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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61861&local_id=10086099
퇴계 이황 이전의 조선맹자학사 연구 -1392~1570년간 실록으로 살펴본 조선학자들의『맹자』해석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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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2015S1A5A8018586
Year(selected) 2015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17년 10월 30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17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연구요약문은 기 제출한 논문의 초록으로 대체합니다.
    정도전의 맹자학 : 이 연구는 정도전(1342~1398)의 맹자학에 대한 검토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이론적 기초를 놓은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조선경국전 등을 저술했다. 불씨잡변 , 심기리편 등의 글들도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는 맹자를 전거로 활용하면서 경술로서의 경서해석의 관점을 적극 개진한 곳이 적지 않다. 그\러한 자료들은 정도전이 맹자와 관련하여 어떠한 저작을 제출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맹자학을 살펴 볼 수 있는 요긴한 편린을 제공해준다.
    검토 결과 정도전의 맹자학은 강한 경세적 지향 속에서 벽이단론의 기초위에 마음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방향은 경전의 원의탐구 보다는 경세적 활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주춧돌을 놓고자 했던 정도전의 의식 속에 경전은 그 본의보다는 경세적 지향을 투영하는데 소용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역할에 대한 맹자의 발언을 원용하거나 관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君民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며 경세의 도구로서 학술의 효용을 극대화하려했다. 곧 경술적 의미에서의 수용이었다.
    벽이단의 논리로 제시되었던 기일원론의 세계관과 마음에 대한 이해는 주자학적이라기보다는 북송대 학자들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고, 마음에 대한 통찰은 洙泗學의 원류에 직입한 것으로 파악된다.정도전의 맹자해석에 대한 이해는 조선 건국 초기의 학술적 분위기, 구체적으로 경학의 구체적인 한 국면을 살피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정도전, 맹자학, 조선초기,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여말선초 맹자 이해의 주제와 관심사 : 유학사를 성리학의 개념이 아닌 경전 해석의 대상에 대한 문제의식, 곧 주제와 그러한 주제의식을 견인하는 관심사의 시야에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 분석대상을 구체화 할 수 있으며, 해석의 맥락을 좀 더 폭넓게 비교하고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울러 여말선초의 사상은 중간기나 과도 기라는 전형성의 입장에서 파악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텍스트의 논점을 바탕으로 그 실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맹자 의 몇 가지 핵심논점을 기초로 주제의식과 관심사의 입장에서 여말선초의 유학사를 파악하려했다.
    여말선초의 학자들에게 맹자 는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데 유용한 경전적 전거가 되었다. 맹자 는 토지문제에 대한 중요한 논의의 거점이 되었고, 仁政과 王道의 구현이라는 정치적인 이슈에서도 활용되었다.
    그들은 맹자의 주장을 근거로 때로 왕실권력이라는 절대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도 적극 활용했다. 그 방식은 대체로 맹자 텍스트의 원천적 성격을 충실하게 원용하는 것으로 그 적극성과 빈도는 조선 후기적 상황을 압도하는 것이다.
    심성수양론적인 주제는 이와 달리 성리학의 논리가 이미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그 층차는 조선 후기의 四端七情論이나 人物性同異論과 같이 마음에 대한 이해를 분석적으로 더 한층 진전시킨 분석적이고 세밀한 방식은 아니었다. 대체로 경전의 주장에 충실하고 어느 정도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벽이단의 관점에 있어서 여말 선초의 학자들은 맹자 자체의 벽이단적 성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 논리의 정밀함과 정합성 여부는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으나 불교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당대 상황을 고려하면 벽이단론이 지니는 사회사상으로
    서의 변혁논리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유학 내부의 벽이단론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조선 후기적 상황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맹자 를 논점으로 하는 주제와 관심사에 대한 분석은 여말선초의 유학사의 단면을 파악하는데 유효하고 전략적인 거점임을 확인할수 있다. 이러한 맹자 의 논점에 대한 주제인식과 관심사는 이후 조선에서주자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유학의 사상적 비중이 확장되면서 점차 다른 논점으로 전환된다. 이는 경학 연구를 통해 사상적 변화를 포착하는 방법적 시도로서의 유의미성이 될 터이다.
