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성과물 유형별 검색 > 보고서 상세정보

보고서 상세정보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
세조대 조선과 명(明)의 건주여진(建州女眞) 협공에 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세조대 조선과 명& #40;明& #41;의 건주여진& #40;建州女眞& #41; 협공에 대한 연구 | 2012 년 | 한성주(강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2S1A5B5A07037001
선정년도 2012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4년 01월 23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4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세조대(1467년) 조선(朝鮮)과 명(明)의 건주여진(建州女眞) 협공은 양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동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여진(女眞)을 정벌하였지만, 명은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다. 조선은 명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독자적인 건주위(建州衛) 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서 실행할 수 없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병력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었는데, 마침 명으로부터 건주위를 함께 정벌하자는 요청이 있게 되었다.
    명의 건주의 정벌은 명의 조공 제한으로 비롯되었다고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이에 더해 명의 조공 제한이 통교위반자인 ‘위사(僞使)’를 발생시켰고, ‘위사’로 인해 정상적인 통교가 방해된 사람들[진사(眞使)]이 변경을 침범하게 된 상황을 고찰해 보았다. 1467년 명의 건주위 정벌 배경에는 이러한 측면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군세를 감안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조선군이 건주본위(建州本衛)의 수장 이만주(李滿住)・이고납합(李古納哈)・이두리(李豆里) 등을 죽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정벌 루트가 파저강(婆猪江)과 올미부(兀彌府) 2개로 단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주본위의 수장 이만주의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인 전과를 올렸음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은 여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죽거나 사로잡힌 총 1,200여 명(참살 924명, 포로 276명)은 당시 건주삼위(建州三衛) 인구의 약 5~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산채・가옥・농경지가 불타거나 파괴되고 우마(牛馬)가 죽거나 약탈된 것뿐만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인 피로인 1,172명을 빼앗기면서 경제적 타격도 심각하였다.
    이후 명은 건주인들의 보복 침입에 대비하여 요동변장(遼東邊牆)의 동단부분을 쌓기 시작하였고, 여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벌 후 2~3년 뒤에는 건주삼위를 부활시켰으며,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재개하였다. 조선도 평안도를 중도(中道)・서도(西道)・동도(東道)로 나누어 방어하게 하는 한편 명과 건주삼위의 관계가 부활됨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명의 조공제한 및 교역소 설치라는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미 농경화가 진행된 여진 사회의 발전과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결국 건주삼위의 요동 침입은 다시 격화되었으며,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협공의 기억과 성공은 12년 만인 1479년에 또다시 재현되었다.
  • 영문
  • The JianzhouJurchen pincer movement was the first concerted operation by Joseon and Ming China. Joseon had conquered Jurchens several times, but for Ming China this was the first subjugation of Jurchens. Joseon had been planning an independent conquest of the JianzhouCommandery area because of the Jurchens’ attack on Uiju before the request from Ming, but Yi Siae’s rebellion had prevented Joseon from conquering the JianzhouCommandery area. However, Joseon sent troops to Pyeongan Province as soon as the rebellion was suppressed. In that period,Ming sought to conquer the JianzhouCommandery together with Joseon.
    According to earlier research, Ming Chinasought an attack on the JianzhouJurchens so to restrict these Jurchens’presentation of tribute. This paper also argues that the restriction oftribute contributed to the creation of “fake envoys.” Ming’s restrictions on tribute accelerated the outbreak and expansion of “fake envoys” which used false names for delivering tribute. Problems occurred as “fake envoys” mingled with the “real envoys” in the conduct of real diplomacy. After limiting tribute, the three commanderies in Jianzhou pretended to be the MaolianCommandery and received gifts for their tribute. When the real MaolianCommandery people presented tribute, they were forbidden to do so. As a result, Ming’srestrictions onJurchentribute generated “fake envoys,” and those who were prevented from normal diplomacy due to “fake envoys” were brought to violate borders. Ming’s conquest of the JianzhouCommandery in 1467 should also be considered in these contexts.
    Joseon’s army during the 1467 attack totaled 10,000 men, and it killed 286 Jurchens, captured 23, and recaptured seven prisoners of war. On the other hand, the Ming army totaled 50,000 men, and it killed 638 Jurchens, captured 253, and recaptured 1,165 prisoners of war. Ming’s accomplishments seemoutstanding compared to those of Joseon, but the difference in military power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Joseon’s army killed the heads of the principal commanders of Jianzhou, such as Yi Manju, Yi Gonaphap, and Yi Duri. Joseon’s conquest routes were not only limited to two, the Bazhu River and Wumi-fu, but the army also achieved effective accomplishments by accurately finding where the head of the GunjiCommandery lived.
    Joseon and Ming JianzhouCommandery pincer attack brought great harm to Jurchens. Joseon and Ming killed and captured about 1,200 people, (924 killed, 276 captured) which was about 5-10% of the total population of the three commanderies of Gunji. Also, economic damage was severe asfarms, houses, and mountains were burned and destroyed. Horses, cows, and 1,172 captives were used for labor. Jurchens living in Jianzhou received enormous damage. With the loss of the will to fight, the three commanders of Gunji were not able to concentrate on rehabilitation and were unable to plan revenge.
