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성과물 유형별 검색 > 보고서 상세정보

보고서 상세정보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16855&local_id=10018987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과 사지(寺誌)편찬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과 사지& #40;寺誌& #41;편찬 연구 | 2007 년 | 오경후(동국대학교 WISE& #40;와이즈& #41;캠퍼스)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304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2월 11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만덕사지󰡕는 만덕사(백련사)와 관련된 일련의 사실들을 면밀한 고증을 통해 찬술하였다. 다산은 사지 전권을 감정하는 소임을 맡았고,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아암 혜장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편집과 교정을 맡았다. 다산은 유배시기 동안 강진에서 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고,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 영향은 사지찬술에까지 이어졌다. 강목체로 구성되어 있고, 찬술방식 역시 일반사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 찬자들은 한국불교사에서 대표적인 신앙결사였던 고려 중후기 백련결사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찬술하였다. 그들은 흩어진 기록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불교사적 의미를 밝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수집이 용이하지 않았고, 불교에 대한 탄압과 소외는 여전하였지만, 불교사 복원과 만덕사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시대 자료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료를 수록하여 보존하고자 하였다. 찬자들은 동시대의 만덕사가 지닌 위상과 가치 역시 강조하였다. 그들이 찬술했던 조선시대 만덕사의 8대사는 조선후기 불교계에 유행했던 선교학의 대가들이었다.
    8대사는 소요 태능의 문손들로 청허 휴정의 의발을 전수받은 이후 선교학의 종원임을 표방하고자 했던 대흥사의 종사나 강사로 손꼽히는 이들도 있었다. 󰡔만덕사지󰡕는 취여 삼우가 조선후기 만덕사를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수백 명의 대중들이 그의 화엄학 강의를 듣고자 운집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글을 몰랐던 화악 문신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만덕사는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선교학에 조에가 깊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비록 조선시대의 만덕사는 대흥사보다는 그 사세가 크게 낙후되었지만, 걸출한 인물들의 배출은 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흥사가 선교학의 종원을 표방한 것은 만덕사 승려들의 기여 또한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만덕사지󰡕의 편찬은 전란이후 자주적 역사인식과 편찬의 소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국사에 대한 독자적 인식과 정체성 강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 대한 적극적 인식으로 이어져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면밀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 찬술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탄압과 소외로 망실된 불교사를 복원하는 역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 영문
  • Mandeuksaji(󰡔萬德寺志󰡕) was the Documentaries into which Dasan(茶山, Chong Yagyong) compiled a series of historical facts about Mandeuksa temple, alias Baekryunsa(白蓮寺, temple), through his reliable and closed ascertainment of historical research in connection with the temple. While Dasan played a role of fair and cautious supervisor on the whole book, his pupils and followers, including the priest A-am Hae-jang(兒菴 惠藏), edited and revised the Documentaries. During his periods of exile and demotion, Dasan cultivated close friendship with them, and led them to promote several studies at the Ganjin(康津). The after-effects of such a intimate friendship between Dasan and them or such their developmental scholarship caused the compilation of Mandeuksaji, finally.
    Mandeuksaji was consisted of Annotated Account. Accordingl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documentaries and a general historical book in editing or compiling form. Editors by Whom Mandeuksa was written, focused on several participants who took part in BaekryunGulsa(association of White Lotus) through the whole Korean Buddhist History during the middle and latter period of Goryeo Dynasty. They gathered historical sources, which had scattered far and wide, and sought to find and interpret the hidden meaning of Korea buddhist history. Although it was uneasy for the editors to gather historical material or source about Mandeuksa, as well as there is suppression of Choson Dynasty on Buddhism at those day, these not only were remiss in their duty, but also continually put great emphasis upon the restoration of Buddhist history and the historical prestige of Mandeuksaji. Futhermore, they not only corrected historical inaccuracies of the Goryeo Dynasty, but also tried to preserve historical material which might slowly faded into dark age from its loss. In addition to such activities, they placed stress on the contemporary prestige and value, which Mandeuksa held at those day. Finally, they recorded 8 great monks of Mandeuksa in the temple historical documentaries, who were the most typical monks of predominant Zen sect and Doctrinism of Buddhism in the late Choson Dynasty.
