부가 우려할 만큼의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성장한 상태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셋째, 선교사들은 교육활동 이외에 번역 및 저술 활동에도 진력하였다. 특히 개신·장로교의 선교사들은 성경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이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학교 설립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전파하려고 했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활동이었다.
    넷째, 일본에 온 많은 교파 가운데 특히 개신·장로파와 감리파 교회는 교단 내 통합을 통해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대표적 학교가 메이지 학원과 아오야마 학원이다. 이러한 학교 설립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메이지 학원이 그 모체를 신학교에 두고 일본인 전도사 양성을 우선시했음에 비해, 아오야마 학원은 기독교적 인재 양성을 위한 보통학 과정을 우선시하는 변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는 개신·장로교와 감리교가 지향하는 목표의 차이와 연동하는 것으로, 이후 교육과 종교의 갈등 상황에서 각 교단이 자신의 입지를 결정해 나가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다섯째, 각 교단의 교육 활동 가운데 일본 교육에 끼친 공헌을 지적해야 할 것은 여자교육의 보급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근대적 국민의 양성을 목표로 했던 메이지 정부는 여자교육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전통적 여성관을 불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의 여학교 설립은 서구의 새로운 인간관을 전파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설립된 미션 스쿨 가운데 반 이상이 여자학교였다는 점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 연구에서는 메이지 초기 일본의 미션 스쿨이 1880년대 중반 이전 일본 교육의 흐름 가운데에서 어떤 위상으로 존재했는가를 규명해 보았다. 새로운 선교의 땅 일본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행한 다양한 활동이 사회·교육·정치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파급 효과를 지녔음이 본 연구를 통해 제시되었다고 본다. 더불어 이 연구는 근대 이후 한국 교육의 전개 과정에서 미션 스쿨이 어떤 변천 과정을 겪었는지를 보다 세심하게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미션 스쿨의 관계를 비교 검토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 색인어
  • 메이지 시기, 미션 스쿨, 개혁 장로교, 감리교, 메이지 학원, 아오야마 학원, 기독교, 기독교주의 학교, 선교사, 헵번, 브라운, 캐로더스, 버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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