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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齋 李齊賢의 古文倡導에 대한 재검토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益齋 李齊賢의 古文倡導에 대한 재검토 | 2009 년 | 서정화(고려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493
선정년도 2009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1년 04월 06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1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李齊賢의 산문은 여유롭고 명쾌하면서도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전달하므로 그를 뛰어난 고문가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간 이제현을 ‘고문의 창도자’로 규정한 것에 대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중 문화교류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늦어도 100, 150년 정도 내에서 수용되고 變奏되었다. 그러나 이제현을 한국의 고문창도자로 규정할 경우, 중국의 고문창도자라고 할 수 있는 한유와의 거리가 500여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중 문화교류의 일반사와 크게 괴리된다.
    둘째, 고문운동은 문학운동이자 사상운동이지만, 이러한 잣대를 적용하여 이제현에게 고문창도의 공을 물려줄 필요는 없다. 고려 문단에서 고문운동이 반드시 일어날 필요도 없거니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하나가 먼저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의 잣대를 고려 문단에 적용시켰기 때문에 고려 전・중기는 적막한 시대가 되었고, 이 당시의 산문은 그 의미가 평가절하 되었다.
    셋째, 고려문단에서는 12세기 무렵부터 당송고문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이제현에 비해 사상운동의 측면은 미약하였으나, 문학운동의 측면은 보다 활발하고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金黃元이 변려문에 반발하여 고문을 창작한 것, 林椿이 형식에 치우친 場屋文學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 李奎報가 새로운 문학론을 제출한 것이 그 예이다.
    넷째, 고려 중기에 假傳이 창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송고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贈序類와 論說類 산문들이 창작 현장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또한 당송고문의 字句만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개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등 자유자재로 당송고문을 변주하였다.
    고려시대 산문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간 ‘이제현이 고문을 창도했다’라고 설정한 좌표는 수정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고려시대 산문사를 바라보는 온당한 시각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 영문
  • Lee Je-hyun demonstrated his writing talents during the Koryo dynasty, and temporary critics evaluate him as a great writer. However, I would like to offer an alternative view of estimating him as an advocate of writing classical style prose. I suggested several reasons in this paper like below.
    First,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always had been progressed within 150 years top. In this case, we can't define Lee Je-hyun as an advocate of writing classcical style prose in Korea. Because he was born over 500 years later than Han Yu, who was an advocate of writing classical style prose during the Tang dynasty in China.
    Second, the movement of writing classical style prose was about literature and also about ideas. But we can't apply this concept to Lee Je-hyun as it is. That is because the condition of Koryo was totally different from China's. Writing prose had not that big meanings during the Koryo dynasty.
    Third, the literary world of Koryo certainly recognized the literary style of Tang and Song. There were several writers who presented their own theory about writing classical style prose. Kim Hwang-won(金黃元), Lim Chun(林椿) and Lee Kyu-bo(李奎報) were typical writers during that period.
    Fourth, a number of writers already created variety form of prose skillfully before Lee Je-hyun. They were not limited just following the literary style of Tang and Song.
    Considering above reasons, I think we should revise erstwhile evaluation of Lee Je-hyun as an advocate of writing classical style prose. And we should reestablish a proper view of the literary history of Koryo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李齊賢의 산문은 여유롭고 명쾌하면서도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전달하므로 그를 뛰어난 고문가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간 이제현을 ‘고문의 창도자’로 규정한 것에 대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중 문화교류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늦어도 100, 150년 정도 내에서 수용되고 變奏되었다. 그러나 이제현을 한국의 고문창도자로 규정할 경우, 중국의 고문창도자라고 할 수 있는 한유와의 거리가 500여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중 문화교류의 일반사와 크게 괴리된다.
    둘째, 고문운동은 문학운동이자 사상운동이지만, 이러한 잣대를 적용하여 이제현에게 고문창도의 공을 물려줄 필요는 없다. 고려 문단에서 고문운동이 반드시 일어날 필요도 없거니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하나가 먼저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의 잣대를 고려 문단에 적용시켰기 때문에 고려 전・중기는 적막한 시대가 되었고, 이 당시의 산문은 그 의미가 평가절하 되었다.
    셋째, 고려문단에서는 12세기 무렵부터 당송고문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이제현에 비해 사상운동의 측면은 미약하였으나, 문학운동의 측면은 보다 활발하고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金黃元이 변려문에 반발하여 고문을 창작한 것, 林椿이 형식에 치우친 場屋文學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 李奎報가 새로운 문학론을 제출한 것이 그 예이다.
    넷째, 고려 중기에 假傳이 창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송고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贈序類와 論說類 산문들이 창작 현장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또한 당송고문의 字句만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개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등 자유자재로 당송고문을 변주하였다.
    고려시대 산문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간 ‘이제현이 고문을 창도했다’라고 설정한 좌표는 수정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고려시대 산문사를 바라보는 온당한 시각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고려 전ㆍ중기 고문에 대한 인식의 전환 :
    고려 전ㆍ중기의 고문에 대한 연구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제현의 고문창도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이 시기의 고문은 그 실체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공백기’로 여겨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현의 고문창도에 대한 시각을 수정하고, 고려 전ㆍ중기 고문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통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고려시대 산문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문산문사의 형성과 전개의 재정립 :
    고려시대는 한문산문사의 형성기에 해당한다. 그간 학계에서는 변려문과 고문의 이분법적 구도로 형성기 산문사를 구분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고문의 개념에는 성리학적 시각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로써 한문산문사를 규정하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문의 기준점을 융통성이 있게 적용하되, 고문에서 ‘개인성의 발현’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고려 전ㆍ중기는 고문의 형성과 정립으로, 후기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유입으로 인한 내용과 형식적 변환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구분지음으로써 형성기 한문산문사를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李齊賢, 古文倡導, 古文運動, 唐宋古文, 韓中 文化交流史, 李奎報, 林椿, 漢文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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