    8 great monks were scholar monks inheriting the Buddhistic tradition and Buddhahood from Soyo Taeneung(逍遙 太能), and upon their receipt of ChungHeo(淸虛)'s and Hyujong(休靜)'s mantle, they played the role in lecturer or instructor of Daeheungsa(大興寺) temple. For example Mandeuksaji was recorded that monk who was called Chui-yeo Sam-woo(醉如 三愚) devoted one´s life to the restoration of Mandeuksa during the late Choson Dynasty. Mandeuksaji revealed that a good many people swarmed over at the temple site in order to attend Chuiyeo' lecture about of Huayan thought(華嚴學). Especially, an illiterate monk who was called Huha-Ak MunShin(華嶽 文信) attended at lecture site of the temple. With Going through a series of developmental process, Mandeuksa laid the revival groundwork and produced many monk who have distinguished scholarship in relation to Zen sect and Doctrinism of Buddhism. Although Mandeuksa's power was not up to Daeheungsa's in the Choson Dynasty, the figure of distinguished monks who the former produced did not lag behind the latter's.
    Eventually, It seemed to me that the writing and editing of Mandeuksaji was the outcome of historical understanding, which was willing to show the self-reliant and autonomous awareness by them. The self-reliant ideal type of Korean history and expression of its identity out which writer and editor sought led into aggressive awareness of Korean Buddhist history, so that they could try to collect material broadly, embark oneself in detailed evaluations, and write or edit the objective temple history. It appeared to me that Mandeuksaji(󰡔萬德寺志󰡕) have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oward revivalism in view of "forgotten Buddhist history", which underwent the sense of oppression and alienation from Choson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란은 막대한 국가적 손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자기 확인은 자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으로 이어졌고 철저한 고거주의에 기초한 자국사 편찬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불교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덕사지󰡕와 󰡔대둔사지󰡕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영향으로 동시대에 찬술된 사지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양란이후 사찰들은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재건공사를 대규모로 진행하였다. 사적기와 사지류 역시 조선전기보다는 많이 찬술되었다. 그러나 내용은 정확하지 못했고, 객관성에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창건 시기가 실제보다 앞당겨졌고, 창건주 역시 원효와 의상이 대부분의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중건 이후 사찰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당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반면 󰡔만덕사지󰡕는 사찰과 관련된 일련의 사실들을 면밀한 고증을 통해 찬술하였다. 다산은 사지 전권을 감정하는 소임을 맡았고,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아암 혜장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편집과 교정을 맡았다. 다산은 유배시기 동안 강진에서 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고,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 영향은 사지찬술에까지 이어졌다. 강목체로 구성되어 있고, 찬술방식 역시 일반사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 찬자들은 한국불교사에서 대표적인 신앙결사였던 고려 중후기 백련결사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찬술하였다. 그들은 흩어진 기록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불교사적 의미를 밝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수집이 용이하지 않았고, 불교에 대한 탄압과 소외는 여전하였지만, 불교사 복원과 만덕사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시대 자료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료를 수록하여 보존하고자 하였다. 찬자들은 동시대의 만덕사가 지닌 위상과 가치 역시 강조하였다. 그들이 찬술했던 조선시대 만덕사의 8대사는 조선후기 불교계에 유행했던 선교학의 대가들이었다.
    8대사는 소요 태능의 문손들로 청허 휴정의 의발을 전수받은 이후 선교학의 종원임을 표방하고자 했던 대흥사의 종사나 강사로 손꼽히는 이들도 있었다. 󰡔만덕사지󰡕는 취여 삼우가 조선후기 만덕사를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수백 명의 대중들이 그의 화엄학 강의를 듣고자 운집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글을 몰랐던 화악 문신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만덕사는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선교학에 조예가 깊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비록 조선시대의 만덕사는 대흥사보다는 그 사세가 크게 낙후되었지만, 걸출한 인물들의 배출은 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흥사가 선교학의 종원을 표방한 것은 만덕사 승려들의 기여 또한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만덕사지󰡕의 편찬은 전란이후 자주적 역사인식과 편찬의 소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국사에 대한 독자적 인식과 정체성 강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 대한 적극적 인식으로 이어져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면밀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 찬술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탄압과 소외로 망실된 불교사를 복원하는 역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전근대 사회에서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 기능을 가진 공간이자 문화, 예술, 사상 등 전통문화의 보고인 사찰에 대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사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본 연구결과는 첫째, 조선후기 󰡔만덕사지󰡕는 당대의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을 위시한 아암 혜장과 그의 제자들이 면밀한 고증을 통해 찬술하였다.
