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철학의 전통에 입각한 도덕 주체는 자율적이고 평등하며 독립적인 무관심한 행위자를 전제하며, 여기에서 도출되는 도덕이론은 모든 감성적인 면을 제거함으로써 도덕과 경험, 도덕과 감정 간의 연결을 무시한다. 따라서 근대철학에 입각한 도덕이론은 도덕적 직관이 ...
서구 철학의 전통에 입각한 도덕 주체는 자율적이고 평등하며 독립적인 무관심한 행위자를 전제하며, 여기에서 도출되는 도덕이론은 모든 감성적인 면을 제거함으로써 도덕과 경험, 도덕과 감정 간의 연결을 무시한다. 따라서 근대철학에 입각한 도덕이론은 도덕적 직관이나 감정을 비객관적,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의 정서를 무시하거나 초월하는 도덕 담론이 인간의 실제적 삶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구체적 맥락의 타자를 상정하기보다 일반화된 타자를 상정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무관심을 함축하고 있고 개별 주체들의 개성과 온전성을 간과할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전통 유가의 가족 서사로서의 친친 개념에 주목한다. 친밀한 감정으로서의 전통적 친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친친이 지니는 배제성, 편파성을 부정하고 차이, 만남을 전제로 하는 친친의 원리를 개발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도덕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할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한다.
논문은 우선 전통적 친친이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님을 인식한다. 첫째, 친친의 원리는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부모-자녀 관계 혹은 혈연관계에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모-자녀관계에 놓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부모-자식 관계에 놓일 수 없거나 혈연관계를 갖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원리 혹은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친친의 논리를 강조할 때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차이와 다름, 특수성은 용인되지 않고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철저히 분리하여 배제하는 방식, 혹은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포섭되는 동화의 방식만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의 윤리에 입각한 논의만을 도덕 이론의 대표적인 모델로 상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 또 감정을 배제한 채로 건전한 도덕 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의구심은 친친을 재활용해 볼 당위성과 필요성을 제공한다. 친친을 도덕 원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논문은 다음과 같은 전략적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친친을 혈연가족의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만듦으로써 현대사회에서도 유용한 전략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논문은 혈연가족으로서의 가족이 아닌 친밀한 집단이라는 의미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이를 통해 폐쇄적이지 않은 친친의 원리를 모색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둘째, 전통적 친친은 친한 이의 범주를 혈연가족에 제한시킬 수 있기에, ‘친한 이’의 범주를 다르게 상정하는 방법을 떠올려 본다. 친한 이의 범주를 어떻게 상정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구조는 달라질 것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인간관계와 도덕 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문에서는 은대 사회에서의 친친 개념에 주목하고, 이를 주대 사회에서의 친친과 비교함으로써 ‘친한 이’의 범주를 달리 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셋째, 친친을 도덕적 원리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편애성(partiality)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본다. 특별한 관계에서 사적으로 일어나는 감정들 모두를 평등성, 불편부당성, 상호성 등을 보장하는 보편적 원리와 정면으로 대치시킬 수 없음을 맹자의 측은지심을 통해서 증명한다. 구체적 경험, 그리고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존재를 특별한 위치에 놓고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 모두가 사적 감정에 기반한 제한된 도덕 지침을 마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와 전략적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친친은 기존의 도덕원리가 간과해 온 것들을 지적하고 새로운 도덕 패러다임을 구상하는 데에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래야 도덕 원리는 단지 하나가 아니라 하나 이상임을 인식하고, 친밀성, 애정, 명예, 공정성 등의 인간의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가치들이 어느 하나로 규정되기 보다는 다수라는 사실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속에서 마련되는 새로운 도덕 원리는 타자의 삶을 느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도록 보살펴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덕 원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