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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서울 동막 미곡객주의 미곡운송과 거래 -김상민 가의 '동태원' 경영 장부 분석을 중심으로-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한말 서울 동막 미곡객주의 미곡운송과 거래 -김상민 가의 & #39;동태원& #39; 경영 장부 분석을 중심으로- | 2007 년 | 홍성찬(연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B00094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6월 02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대한제국 시기에 서울 한강변에서 영업하였던 여러 객주업체 가운데 하나인 ‘동태원’의 장부를 이용하여 20세기 초 서울 미곡객주들의 미곡반입 실태와 그 기반이 되었던 재래 선운업의 수준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확인된 사실은 아래와 같다.
    첫째, 동태원은 거의 모든 미곡을 선박을 통해서 반입하였고, 이들에게 미곡을 운송한 선운업자는 거의 모두 한국인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재래 선운업은 서울로의 미곡운송에 관한 한 외국계 선운업에 비하여 상당한 경쟁력을 가졌던 것이다.
    둘째, 재래 선운업이 이처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크고 작은 배들이 미곡의 산지와 서울을 수시로 드나들며 미곡을 날랐기 때문이다. 당시 서해안과 한강 수계의 포구들에서는 서울 행 선박이 수시로 출발하였고 그래서 하주들은 비록 정기선은 아닐지라도 화물의 규모가 얼마이든 소정의 운송료만 지불하면 언제든지 미곡을 운송할 수 있었다. 운송물량이 많으면 선박을 통째로 빌리면 되었고, 물량이 적으면 화물을 싣고 서울로 출발하는 다른 배편에 소정의 운송료를 지불한 후 자신의 화물을 함께 실어 보내면 되었다. 이 가운데 좀 더 일반적인 유형은 후자였던 것 같다. 대한제국 시기의 이러한 운송관행은 정부가 조세의 금납화를 실시하여 정부의 조세곡 운송은 줄고 대신 민간의 미곡운송이 증가하였던 갑오개혁(1894)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인 조선후기의 그것과도 상당히 유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당시의 재래 선운업은 선주와 하주가 분리되어 있었다. 선주는 자기화물이 아닌 타인화물을 운송한 전문적인 선운업자였고, 그 점에서 재래 선운업은 이미 근대 선운업의 영역에 속하였다.
    넷째, 선박의 운임은 운송수요에 크게 영향 받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서 나선형을 그리며 순환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였다. 한편, 하주들은 미곡의 운송과 유통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무명잡세도 부담하였는데 그 액수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상인들의 무명잡세에 대한 반발이 거세고 대한제국 정부도 이를 없애는데 주력한 때문인 듯한데, 무명잡세의 규모가 얼마이고 또 언제까지 존속하였는지는 그것이 대한제국의 국가성격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지적되어 왔다는 점에서 추후 충분한 규명이 요구된다.
  • 영문
  • The Shipping Industry and Grain Delivery of the Dongmak Consignee
    of Seoul in the Hanmal Period

    This study analyzes the account books of the Dongtaewon(東泰元), one of the grain consignees(米穀客主) operating on the banks of the Han River in Seoul during the Daehan Empire. This analysis is concerned with the market situation of grain shipment industry and related activities of grain consignees in early twentieth-century Seoul.
    First, Dongtaewon shipped nearly all of its grain through vessels. Also, nearly all of the shippers who transported grain for the consignees were Koreans. The existing shipping industry during the time of the Daehan Empire was quite competitive as compared with the foreign shipping firms that were also transporting grain through Seoul.
    Second, the competitiveness of the shipping industry came from the fact that many ships, small and large, continuously transported the grain between Seoul and the grain-producing areas. At the time, the ships that traveled between the west coast and the ports on the Han River seemed to transport the grain to Seoul at any time and from any local areas at the fixed per-unit fee of shipment, regardless of the size of the shipment. If the shipping amount was large, then the shippers would rent the entire vessel. If the shipping amount was small, then they would transfer the cargo to the vessel of another shipping service headed to Seoul and pay the fixed per-unit shipping fee. The latter was more common than the former. During the Daehan Empire period, the government monetized its tax payments through customary shipping practices which resulted in a decrease in the shipment of government tax rice and an increase in private rice shipping, particularly after the Kabo Reforms (1894) but also in the period before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ird, the shipping industry as a whole was divided between the ship owners and the shippers. The ship owners were specialist shippers who did not transport their own cargo but cargo belonging to other people. In this respect, the shipping industry of that period were already operating in the realm of the modern shipping industry.
