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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과 아일랜드 식민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올리버 크롬웰& #40;Oliver Cromwell& #41;과 아일랜드 식민 | 201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중락(경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5S1A5A2A01011334
선정년도 201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10월 26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크롬웰의 아일랜드 식민과정, 즉 계획에서부터 식민 그리고 식민의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크롬웰 시대 아일랜드 식민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크롬웰이나 이후 총독들 개개인의 정책이나 문제보다는 반란 발발이후부터 진행되어온 정책과 법제화가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내전 중 아일랜드 왕당파 지주들의 땅에 대한 몰수와 토지의 재분배에 대한 원칙을 법제화하였다. 크롬웰시대 식민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642년 아일랜드 모험투자자법(Adventurers’ Act)과 그 이후의 상황, 1652년의 정주법(the Settlement Act), 그리고 1656년의 다운조사(Down Survey)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642년 아일랜드 모험투자자법의 공식명칭은 “아일랜드의 반란군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법”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누구든지 200파운드를 정부에 빌려주면 정부는 반란군의 땅을 몰수해 1,000acres(4km²)를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잉글랜드 정부로서는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모집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법이 모험투자자법이라 불린 이유는 당시 정부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가 몰수 분배하기로 한 땅은 총 250만 acres였으며 이는 아일랜드 전체 토지의 10분의 1이 넘는 크기였다. 이 법으로 인해 잉글랜드 정부는 1,281명의 투자자로부터 306,718파운드를 모금할 수 있었다.
    반란이 완전 진압된 1652년 8월에 통과된 아일랜드 정주법은 아일랜드 반란 기간 도중 고통 받았던 얼스터 신교도들, 군인들에게 일종의 보상과 모험투자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당시 잉글랜드의 잔부의회(Rump Parliament)는 얼스터 신교도들에게 강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정부가 차용한 빚에 대해서 어떻게 보상할 지 그리고 진압 마무리 단계에서 반란군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의 제정이었다. 이 정주법의 핵심은 아일랜드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주법은 1652년 이전에 항복한다면 연맹군의 경우 사면대상이 되지만 이후 포로가 된다면 사형에 해당된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1641년 반란에 가담한 이들은 항복과 관계없이 사면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또한 정주법은 적극적 가담자뿐 아니라 방관자 역시 범죄자로 간주하였다. 그 밖의 반란군 지휘자들은 토지의 3분의 2를 몰수당해야만 했고, 진압에서 결정적인 기간인 1649년 10월부터 1650년 3월 사이에 적극적으로 진압군에 협조하지 않은 가톨릭 지주들도 재산의 3분의 1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척박한 코나트(Connacht) 또는 클레어(Clare) 지역의 땅이 주는 것이었다. 소위 “죽음이냐, 코나트냐”(to Hell or to Connacht)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을 격리시킴으로써 후일 발생할 지도 모르는 적대행위로부터 프로테스탄트 이주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토지의 몰수와 배분을 위해서는 우선 아일랜드의 정확한 토지조사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 아일랜드 원정군 군의관 총수였던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1623-1687)에 의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졌고, 그 조사는 다운조사(Down Survey)라 불린다. 이 조사에서 만들어진 지도는
    베로니(Barony) 지도와 교구(Parish) 지도로 구분되었고, 지도에 따라 1 : 7,290 또는 1 : 15,840 또는 1 : 31,680의 비율로 축소되어 책으로 만들어졌다. 다운조사의 총 지도 수는 1,430개에 달했고 그 중 216개는 베로니 지도로서 이는 클레어(Clare)와 골웨이(Galway) 카운티를 제외한 대부분 카운티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 지도는 87%의 정확도를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지도는 토지는 수입이 있는 것(profitable)과 수입이 없는 토지(non-profitable)로 구분되었고, 경작지와 초지, 산림, 산 등에 대한 표시를 하였다. 물론 강과 다리도 포함되었다. 1641년 반란의 시작시점에 토지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종교까지도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1652년 정주법은 그다지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정주법이 엄격히 적용되었다면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년 동안 대법정(High Court)이 처형한 수는 불과 54명뿐이었다. 반란에 책임이 있는 가톨릭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코나트와 클레어로로 이주시킨다는 원칙도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다. 가톨릭 지주들은 코나트의 토지를 얻기 위해 특별위원회에 등록을 하도록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톨릭 소작인들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잉글랜드 투자자들과 군인들은 잉글랜드가 신교도 소작인으로 사용해야한다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을 아일랜드에 식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할당받은 땅을 매도하고 잉글랜드로 되돌아갔다. 1654년 구잉글랜드인들은 올리버 크롬웰에게 일반사면법을 통과시키도록 요구하였고, 크롬웰은 뮌스터의 신교도에게 적용되는 사면령을 발표하였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식민은 자의적 정책이 아니라 몇 가지 주요법안과 현실타협의 결과였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onsequences of Cromwell's Irish plantation, from its planning to the plantation process and its results. Understanding of the Cromwellian plantation of Ireland is a matter of understanding the policies and legislations that have been made since the outbreak of the rebellion, rather than the problems of Cromwell himself and the individual governors after. The Parliament of England enacted the principle of confiscation of land and the redistribution of land during the civil war. Above all, an understanding of the Adventurers' Act of 1642 and the situations after it, the Settlement Act of 1652, and the Down Survey of 1656 should precede all other elements. The content of the Adventures Act of 1642 was that anyone who lent 200 pounds to the government would get a land of 1,000 acres (4 km²) confiscated from the rebels after the war. It was a way for the English government to secure the financial resources needed to recruit troops to suppress the Irish rebellion. At that time, the government had decided to distribute a total of 2.5 million acres, which was more than a tenth of the total land area of ​​Ireland. The law allowed the Government of England to raise £ 306,718 from 1,281 investors.