    둘째, 이들이 찬술한 󰡔만덕사지󰡕는 단순히 만덕사의 연혁을 비롯한 역사와 문화만을 기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료수집과 분석, 평가 그리고 찬술방식에 이르기까지 일반사의 역사연구나 찬술방식과 동일하다. 셋째, 󰡔만덕사지󰡕는 불교탄압으로 폐허와 사라질 위기에 놓인 불교사 복원과 만덕사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오류를 바로잡고, 자료보존에 힘을 쏟았다. 넷째, 조선후기 불교사상계의 동향을 반영하였다. 예컨대 선교학에 탁월한 조예가 있었던 만덕사의 8대사는 선과 화엄학을 중심으로 한 교학을 후학들에게 강의하여 불교학의 중흥을 위해 진력하였다. 이들은 당시 선교학의 종원이었던 대흥사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만덕사지󰡕는 양란이후 자주적 역사인식과 자국사에 대한 독자성 인식과 정체성을 만덕사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탄압과 소외로 망실된 불교사를 복원하는 역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학제적 연구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사지가 가진 가치는 특정 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사의 기본 자료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사원경제사, 지방사회사, 문학사, 문화재의 보존과 조사 등 폭넓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가능케 해준다. 한국불교사 연구는 종래 신라불교를 중심으로 한 고대불교에 집중된다든지,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고려불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조선시대 이후의 불교연구는 초기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조선후기 불교사는 조선전기 불교사 연구보다 더욱 심각하여 전체적인 규모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불교관계기사는 여전히 탄압과 소외로 일관되어 있어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연구는 기대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사정과 왜곡할 수 없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수집과 분류, 분석은 지난한 일이고 실제적인 효과 역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찬술된 사지는 관찬사서에 수록된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탄압 속에서 불교계가 어떻게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변화하고 향상할 수 있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사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교사의 편린을 모아 복원할 수 있는 결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관련 자료와 연구의 부족으로 부정적 인식과 오류, 연구대상에서 제외된 소외감을 떨칠 수 있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암울한 상황 속에서 살고자 몸부림쳤던 수많은 승려들의 몸부림과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현장기록이기도 하다.
    셋째, 실학자와 승려의 교류뿐만 아니라 유학과 불교라고 하는 사상 간의 교류를 통해 조선후기 사상사를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다. 󰡔만덕사지󰡕는 당대의 거유(巨儒) 다산 정약용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동시대 불교계에서 찬술된 사지와는 질적 차이를 지니고 있다. 다산은 18년의 유배기간동안 해남과 강진을 중심으로 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단순히 풍류의 차원에서 시를 주고받은 정도가 아니었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돈독했다. 대흥사의 초의(草衣), 만덕사의 아암(兒菴)은 다산을 스승으로 흠모했고 추앙하였다. 그들은 다산에게서 사서를 중심으로 한 유교경전을 배웠고, 조선의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한 입장에서 이해하고 찬술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다산 또한 승려와의 교유관계 속에서 불교를 통해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달랬고, 불교교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 색인어
  • 만덕사지(萬德寺志) 백련결사(白蓮結社) 대흥사(大興寺) 정약용(丁若鏞) 화엄학(華嚴學) 선교학(禪敎學) Mandeuksaji, BaekryunGulsa(association of White Lotus), Daeheungsa(temple), Chong Yagyong, Huayan thought, Zen sect and Doctrinism of Buddhism.
  • 이 보고서에 대한 디지털 콘텐츠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 본 자료는 원작자를 표시해야 하며 영리목적의 저작물 이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또한 저작물의 변경 또는 2차 저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