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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자료로 살펴본 백제 지역사회의 성장과 변동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고학 자료로 살펴본 백제 지역사회의 성장과 변동 | 201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낙중(전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4S1A5A8014071
선정년도 201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09월 27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해남지역에는 지형과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해남반도를 중심으로 4개 정도의 기초공동체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상정된다. 영산강유역에서 제형분이 유행하던 3∼4세기의 해남지역은 주거지 형태 등에서 영산강유역과 상통하는 면이 강하지만 전형전용옹관이 발전하지 않았고 분형도 제형으로 수렴되는 영산강유역과 달리 방형계가 유지되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 4세기에도 승석문호나 평저직구호와 같이 가야 및 백제와 교류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교류의 가장 큰 요인은 철정과 같은 철기의 확보와 유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지역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은 백제와 왜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5세기 이후이다. 이와 관련하여 왜계 석실이 해남 외도 등에 먼저 등장하며 이에 영향을 받은 석실이 현지화되고 나중에는 전방후원형고분과 왜계 횡혈식석실이 지역마다 축조되는데, 북일면 일대가 가장 뚜렷한 양상을 보인다. 게다가 만의총과 같이 특정 지역의 묘제에서 조형을 찾기 어려운 융합형의 묘제도 등장한다. 왜계 요소가 눈에 띄지만 부장품 등에서는 백제, 가야, 왜 및 신라 등과 다원적으로 교류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해남지역이 이러한 정치체에게 중요한 교섭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원적인 양상은 고분의 축조 주체를 특정하기 어렵게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현지세력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사비기 이후에는 전형적인 사비유형 석실이 축조되지 않고 있어 이 지역 집단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백제가 6세기 전엽 섬진강을 통한 대왜 교섭 루트를 확보한 것, 항해술의 발달로 연안항로만이 아니라 좀 더 먼 바다의 항로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해남지역에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체가 존재하였는지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해남반도의 역사적 실체를 고고학적으로는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기가 분명히 밝혀진 취락, 공공시설, 고분, 방어시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영산강유역권에 포함되지만 나름대로 독자성이 보이는 고대 고창 지역 정치체의 성장과 변동 과정을 고고학적 자료, 그 중에서도 고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광역공동체로서의 고창 지역에는 최소한 5개의 지역공동체가 존재한다. 3세기 중엽 이후 4세기까지는 제형분이 전반적으로 분포하는데, 취락과 대부분 상응한다. 이 시기에는 영산강유역의 제형분 축조집단과 크게 다른 점이 없으나 무기류, 구슬류의 부장에서 좀 더 우위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중서부지역에서 유행한 주구토광묘가 이 지역에서 일부 보이는 점과 같이 중서부와 서남부지역을 연결하는 지리적인 이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후엽~5세기 전반에는 제형분이 유지되거나 단독의 토광묘, 옹관묘가 혼재하는 등 여러 모습을 보인다. 취락은 봉산리 유적과 같이 충적지로 이동되고 이전에 취락이었던 곳에 무덤이 조영된 경우가 많다.
    5세기 중·후엽 이후 지역공동체 단위로 특정집단이 성장하며 전방후원형고분, 방대형고분, 원분 등 대형화된 고분을 축조한다. 전통적인 중심지인 고창천 유역 이외에도 해안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포구 가까운 곳에서 백제, 왜 등 여러 세력과의 교섭에 참여하며 성장한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곳의 묘제는 봉덕리 등 전통적인 중심지와는 양상이 다르다.
    5세기 중·후엽∼6세기 전엽에 이르는 시기에 고창 지역의 봉덕리 고분군 조영집단은 분구 규모나 부장품으로 볼 때 영산강유역권에서 나주 복암리 고분군, 해남 장고산 고분 조영집단보다 더 유력한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산강유역권에서 고총을 축조한 北限界의 유력세력이다. 5∼6세기 고창지역 세력의 성장은 백제왕권, 일본열도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교섭을 중개하거나 해로를 장악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산강유역세력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넓은 의미에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지만 고창계토기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성을 보이기도 한다.
    백제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은 영산강유역과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되는데, 백제식 횡혈식석실은 주로 산사면에 축조된다.
    한편 백제의 성장과 함께 연안항로뿐만 아니라 내륙 교통로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 왕권에게 섬진강유역은 남해안으로 바로 빠질 수 있는 중요한 루트였다. 그런데 섬진강유역은 대가야와 백제라는 커다란 세력이 부딪치는 곳이었다. 남원지역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남강의 상류의 운봉고원 일대에는 대가야계 고총이 집중적으로 조영되고, 섬진강유역의 남원시 서부 일대에는 일부 가야계 문물의 흔적이 보이지만 6세기 이후 백제화 과정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 지역의 성장 과정을 대가야와 백제만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다. 최근 토착세력의 분구묘도 조사되고 있으므로 토착세력의 성장 기반, 백제 왕권과 대가야와 관계를 이용한 현지 세력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춰 분석할 필요도 있다.