    주제어 : 여말선초, 맹자, 주제와 관심사, 정치경제론, 심성수양론, 벽이단론

    퇴계 이황 이전의 맹자학 연구-선초에서 성종대의 경우- 이 연구는 퇴계 이황 이전 조선전기 학자들의 맹자 이해의 면모를 검토하는 일련의 논문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선초에서 성종대를 검토했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되었고 1420년대에 이미 수입한 대전본 경서를 간행하였지만 맹자 주석서는 그로부터 150여년이나 뒤에 나타났다. 이는 고려말에 이미 원대 주자학을 수용하고, 세종 성종대에 상당한 수준의 성리서들이 제출된 현실에 비추어 이례적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孟子 註釋書의 탄생을 지연시킨 당대 조선의 학술적 환경을 몇 가지 논점으로 검토했다. 맹자학을 인식하는 선초 군주와 관료들의 인식이나 관각의 경향 등을 검토했으며, 실용적 학풍과 원대 성리학의 영향, 왕실의 불교애호, 그리고 유학자들의 텍스트에 대한 이해수준 등을 다각도로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 초기의 학술환경이 맹자 주석서를 제출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진단했다. 주자학의 교과서적 이해가 강요될 만한 교조적인 분위기가 아니었고, 과거 역시 경전공부와 직접 관련되는 明經보다는 製述 위주의 관습을 이어갔다. 문정왕후까지 이어진 왕실의 불교애호는 민간의 저변
    에 불교식 관습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語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주석서 저작에 필수적인 大全本 經書에 대한 정확한 독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이 결과적으로 孟子學의 부진을 낳았다. 그러나 주석서의 제출을 단순히 학술상의 발전으로만 인식할 것은 아니다. 국가적 사상통일의 결과물로 제출된 교정청본 언해와 그에 따른 주석서의 폭발적인 증가는 경서주석이 학술논쟁이지만 일종의 국가의 통제 가운데 하나이고, 사상적 강박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제어 : 여말선초, 맹자학, 경학인식, 맹자학 주석서, 경학과 과거, 어록해
  • English
  • An Aspect of the Mencius Interpretation by Jeong Do-jeon(鄭道傳)
    This research examines the study of Mencius by Jeong Do-jeon(鄭道傳,1342~1398). JeongDo-jeonauthored Gyeongjemungam(經濟文鑑), Gyeongjemungambyeoljip(
    經濟文鑑別集), oseongyeonggukjeon(朝鮮經國典)andmore. Articles such as Bulssijapbyeon(佛氏雜辨) and Simgiripyeon(心氣理篇) are also included in anthology. In many of which Jeong vigorously expressed his views, while utilizing Mencius as his theoretical base, of Confucian Studies in the interpretation of Confucian Classics. Such materials offer a useful glimpse into his study of Mencius while Jeong never submitted any writings related to MenciusAs a result of investigation, Jeong’s study of Mencius is understood that based on the foundation of anti-heresy theory, he had a strong intention
    of awakening people and made a novel attempts to interpret one’s mind.
    The direction was less about studying the original intention of the doctrine but more focusing on activities to inspire people. In Jeong’s consciousness in which he meant to install a foundation stone in building a new nation, the doctrine was used as a way to instill inspiration than its original meaning. Regarding the role of a monarch, he would quote Mencius, actively evaluate spectators, or introspect the roles of a monarch and his
    subjects, while making a great effort to maximize the effectiveness of the study as a tool of inspiration. To interpret in terms of Confucius Studies, it was to embrace.
    The world view of Philosophy of Qi(氣一元論), suggested as a theory of anti-heresy, and the understanding of one’s mind were considered as more the stance of Northern Song Dynasty scholars than that of the Doctrines of Master Zhuzi(朱子, 1130-1200); and insights regarding one’s mind is understood as the very root of Susa Learning(洙泗學) combining
    teachings of Confucius and Mencius.
    The understanding of Jeong Do-jeon’s interpretation of Mencius is to contribute to investigating the academic atmosphere at the early founding of Joseon Dynasty as well as a detailed aspect of Confucian Classics.