    Ming China prepared for the response from Jianzhou by building the eastern part of the Liaodong defense wall. Ming also accepted requests from Jurchens and restored the three commanderies of Jianzhou in two or three years after the conquest, reviving the traditional tribute system. Joseon also divided Pyeongan Province into three parts, middle, west, and east, for defense. As the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the three Jianzhoucommanderies was revived, Joseon resumed its relationship with the three Jianzhoucommanderies, too. However, without changes in the basic structure of Ming China’s restrictionof tribute and installation of trading posts, it was impossible to fulfill the Jurchen society’s progress and urge development toward agriculture that had been already started. Eventually, the three Jianzhoucommanderies’ invasion of Liaodong intensified, and the victory of the Ming-Joseon pincer attack in 1467 was reproduced 12 years later, in 1479.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세조대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협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연구 내용은 크게 조선의 독자적 정벌 계획, 명의 협공 요청과 조선의 출병, 여진 협공의 결과와 영향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연구 결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조대(1467년) 조선(朝鮮)과 명(明)의 건주여진(建州女眞) 협공은 양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동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여진(女眞)을 정벌하였지만, 명은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다. 조선은 명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독자적인 건주위(建州衛) 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서 실행할 수 없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병력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었는데, 마침 명으로부터 건주위를 함께 정벌하자는 요청이 있게 되었다.
    명의 건주의 정벌은 명의 조공 제한으로 비롯되었다고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이에 더해 명의 조공 제한이 통교위반자인 ‘위사(僞使)’를 발생시켰고, ‘위사’로 인해 정상적인 통교가 방해된 사람들[진사(眞使)]이 변경을 침범하게 된 상황을 고찰해 보았다. 1467년 명의 건주위 정벌 배경에는 이러한 측면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군세를 감안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조선군이 건주본위(建州本衛)의 수장 이만주(李滿住)・이고납합(李古納哈)・이두리(李豆里) 등을 죽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정벌 루트가 파저강(婆猪江)과 올미부(兀彌府) 2개로 단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주본위의 수장 이만주의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인 전과를 올렸음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은 여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죽거나 사로잡힌 총 1,200여 명(참살 924명, 포로 276명)은 당시 건주삼위(建州三衛) 인구의 약 5~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산채・가옥・농경지가 불타거나 파괴되고 우마(牛馬)가 죽거나 약탈된 것뿐만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인 피로인 1,172명을 빼앗기면서 경제적 타격도 심각하였다.
    이후 명은 건주인들의 보복 침입에 대비하여 요동변장(遼東邊牆)의 동단부분을 쌓기 시작하였고, 여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벌 후 2~3년 뒤에는 건주삼위를 부활시켰으며,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재개하였다. 조선도 평안도를 중도(中道)・서도(西道)・동도(東道)로 나누어 방어하게 하는 한편 명과 건주삼위의 관계가 부활됨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명의 조공제한 및 교역소 설치라는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미 농경화가 진행된 여진 사회의 발전과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결국 건주삼위의 요동 침입은 다시 격화되었으며,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협공의 기억과 성공은 12년 만인 1479년에 또다시 재현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세조대 실시된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양국 사이에서 발생한 최초의 협동 군사작전(軍事作戰)이기도 하였지만, 조선군(朝鮮軍)의 활약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건주위의 이만주 세력을 궤멸시킨 일대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부분이 있어 왔다. 또 명의 협공 요청이 있기 전에 이미 조선은 건주위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석도 시도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에 대한 영향과 결과를 간략하게라도 살펴보았기 때문에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관계 및 여진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전근대(前近代) 요동 및 만주 지역에 대한 인식을 재고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후 요동지역은 여진 세력의 성장에 따라 동아시아 변동(變動)의 중심지(中心地)가 되었는데, 세조대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이후의 여진 세력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요동 및 만주 지역을 둘러싼 한중관계(韓中關係)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과 명은 초기부터 이 지역의 여진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에 걸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여진의 향배(向背)를 둘러싸고 조선과 명이 각각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직접적인 협력이라 할 수 있는 여진 협공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이 지역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관계와 인식을 살펴 볼 수 있은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 문제는 조선과 명의 일원적(一元的) 관계사(關係史)에서 탈피하여, 조선과 명, 그리고 여진과의 삼각관계, 즉 복합적(複合的) 관계를 규명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여진은 조선과 명나라 양측 어디에도 속한 존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학자들은 여진 세력이 중국에 속해 있었다는 전제하에 연구를 진행하고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은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근대 대외관계사 연구 및 한중관계 연구 활성화에 일조하는 동시에 조선시대 여진관계 연구를 심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 이해 및 왜곡에 대한 이론적․학술적 기반을 조성하여 중국의 역사 연구에 대한 이론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고 동북아시아에서 균형 잡히고 올바른 역사성 정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세조(世祖), 1467년, 조선(朝鮮), 명(明), 건주위(建州衛), 여진(女眞), 정벌(征伐), 협공(挾攻), 조공 제한(朝貢 制限), ‘위사(僞使)’
  • 이 보고서에 대한 디지털 콘텐츠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 본 자료는 원작자를 표시해야 하며 영리목적의 저작물 이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또한 저작물의 변경 또는 2차 저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