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은 다양한 환경적,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개념의 형성과정과 범위 등에서 차이를 갖고 있다. 특히 신론을 고려할 때, 복음서의 신(하나님) 개념과 『중용』의 신(천天) 개념은 발생학적인 측면과 어원적인 측면에서 다르다. 전혀 다른 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것 ...
동양과 서양은 다양한 환경적,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개념의 형성과정과 범위 등에서 차이를 갖고 있다. 특히 신론을 고려할 때, 복음서의 신(하나님) 개념과 『중용』의 신(천天) 개념은 발생학적인 측면과 어원적인 측면에서 다르다. 전혀 다른 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두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탁사 최병헌은 유가성현들이 하늘과 상제를 분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 하늘은 천天이며 상제上帝로서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다. 유교에서 하늘은 인격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하늘은 “그 본 이름은 상제요, 시공적 제한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지니며, 우주의 운행 법칙이요, 진실성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 태극(太極), 이(理), 도(道, 天道)로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논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공통적인 요소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복음서의 하나님과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천이 “각 인간들의 본성(性)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점, 둘째 … 각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존재론적, 본질적 가능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셋째, 이 두 세계관은 인간 본질에 관련된 문제를 하나님 혹은 하늘과의 상응관계 안에서 이해한다. 복음서에서 인간은 임마누엘(마 1:23)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늘의 명을 비춰주는 유일한 존재다. 하늘이치를 따라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천명天命의 진정한 수행자가 인간이다. 이로 보건대 복음서와 『중용』은 인간을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 혹은 하늘과의 상응관계에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용中庸인가? 중용은 신/천과 인간의 관계를 언술하는 대표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은 유교의 핵심 개념이며, 실천에 관련한 근본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중용에 관련된 핵심 개념인 성誠은 실천의지의 진실함을 제공한다. 중용과 성誠은 『중용』에 집중적으로 제시되었다. 중용의 핵심은 천天과 인人에 관한 것인데, 『중용』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천명이며, 천명의 중심은 인간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본 연구는 『중용』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복음서 해석에 사용하고자 한다. 요컨대 『중용』은 완결된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유교적 기독교인인 이벽은 이 문헌을 “해석 체계가 필요없는 ‘도의 본말(中庸爲道之本末也)’ 그 자체”로 평가한다. 이벽은 천명을 통하여 『중용』의 체계를 하늘과 땅의 수직 관계 안에서 이해하면서 지천知天과 상천지재上天之載를 중요한 틀로 소개한다. 전자는 하늘을 알아야 하는 인간의 인식과 실천이며, 후자는 천의 존재와 주재를 뜻한다. 그에게 『중용』은 서학의 하나님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문헌이며, “수양과 반성을 통한 자기 변화의 철학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경전”이다. 이벽에게 있어서, 『중용』은 신의 존재를 기원성에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일어난 인식과 실천에서 사유한 것이다. 왜 『중용』인가는 정약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도 『중용자잠』과 『중용강의보』를 통하여 세계를 규제하는 궁극적 존재를 인정하며, 신유학의 전통적인 리와 태극의 개념을 부정하며, 창조하고 주재하고 화육하는 인격적 상제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상제를 존재의 근본원리와 원인으로 간주한다.
복음서와 『중용』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시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동안 신의 계시성과 절대성은 기독교의 독특성과 우월성의 근거로 여겨졌지만, 이 초월성은 다원적 사회 안에 있는 기독교를 당대의 문화와 사회로부터 격리를 촉진시키거나 고착시켜 왔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기독교의 [종교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고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 이해에 대한 사고의 전환은 절대적 초월성에서 초월적 내재성으로의 전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상호텍스트성 안에서 신론에 대한 재고再考는 신의 존재적 시원성보다 기능적 시원성에 집중하게 한다.
심광섭은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구약성서는 복음의 이해를 열어주듯이 한국의 역사에서 복음은 유교의 경전의 의미를 밝혀주며, 유교의 경전은 복음의 이해를 열어준다. ... 구약 성서는 예수의 성서이듯이, 유교적 토착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유교경전은 그들의 성서다." 그리고 이 상호텍스트성은 초기 기독교 집단들이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한 신론을 어떻게 상황화 했는지, 상황화의 과정도 드러내 줄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대처 과정을 통하여 수립된 신학적 이해를 구체화시킬 수 있다. 복음서의 신론을 상호텍스트성 안에서 이해(구체화)하는 것은 예수 사건의 체험과 역사적 의미가 일차적으로 복음서 집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본질적으로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 사건에 근거하여 발생한 신 경험을 인자, 임마누엘, 보편적 실재성 그리고 성육신 등등으로 구조화 한 것이다. 인자, 임마누엘, 보편적 실재성 그리고 성육신으로 요약되는 복음서의 구조는 기독론적 근거와 함께 집단의 생존과 선교적 실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