  • 영문
  • This study examined the growth of Haenam region on the basis of archaeological materials around the 3∼6th century. Haenam area had been one of hubs of the coastal route leading to Japan from China in the Proto-Three Kingdoms of Korea already.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of Haenam region is similar to those of Yeongsangang river basin in the 3∼4th century. But in Haenam, the distinctive archaeological materials of the Yeongsangang river basin such as big jar burial and tombs had not very developed. Haenam region interacted with Baekje and Gaya at 4th century. The biggest factor of such exchanges is estimated to the gain and distribution of iron production, such as iron ingot.
    Haenam region began to develop in earnest after the fifth century when the exchange between Wa(倭) and Baekje had become active. In connection with this, Wa type tombs first appeared at the islands of the south coast. This affected the localization of this stone chamber. Later, keyhole-shaped tombs and Wa type stone chamber had been constructed for each region. In addition, the tombs that feature of many regions is mixed appeared. So it is difficult to find its origin. Wa type elements are noticeable, but grave goods is showing the pluralistic exchange with Baekje(百濟), Gaya, Wa and Silla. We can guess that the Haenam region had become the subject of important negotiations to these polities. These pluralistic aspect makes it difficult to identify the construction main body of the mounds. But who constructed such tombs is probably the leading groups in that region.
    The typical stone chamber of Sabi(泗沘) style had not constructed at Haenam in Sabi period. This suggests that the political status of Haenam region was not very high in Sabi period. This relates to the change in the trade routes of early 6th century. In other words, it relates to the development of the inland routes and deep-sea routes.
    It is a very difficult problem to identify specifically whether any polities had existed in Haenan area. In order to examine the historical reality of the Haenam peninsula, a group of archaeological settlement, public facilities, tombs, defense establishment etc. should be considered comprehensively.
    To the next, I looked at the growth and change process of Gochang(高敞) regional polities centering on archaeological data, especially tombs. There are at least five communities in the Gochang area. From the mid-3rd century through the 4th century, trapezoidal tombs had been distributed throughout the area. The village of this period is also well known. It was discarded after mid and late 4th century and burial mounds was built there. In the 3rd and 4th centuries, the tombs was not much different from that of the Yeongsan River basin, but it is more dominant in weapons and beads. This phenomenon reflects the geographical feature as a link between the Midwest and the Southwest.
    In late 4th century to early 5th century, trapezoidal tombs had been built continuously, and individual wooden coffin or jar coffins had been used also. The village was moved to an alluvial area and many graves were made where it was formerly a village.
    After the middle and late 5th century, a specific group grows in each community unit and constructs large-sized tombs such as key-hole shaped tombs. In addition to the traditional center of the Gochang River basin, this phenomenon is prominent in the area where it is located close to the port that leads from the coast to the inland and participated in negotiations with Baekje and Wa(倭). In these places, the aspect of tombs was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center such as Bongdeokri(鳳德里).
    From the end of the 5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the Bongdeokri tomb group in Gochang area was considered to be more influential than the Naju Bogamni and Haenam Janggosan tomb group of the Yeongsan River basin in the Honam area. It is the dominant force of the Northern Limit, which has built a large tombs. In this way, the Gochang Bongdeokri tombs show that the Gochang area polities of the 5th and 6th centuries have developed in close relationship with the Baekje Kingdom, the Japanese Archipelago, and the Yeongsan River basin. The background of growth will be related to mediation of negotiation and seizure of the sea. In addition, Gochang region is distinguished by its specific pottery style from the Yeongsan River basin.
    Similar to the Yeongsan River basin, the Baekje influence directly affected in mid-6th century. The Baekje-style stone chamber had been built on a mountain slope.