    Key Words : Jeong Do-jeon, Mencius Studies, early Joseon Dynasty, Joseongyeokguijeon, Gyeongjemungam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Menciu Subjects of Understanding and Matters of Interest : There is a need to describe the history of Confucianism no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cept of neo-Confucianism but based on the awareness of issues, that is, from the viewpoint of the matters of interest that invoke subjects and the subject consciousness. It is all the more so in that the subject of analysis will be able to be materialized along with the comparative analysis on the context of interpretation in a more broadened manner. In addition, the thoughts at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period should be understood based on the point of concrete text rather than the perspective of typicality of being an intermediate or transitional period. Against this backdrop, this article has sought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Confucianism from the perspective of subject consciousness and matters of interest based on several key points of
    Mencius. To the scholars at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Mencius served as a useful scriptural authority in effectively presenting their ideas and thoughts. Mencius became the base of debate on land issues and was also utilized in political issues of implementing compassionate politics and the rule of right. They often used the Mencius’ claims as a vehicle to criticize the absolute power of the Crown. It faithfully quoted the original nature of the Mencius texts with its assertiveness and frequency overwhelming the circumstances in late Joseon dynasty. Unlike this, the subject of cultivating mind and character had already actively utilized the logic of neo-Confucianism. However, its approach was not intended toward further advancing the understanding of the mind in an analytical and detailed manner as demonstrated in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or the theory that human being and an animal have the same or different nature in late Joseon Dynasty period. Mostly, the approach was taken to be faithful to the claims of the scripture and to emphasize the practical aspects to some extent. When it comes to the perspectives of the anti-heresy theory, the scholars at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period showed more interest in the anti-heresy nature of Mencius himself. Understanding the preciseness and consistency of the logic requires more examination but considering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 when the Buddhism exerted its social and ideological influence, the logic of revolution as a social thought held by the anti-heresy theory is still worth attention. It is not aligned with
    the circumstances in late Joseon Dynasty period challenged by the anti-heresy nature within Confucianism.
    In conclusion, the analysis on subjects and matters of interest with Mencius serving as a controversial point is effective in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Confucianism at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period and is identified to well serves as a strategic base. The subject awareness and matters of interest in the Mencius’ points were converted to other points as interest in neo-Confucianism deepened and the ideological weight of Confucianism expanded. This will be meaningful as a methodological attempt to capture ideological changes through studies on Confucian Classics.
    Key Words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 Joseon Dynasty, Mencius, subjects and matters of interest, theory of political economy, theory of cultivating mind and character, anti-heresy theory
    Studies on Mencius Prior to the Toegye Yi Whang Period : With focus on the period betwee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King Seongjong’s reign
    This study has been conducted as part of a series of papers designed to examine the research and understanding the “Mencius” among scholars in early Joseon Dynasty period prior to the Toegye Yi Whang era. Established in 1392, Joseon published the Confucian classics imported in the 1420s but the Mencius commentary did not appear 150 years after that, which is unusual in the light of the fact that the doctrines of Chu-tzu were accepted
    late Goryeo period and that a considerable level of neo-Confucianism books were presented during the King Sejong’s and Seongjong’s reign period. This article has examined the academic environment of the Joseon Dynasty, which delayed the birth of Mencius commentaries from multiple perspectives. The subject of examination includes the perceptions of kings and high-ranking officials in early Joseon period, trends in national research institutes, effects of practical academics and neo-Confucianism back then, royal family’s love and affection toward Buddhism, and the level of understanding of texts among Confucian scholars.
    The study has found that the academic circumstance the early Joseon Dynasty period did not allow the presentation of the Mencius commentaries. No doctrinaire atmosphere to force the textbook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s of Chu-tzu was created while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s continued their tradition characterized by evaluating literary competencies
    rather than understanding the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which is directly related to studying scriptures. The royal family’s love and affection toward Buddhism, which was sustained up to the Queen Munjeong’s reign,resulted in Buddhist customs established throughout the private sector.
    Above all, a lack of understanding of quotations stood in the way of accurate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classics, which is required to write the commentaries. These complex circumstances led to the failure of the doctrines of Chu-tzu. However, it is far-fetched to consider the presentation of the commentaries alone as the academic development. An explosive increase of the Korean annotations of Chinese classics by the national correctional agency and their accompanied commentaries is a paradoxical representation of sort of a national control and academic coercion although the commentaries of the Confucian classics are in the heart of academic disputes.
