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간 탈경계적 주체로서의 번역가의 위상 찾기
번역가들은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의 경계에서 ‘낯섦’을 수용하고 문화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질적인 요소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이때 번역가들은 자신이 섬겨야 하는 두 ...
문화간 탈경계적 주체로서의 번역가의 위상 찾기
번역가들은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의 경계에서 ‘낯섦’을 수용하고 문화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질적인 요소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이때 번역가들은 자신이 섬겨야 하는 두 주인 사이에서 부단히 갈등하고, 대화와 타협을 모색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고정된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고집하기 보다는 그것의 경계를 뛰어넘어 양자 사이를 부단히 오가며, 때로는 자신의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기도 하고, 역으로 자국의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각인시켜 주는 양립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번역가, 혹은 번역주체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다. 언어학이나 문학이론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은 번역학조차 번역의 이론적 배경이나 실제 번역의 방법론, 그 외에 번역을 둘러싼 많은 언어학적, 인식론적 틀을 제공하면서도, 정작 그 행위의 주체가 되는 번역가 자체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표하지는 않는다.
• 문화전이 행위로서의 번역과 학문적 탐구자로서의 번역가의 정체성 탐구
우리가 번역 행위 자체를 더 이상 두 언어 사이를 옮기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라 두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상정한다면, 나아가서는 명확한 사유와 논리적 정신에 의거한 비평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번역가는 더 이상 지식을 중개하는 기능인이나 매개인이 아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문학자의 모습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번역가들이 문화전이와 학문 탐구의 역사에서, 한 사회의 문화적, 지적 담론의 변천 과정이나 언어적, 문체적 변천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고찰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
예컨대 근대기의 번역주체는 식자들의 언어인 고전어(혹은 한문)를 민족어로 옮기는 시민적 주체였고, 학문 수행의 토대에 언어적, 인식론적, 방법론적 전환을 이루어낸 주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또한 이질문화의 자국화(domestication, Einbürgerung)를 통해 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를 촉진시키는 데 기여한 식민적 주체로 변했는가 하면, 오늘날에는 제1 세계의 문화제국주의적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속에 깊숙이 깔려있는 식민성을 고발해내는 탈식민적 주체로 평가받기도 한다(Venuti, 1998). 이처럼 번역주체의 정체성이란 대단히 복합적이고 유동적이어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혹은 이데올로기적 맥락 속에서라야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 근대 독일 번역 담론의 유형에 따른 번역가의 역할과 번역전략에 대한 규명
실제로 번역주체의 복합적인 정체성이나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번역의 과제나 기준은 각기 다른 출발선에서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번역이론이나 문학 혹은 문화이론들에 따라서도 상당 부분 달라진다. 동시에 이 같은 번역 주체에 대한 이론적, 사회적 인식과 나아가서는 번역가의 자기 이해는 역으로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사이의 협상과정으로서의 번역 행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본 연구에서는 번역가를 ‘탈경계적’ 주체로 규정하고자 하는데, 무엇보다 그들은 출발어와 도착어, 출발텍스트와 도착텍스트, 혹은 출발문화와 자국문화라는 두 축의 ‘사이’ 혹은 ‘그 너머’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 영역 모두에 정통해야 하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 이들 번역주체는 출발 문화의 시공간을 자신의 시대에 불러내어 현재화시키기고 하고, 혹은 도착어 독자들은 전혀 이질적인 언어-문화 공간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문화간 탈경계적 주체로서의 번역가의 과제와 번역전략>을 주제로 하는 본 연구에서는 그간의 번역연구에서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던 번역주체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학문 탐구 혹은 문화 전이에 있어 번역가의 역할과 자기 이해, 그들의 번역관, 번역 윤리 혹은 번역 전략 등을 19세기 독일 번역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독일 번역가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국내 번역 연구에서 이 시기가 거의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결정적인 이유 이외에도 번역 담론의 흐름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기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