      The Act of Settlement passed in August 1652, when the rebellion was completely suppressed, was passed to distribute land to the Adventurers, the Ulster Protestants and soldiers who suffered during the Irish rebellion. Most important of all, it was the enactment of specific laws on how the government would compensate for the debts borrowed and how to deal with the rebel leaders in the end of the repression. The essence of this settlement law was the execution of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Irish rebellion and confiscation of property. The rebel commanders had to be confiscated two-thirds of their land, and the Catholic landowners were given by the land of Connacht or Clare instead. There was only a choice of so-called "to Hell or Connacht".
      The Act of Settlement of 1652, however, was not strictly observed. If the settlement law was strictly applied, about 100,000 people had to lose their lives. The High Court executed only 54 people for two years. The principle of moving to Connaught and Clair are not strictly observed. Most of the English investors and soldiers did not follow the principle of bringing the English Protestant tenants. In 1654, the Old English demanded Oliver Cromwell to pass the general amnesty law, and Cromwell announced an amnesty for the Protestant of Munster.
      In order to confiscate and distribute the land, a precise land survey of Ireland was necessary. To this end, William Petty (1623-1687) conducted a very precise survey, which is called Down Survey. The map he made is confirmed to have an accuracy of 87%. The land allocation was done accordingly, but it was far from the original plan. The Irish plantation in the Cromwellian period was not an arbitrary policy, but rather a result of several major legislations and compromises with reali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크롬웰의 아일랜드 식민과정, 즉 계획에서부터 식민 그리고 식민의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크롬웰 시대 아일랜드 식민에 대한 이해는 크롬웰이나 이후 총독들의 개개인의 문제보다는 반란 발발이후부터 진행되어온 정책과 법제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내전 중 아일랜드 왕당파 지주들의 땅에 대한 몰수와 토지의 재분배에 대한 원칙을 법제화하였다. 무엇보다도 1642년 아일랜드 모험투자자법(Adventurers’ Act)과 그 이후의 상황, 1652년의 정주법(the Settlement Act), 그리고 1656년의 다운조사(Down Survey)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642년 아일랜드 모험투자자법의 내용은 누구든지 200파운드를 정부에 빌려주면 정부는 반란군의 땅을 몰수해 1,000acres(4km²)를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잉글랜드 정부로서는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모집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당시 정부가 몰수 분배하기로 한 땅은 총 250만 acres였으며 이는 아일랜드 전체 토지의 10분의 1이 넘는 크기였다. 이 법으로 인해 잉글랜드 정부는 1,281명의 투자자로부터 306,718파운드를 모금할 수 있었다.
    반란이 완전 진압된 1652년 8월에 통과된 정주법은 아일랜드 반란 기간 도중 고통 받았던 얼스터 신교도들, 군인들에게 일종의 보상과 모험투자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정부가 차용한 빚에 대해서 어떻게 보상할 지 그리고 진압 마무리 단계에서 반란군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의 제정이었다. 이 정주법의 핵심은 아일랜드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이었다. 반란군 지휘자들은 토지의 3분의 2를 몰수당해야만 했고, 가톨릭 지주들은 척박한 코나트(Connacht) 또는 클레어(Clare) 지역의 땅이 주는 것이었다. 소위 “죽음이냐, 코나트냐”(to Hell or to Connacht)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었다.
    1652년 정주법은 그다지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정주법이 엄격히 적용되었다면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년 동안 대법정(High Court)이 처형한 수는 불과 54명뿐이었다. 코나트와 클레어로로 이주시킨다는 원칙도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잉글랜드 투자자들과 군인들은 잉글랜드 출신 신교도 소작인들을 데려와야하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1654년 구 잉글랜드인들은 올리버 크롬웰에게 일반사면법을 통과시키도록 요구하였고, 크롬웰은 뮌스터의 신교도에게 적용되는 사면령을 발표하였다.
    토지의 몰수와 배분을 위해서는 우선 아일랜드의 정확한 토지조사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1623-1687)에 의해 매우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조사는 다운조사(Down Survey)라 불린다. 그가 만든 지도는 87%의 정확도를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토지 분배는 이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원래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식민은 자의적 정책이 아니라 몇 가지 주요법안과 현실타협의 결과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는 연구계획서에서 밝혔듯이 순수한 역사적 연구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기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약간의 학문적,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관련분야 국내연구의 자극을 위한 학술지 게재
    - 인접학문과 교류- 본 연구의 수행과정 중에 다운조사(the Down Survey)에서 아일랜드 전역에 대한 지리적 조사와 지도가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지리학에서도 매우 소중한 정보가 될 것으로 믿는다. 이에 대한 협력연구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교육 및 연구 자료의 축적- 연구과정에서 얻어진 자료는 이후 대학원생들 세미나에서 적극 활용될 것이다.
    - 대중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 소개와 역사소비자 창출 - 크롬웰의 아일랜드 식민은 대중적 흥미에 부합하는 주제이다. 이 연구는 연대기적 접근을 하고 있어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회가 된다면 이 주제를 중심으로 대중 강연도 개최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올리버 크롬웰, 아일랜드 반란, 킬케니 연맹(1642-1649), 아일랜드 모험투자자법(1642), 정주법(1652), 다운조사(1656), 1657 정주법, 코나트, 클레어, 구잉글랜드인, 윌리엄 페티(1623-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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