    Key Words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early Joseon : dynasty, Mencius, perception of the study of Chinese classics, Mencius commentaries, civil service examinations in Chinese classics, interpretation of quotations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정도전 맹자해석의 일고 :이 연구는 정도전(1342~1398)의 맹자학에 대한 검토이다. 검토 결과 정도전의 맹자학은 강한 경세적 지향 속에서 벽이단론의 기초위에 마음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방향은 경전의 원의탐구 보다는 경세적 활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군주의 역할에 대한 맹자의 발언을 원용하거나 관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평가 하고, 君民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며 경세의 도구로서 학술의 효용을 극대화하려했다. 곧 경술적 의미에서의 수용이었다. 벽이단의 논리로 제시되었던 기일원론의 세계관과 마음에 대한 이해는 주자학적이라기보다는 북송대 학자들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고, 마음에 대한 통찰은 洙泗學의 원류에 직입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도전의 맹자해석에 대한 이해는 조선 건국 초기의 학술적 분위기, 구체적으로 경학의 구체적인 한 국면을 살피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말선초의 맹자 이해의 주제와 관심사 : 이 글은 맹자 의 몇 가지 핵심논점을 기초로 주제의식과 관심사의 입장에서 여말선초의 유학사를 파악하려했다. 여말선초의 학자들에게 맹자 는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데 유용한 경전적 전거가 되었다. 맹자 는 토지문제에 대한 중요한 논의의 거점이 되었고, 仁政과 王道의 구현이라는 정치적인 이슈에서도 활용되었다.
    그들은 맹자의 주장을 근거로 때로 왕실권력이라는 절대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도 적극 활용했다. 그 방식은 대체로 맹자 텍스트의 원천적 성격을충실하게 원용하는 것으로 그 적극성과 빈도는 조선 후기적 상황을 압도하는 것이다.
    심성수양론적인 주제는 이와 달리 성리학의 논리가 이미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그 층차는 조선 후기의 四端七情論이나 人物性同異論과 같이 마음에 대한 이해를 분석적으로 더 한층 진전시킨 분석적이고 세밀한 방식은 아니었다. 대체로 경전의 주장에 충실하고 어느 정도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벽이단의 관점에 있어서 여말 선초의 학자들은 맹자 자체의 벽이단적 성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 논리의 정밀함과 정합성 여부는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으나 불교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당대 상황을 고려하면 벽이단론이 지니는 사회사상으로서의 변혁논리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유학 내부의 벽이단론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조선 후기적 상황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맹자 를 논점으로 하는 주제와 관심사에 대한 분석은 여말선초의 유학사의 단면을 파악하는데 유효하고 전략적인 거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맹자 의 논점에 대한 주제인식과 관심사는 이후 조선에서 주자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유학의 사상적 비중이 확장되면서 점차 다른 논점으로 전환된다. 이는 경학 연구를 통해 사상적 변화를 포착하는 방법적 시도로서의 유의미성이 될 터이다.
    퇴계 이황 이전의 맹자학연구 : 이 연구는 퇴계 이황 이전 조선전기 학자들의 맹자 이해의 면모를 검토 하는 일련의 논문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선초에서 성종대를 검토했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되었고 1420년대에 이미 수입한 대전본 경서를 간행하였지만 맹자 주석서는 그로부터 150여년이나 뒤에 나타났다. 이는 고려말에 이미 원대 주자학을 수용하고, 세종 성종대에 상당한 수준의 성리서들이 제출된 현실에 비추어 이례적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孟子 註釋書의 탄생을 지연시킨 당대 조선의 학술적 환경을 몇 가지 논점으로 검토했다. 맹자학을 인식하는 선초 군주와 관료들의 인식이나 관각의 경향 등을 검토했으며, 실용적 학풍과 원대 성리학의 영향, 왕실의 불교애호, 그리고 유학자들의 텍스트에 대한 이해수준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 초기의 학술환경이 맹자 주석서를 제출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진단했다. 주자학의 교과서적 이해가 강요될 만한 교조적인 분위기가 아니었고, 과거 역시 경전공부와 직접 관련되는 明經보다는 製述 위주의 관습을 이어갔다. 문정왕후까지 이어진 왕실의 불교애호는 민간의 저변에 불교식 관습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語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주석서 저작에 필수적인 大全本 經書에 대한 정확한 독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이 결과적으로 孟子學의 부진을 낳았다. 그러나 주석서의 제출을 단순히 학술상의 발전으로만 인식할 것은 아니다. 국가적 사상통일의 결과물로 제출된 교정청본 언해와 그에 따른 주석서의 폭발적인 증가는 경서주석이 학술논쟁이지만 일종의 국가의 통제 가운데 하나이고, 사상적 강박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기 발표된 논문은 조선전기 경학과 유교사상의 지형도를 이해하는데 의미있게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연구는 그것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고 추가적인 연구활동을 통해 좀 더 점진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연구사를 검토하면 조선의 유교 경전에 대한 경서언해는 조선 성리학의 심화와 연관지어 설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서언해가 조선 전기 유학사의 발전을 증명한다는 논점이다. 그러한 점이 없지 않으나 그 설명은 경서언해를 중심으로 완만하지 않고,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증가하는 주석서의 저술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경서언해가 오랫동안 지연된 원인으로는 학술계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왕실과 관각의 지향과 주자학의 흐름을 견인한 사림파 학자들의 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과거제도의 문제와 주자학 텍스트 이해의 수준을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도 있다.