    On the other hand, along with the growth of Baekje, it was required to develop not only coastal routet but also inland traffic. The Seomjin River basin was an important route to the south coast for the Baekje Kingdom, which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Wa. By the way, the Seomjin River basin was where big forces such as Daegaya and Baekje are encountered. Namwon area shows this situation well. In the Unbong Plateau in the upper part of the Nam River, the Daegaya big tombs were concentrated. On the other hand, the western part of Namwon city in the Seomjin River basin shows some trace of Daegaya’s cultural assets, but the Baekje's influence expansion is clearly visible since the 6th century. It is difficult to approach the reality of this region in terms of Daegaya and Baekje. Recently, the burials of the indigenous forces are being investigated.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focus on the growth base of the indigenous forces, the growth process of the local forces us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Kingdom and Daegaya.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 고대사 연구는 오랫동안 문헌사학이 중심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문헌이나 금석문 등 연구의 기본 자료가 매우 적어 문헌사학만으로 고대사회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는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물질자료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고고학이 성장하여 문헌사학으로 그려진 역사상을 뒷받침하거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문헌사학에서 구축한 古代史像을 수정하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가 영산강유역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 및 연구 성과일 것이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대에 전남지역까지 영역으로 확보하여 지배하였다는 문헌사학계의 정설을 재검토하게 하는 고분 자료 등이 수없이 조사되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백제 왕권과 지역사회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조사 및 연구 성과는 고대국가 또는 고대사회에 대한 문헌사학의 연구가 주로 왕권 중심, 정치 중심이었던 데서 비롯한 제한된 고대사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문헌기록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는 거의 고고학적 자료가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고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마찬가지였겠으나 중국과 일본열도를 이어주며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백제의 경우,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지역사회마다 왕권과의 관계 그리고 주변 국가와의 관계 등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장 나중에 백제에 편입되고 고고학적 자료로도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대표적인 지역사회로 연구되고 있는 곳이 영산강유역의 정치체들이다. 그런데 ‘영산강유역권’으로 범칭되는 지역 가운데 그동안은 옹관분으로 대표되는 나주, 영암, 광주 일대 등 영산강 본류역의 고고학적 자료가 주로 다루어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역 이외에도 6세기 전반까지 강력한 지역 정치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高塚 고분이 축조된 지역으로 해남과 고창이 있다. 해남과 고창 지역은 연안항로를 통한 해양교류의 주요 거점이다. 연안항로는 고대사회의 교통에서 육로보다 더 중요한 길이었다. 특히 5∼6세기에 이 지역에서 백제는 물론이고 가야, 신라 및 왜 등 다양한 기원의 유물들이 보이는 것은 그러한 연안항로를 통한 교류와 정치적인 교섭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그것이 성장 기반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해남과 고창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는 영산강 본류역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상당히 많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 등의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에 따라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매장시설인 대형옹관과는 다른 형태와 발전 과정을 보인다거나 새로운 묘제에 보이는 가야나 왜 묘제의 영향 등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백제와는 물론이고 영산강유역 중핵지역과도 다른 양상을 보이는 해남지역의 역사적 실체를 중국이나 일본 문헌에 보이는 新彌諸國이나 忱彌多禮 등으로 보는 문헌사학계의 견해가 있으나 단정하기 어렵다. 마한 소국 중 하나인 牟盧卑離國으로 비정되는 고창지역도 마찬가지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해 국 단위 정치체로 구별할 수 있는지 다른 지역 정치체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해당 지역의 자료를 자세히 검토하고 분석해야 실체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백제의 성장과 함께 연안항로뿐만 아니라 내륙 교통로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 왕권에게 섬진강유역은 남해안으로 바로 빠질 수 있는 중요한 루트였다. 그런데 섬진강유역은 대가야와 백제라는 커다란 세력이 부딪치는 곳이었다. 남원지역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데, 남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운봉고원 일대에는 대가야계 고총이 집중적으로 조영되고, 섬진강유역의 남원시 서부 일대에는 일부 가야계 문물의 흔적이 보이지만 6세기 이후 백제화 과정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 지역의 성장 과정을 대가야와 백제만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다. 최근 토착세력의 분구묘도 조사되고 있으므로 토착세력의 성장 기반, 백제 왕권과 대가야와 관계를 이용한 현지 세력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춰 분석할 필요도 있다.
    이처럼 해남, 고창 및 남원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지역사회 내부의 발전과정, 백제의 지역 지배 과정, 이와 관련된 한반도 및 일본열도 내 여러 정치체의 동향을 살피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번 연구 결과는 백제의 지역 지배 과정을 대표적인 지역사회 사례를 대상으로 철저히 분석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며, 지역사회가 능동적으로 역사적 동향에 대처하며 성장해 간 모습을 통해 왕권 중심적 사고방식을 탈피하여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관점도 제시할 것이다. 이처럼 고대사회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위해 연구 결과를 확장하는 후속 연구의 기초로 삼고 강연 등에 활용하고자 한다.
    한편 연구 결과는 학교 전공 강의에 활용하여 역사고고학 연구에 필요한 인력 양성의 자양분이 되도록 할 것이다.
  • 색인어
  • 해남, 취락, 고분, 부장품, 정치체, 백제, 고창, 남원,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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