    Fourth, the freight charges levied by the vessels were heavily influenced by seasonal demand for shipping services and that fees increased in a spiraling or circular trend-line. In the rice shipment and its circulation process, shippers paid various obscure, miscellaneous taxes but their amounts were not large. It seems because merchant opposition to the miscellaneous taxes was strong and the Daehan imperial government tried to eliminate these taxes. The scale of miscellaneous taxes and the length of their duration are important indices indicating the character of the Daehan Empire, requiring further examination in the futur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말 서울 동막 객주의 미곡 반입과 재래 선운업
    -객주업체 ‘동태원’의 자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서울 한강변에서 영업하였던 여러 객주업체 가운데 하나인 ‘동태원’의 장부, [선복]을 이용하여 20세기 초 서울 미곡객주들의 미곡반입 실태와 그 기반이 되었던 재래 선운업의 수준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확인된 사실은 아래와 같다.
    첫째, 동태원은 거의 모든 미곡을 선박을 통해서 반입하였고, 이들에게 미곡을 운송한 선운업자는 거의 모두 한국인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재래 선운업은 서울로의 미곡운송에 관한 한 외국계 선운업에 비하여 상당한 경쟁력을 가졌던 것이다.
    둘째, 재래 선운업이 이처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크고 작은 배들이 미곡의 산지와 서울을 수시로 드나들며 미곡을 날랐기 때문이다. 당시 서해안과 한강 수계의 포구들에서는 서울 행 선박이 수시로 출발하였고 그래서 하주들은 비록 정기선은 아닐지라도 화물의 규모가 얼마이든 소정의 운송료만 지불하면 언제든지 미곡을 운송할 수 있었다. 운송물량이 많으면 선박을 통째로 빌리면 되었고, 물량이 적으면 화물을 싣고 서울로 출발하는 다른 배편에 소정의 운송료를 지불한 후 자신의 화물을 함께 실어 보내면 되었다. 이 가운데 좀 더 일반적인 유형은 후자였던 것 같다. 대한제국 시기의 이러한 운송관행은 정부가 조세의 금납화를 실시하여 정부의 조세곡 운송은 줄고 대신 민간의 미곡운송이 증가하였던 갑오개혁(1894)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인 조선후기의 그것과도 상당히 유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당시의 재래 선운업은 선주와 하주가 분리되어 있었다. 선주는 자기화물이 아닌 타인화물을 운송한 전문적인 선운업자였고, 그 점에서 재래 선운업은 이미 근대 선운업의 영역에 속하였다.
    넷째, 선박의 운임은 운송수요에 크게 영향 받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서 나선형을 그리며 순환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였다. 한편, 하주들은 미곡의 운송과 유통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무명잡세도 부담하였는데 그 액수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상인들의 무명잡세에 대한 반발이 거세고 대한제국 정부도 이를 없애는데 주력한 때문인 듯한데, 무명잡세의 규모가 얼마이고 또 언제까지 존속하였는지는 그것이 대한제국의 국가성격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지적되어 왔다는 점에서 추후 충분한 규명이 요구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대한제국 시기에 서울 동막에서 영업하였던 ‘동태원’의 장부를 이용하여 20세기 초 서울 미곡객주의 미곡반입 실태와 그 기반이 되었던 재래 선운업의 수준을 살펴보았다.
    서울의 객주들이 각지에서 배편으로 올라온 미곡을 그후 어떻게 하륙, 입고, 보관, 매각하였고, 또 하주들과 그 매각대금을 어떻게 정산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유통비용과 '무명잡세'를 부담하였던가를 추가로 검토하면 이 시기 미곡객주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 색인어
  • 대한제국, 미곡객주, 선운업, 동태원, 김상민, 김락희, 김수희, 수남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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