    맹자학사의 입장에서 조선의 경서언해가 지연된 원인에 대해서는 퇴계 이황 이전의 조선 맹자학사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이 연구는 그러한 토대 위에서 성과를 진전시켜 경서언해 이후 조선의 맹자 주석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를 임병양란이라는 국가적 전란이 가져다주는 사상사적 계기, 곧 사상의 교류와 조선학계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이 연구를 선입견 없이 좀 더 발랄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기존의 시각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다음의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겠다.

    첫째는 경서언해는 조선전기 사상의 완성태가 아니라 국가적 통제에 의한 주자학적 전환의 시작이다.

    둘째는 임병양란은 조선 사상계의 풍부함을 더하는 전환기적 계기였다.

    세째는 조선의 지식계는 송시열의 '사문난적' 논란 이전까지 매우 활발하게 주자학적 사유 속에서도 경색되지 않고, 다양한 사상적 모색을 진행하였으므로, 경서언해 이후로부터 사문난적 논란 이전까지를 조선 주자학의 모색기로서 적극 평가할 필요가 있다.

    물론 斯文亂賊 논란은 양란 이후 분열된 사상계를 정비하고, 이후 국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지식인들의 지적 투쟁의 결과였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또한 사문난적 논란 이후 주자학에 대한 집중적인 학적 노력이 경주되어 사전류 문헌의 저작과 문헌학적 발전이 이어지는 등 그 성과가 없지 않았다는 지적도 역사적 사실로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학술과 사상의 자유’라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대 학술과의 비판적 거리는 더욱 좁혀진 것이고, 그 학문적 시야에서는 협소해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주자와 주자학 자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로막는 질곡으로 작용한 점도 없지 않다. 결론적으로 조선 주자학의 전개에서 선조에서 효종대 이르는 시기를 새롭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기된 가설은 면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史象에 대해서도 좀 더 과감하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사상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대하고, 조선의 사상사를 좀 더 활발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교두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시도를 경전 해석사라는 구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개별 경전의 구체적인 국면을 통해 경서언해와 임병양란을 파악하려는 연구시각을 견인할 수 있다. 경서언해와 임병양란의 사상사적 의미에 대해 국가 표준번역의 등장과 동아시아 교류사라는 좀 더 다각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연구는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될 수 있겠다. 하나는 경서언해를 이끌어낸 미암 유희춘의 활동과 퇴계의 󰡔맹자석의󰡕와 사계의 󰡔맹자변의󰡕의 주석 내용에 대한 검토와 의미분석을 진행한다.
    다음으로는 17세기에 제출된 맹자 주석서들 가운데 사문난적의 논란을 전후하게 제기되는 사상사의 국면을 보여주는 주요한 몇 편을 분석하여 맹자의 주석사에서 사문난적 논란의 전후는 어떠한 변모의 양상을 보이는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주자학 접수와 소화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일본과 베트남 등의 관련 연구 자료에 대한 현지조사와 관련학회 참석이 필수적이다. 이는 논문의 자료를 수집하거나 논의를 다듬는 과정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물론 기 작성된 논문은 이미 학술지를 통해 공간되었으며, 그 외에도 조선전기의 맹자 연구의 성과를 집성하여 『조선맹자학1』(성균관대출판부, 2017)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 Index terms
  • 정도전, 맹자학, 조선초기,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 여말선초, 맹자, 주제와 관심사, 정치경제론, 심성수양론, 벽이단론 ; 여말선초, 맹자학, 경학인식, 맹자학 주석서, 경학과 과거, 어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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