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자크 데리다의『죽음의 선물』을 중심으로 서양의 종교와 철학 내에 존재하는 책임과 죽음의 계보학을 추적한다. 이 추적은 죽음의 아포리아가 책임의 아포리아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아포리아는 한편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나 ...
본고는 자크 데리다의『죽음의 선물』을 중심으로 서양의 종교와 철학 내에 존재하는 책임과 죽음의 계보학을 추적한다. 이 추적은 죽음의 아포리아가 책임의 아포리아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아포리아는 한편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나에게 대체할 수 없는 독특성을 선물하기 때문에 나의 윤리적 책임이 가능하다는 사태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익명성, 자기 잊음과 지움을 낳음으로써 타자를 향한 열림과 책임이 가능하다는 사태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만일 타자 윤리학의 일차적 목표는 타자의 나타남과 결부된 이해나 해석보다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문제라면, 이 책임은 한편으로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독특(singular)하며, 다른 한편으로 타자와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의무의 다함이라는 점에서 또한 독특하다. 데리다는 일견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위의 두 사태를 이중 구속을 통해 서로를 보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타자의 윤리학을 창조한다. 나의 독특성과 타자 관계와의 독특성이라는 책임의 아포리아는 또한 죽음의 아포리아와 관련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난다. 이 죽음의 아포리아는 영혼의 단련이라는 그리스적인 요소와 타자와의 비대칭성이라는 기독교적인 요소라는 서로 대립되는 두 계보에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윤리학은 두 계보를 함께 사유하려 하며, 이를 통해 죽음의 자기 충족성의 반경을 벗어나면서도 전적인 무(無)로 축소되지도 않는 궤적을 지닌다. 이처럼 책임과 죽음과 관련된 복잡하고 다층적인 양상을 탐구하기 위해, 데리다는 파토치카,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및 레비나스의 독특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포괄하고 아우르는 방식에 집중한다. 『죽음의 선물』에서 데리다는 책임에 대한 이들 네 명의 구별되는 입장을 포괄하면서도 이들의 범위, 독특성, 급진성, 심지어 독창성까지도 한정 짖는다. 다시 말해, 죽음을 내어주는 다양한 방식과 죽음을 취하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데리다는 책임에 대한 입장들의 차이, 특히 기독교, 플라톤주의, 의도적인 탈기독교화, 유대주의과 관련하여 각 입장 간의 상호 침투 및 상호 논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경제론을 발전시킨다. 죽음과 책임의 아포리아가 지닌 구조와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본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도출한다. (1) 타자의 무관계성. 타자가 나에게 비밀로 남아있고 침묵하며 탈관계의 상태에 있고 현존을 벗어나 있을 때, 역설적으로 타자는 나에게 타자로서 존재하며 나는 타자를 향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 (2) 타자의 관계성. 무한의 타자가 자신의 타자가 될 때, 즉 스스로 유한하게 되고 스스로를 명령의 형태로 구현할 때, 나 또한 나의 타자되어 타자를 향해 열린다. (3) 타자의 무관계성의 관계성. 타자는 나의 외부에서 책임의 초월적 근거로서 존재하며, 동시에 나의 내부에 나의 타자로 들어와 있다. 흔적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타자는 나의 고립을 막으며 타자를 향해 열려 있게 한다. 이 열림에서 나의 책임/무책임이 시작된다. 이처럼 데리다의 윤리학은 타자와 나와의 무관계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재형상하는 중요한 순간을 보여주며, 이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데리다는 죽음에 대해 하이데거와 블랑쇼의 모순되고 상반된 관점을 함께 사유하려 한다. 이는 죽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뒤얽힘과 상호 침투(contamination)을 논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중 구속(double bind)는 『죽음의 선물』을 통해 하이데거, 블랑쇼, 레비나스, 그리고 파토치카 사유 간의 차이와 가까움을 드러내는 기준이 되며 데리다 사유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핵심이 된다.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인 죽음의 아포리아는 이제 책임의 아포리아를 보다 극적으로 표출한다. 죽음은 나에게 대체할 수 없는 독특성을 선물하기에 다른 이가 아닌 나의 윤리적 책임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죽음은 익명성, 자기 잊음과 지움을 가져오기에 나의 충족성에서 벗어나 타자를 향해 열리며 타자의 책임을 지닌다. 이 과정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비판했던 존재-신학적인 전제에서 벗어나면서도 동시에 최고의 존재자를 정립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는데, 궁극적으로는 절대적 타자를 실체나 대상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찾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