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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 운남과 서남방 변경지역간의 네트워크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원대 운남과 서남방 변경지역간의 네트워크 | 2015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배숙희(홍익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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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2015S1A5A2A01014738
Year(selected) 2015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17년 10월 31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17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원나라와 면국간의 충돌은 원면 여정중 중요한 금치지역의 추장에 의해 야기되었다. 원면전의 구체적인 경과를 살펴보았는데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금치지역에 출사하였으므로 폴로의 기록을 통해 금치지역의 정보를 활용하였지만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밝힐 수 있었다. 정면전의 루트는 면국과의 왕래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가 되었다. 서남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행정기구가 개편되어 영창부, 등총부를 비롯하여 路의 설치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후에 정면전을 통해 木邦路 등 10 개의 로가 면국 경내에 신설되었다. 금치 등 제만을 포함한 운남지역 뿐만 아니라 정면전의 결과 면국이 원나라의 통제에 들어가고 나서, 상공된 금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금치 등 제만의 변경지역엔 정면전이나 기타 여러 이유로 유우하는 여러 종족(백족, 몽골인, 회회인, 서하인, 한인 등)의 장수들과 현지의 토관이 혼거하였다. 특히, 금치 등 제만지역에 설치된 안무사, 선무사, 초토사, 각 로의 총관, 선위사 등엔 토관이 주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토관을 분석한 결과, 금치 등 제만지역의 토관 성명과 承襲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면전에 참가한 장수의 성명, 종족과 정면전 때의 직함, 전쟁이 끝난 후 관직의 변천, 운남에 정착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므로 이에 대한 분석도 하였다. 대리국을 정벌할 때나 운남행성이 설치될 때, 원나라의 정책에 의해 운남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는데 운남에서 임직하고 있으면서 금치 등 제만의 정벌이나 정면전과 안남의 경략에 참여하고 전쟁에 끝난 뒤에 그 공적으로 승진하였으며 혹자는 운남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였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엽에 버간왕조가 점차 쇠퇴하고 경내의 샨족, 맹족 등 민족의 수령의 세력이 점차 커져서 중앙왕조에 대한 이심력도 증가하였다. 1271년 쿠빌라이는 면국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73년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처형당하였으므로 江頭城(지금의 바모)를 공점하여 정면전이 시작되었다. 이 후에도 몇차례 정면전이 발생하여 버간왕조가 멸망하였는데 기존엔 원과의 전쟁이 멸망원인으로 강조하였는데, 내란도 중요한 요인에 속한다. 나라띠하빠띠의 아들 쪼소와가 1289년에 버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버간이 혼란해지자 샨족 삼형제가 미엔사잉(木連城), 멕커야(米加耶), 삔레(賓里)를 차지하였다. 쪼소와는 이들이 점령한 지역을 인정해주고 1297년 1월에 몽골군에 복속하여 성종은 쪼소와의 작은 아들 소닛(1298-1312)을 왕위에 세웠다. 1303년에 몽골이 철수하고 띠하뚜는 1309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삔야(邦牙)에 왕실을 짓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원면간의 사신왕래는 면국에서 23차례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원나라는 7차례 면국에 사신을 보냈다. 쪼소와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자 친아들 아띤크야의 반발을 사 스가잉에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1331년 우즈나가 통치하던 삔야에 홍수가 나 1364년 삔야왕이 샨족과 연대하여 스가잉을 공격하고 미얀마 북부는 샨족에게로 넘어갔다. 면국이 이처럼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원나라와 사신왕래가 이루어졌던 나라는 번간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두 나라간의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측의 기록엔 면전이라고만 되어있지 이러한 변화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좀더 자료의 보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리에서 버간왕조까지 50일여정이며 영창, 등총,간애,건도국,강두성이 있다. 팔백식부국은 치앙마이에 독립된 왕국 난나국으로 원명시기의 문헌에서는 八百媳婦國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덕 초년에 팔백식부국이 자주 운남변경을 공격하여 대덕 5년에 팔백식부를 정복하였으나 팔백식부국에 도달하지 않아 토관 타절, 송융제의 반란에 직면하여 실패한 후 성종이 정복전을 일으키지 않고 수성의 군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말 망래왕이 원교근공책을 써서 남방의 수코타이와 연합하여 버간과 함께 역량을 집중하여 1292년에 여왕국을 병합하고, 1338년에 부요국을 점령하여 중국 서남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팔백식부국과 교류를 살펴보면, 인종 황경 원년에 팔백식부국에서 사신과 꼬끼리 방물을 보내 교류가 시작되었다. 태정 4년에 팔백국왕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여 원나라의 책봉을 받고자 하였다. 원나라는 蒙慶선위사도원수부를 설치하여 선위사도원수에 임명하였다. 8년이 지나 명칭을 팔백선위사도원수부로 고치고 비단과 전폐 등을 주어 우의를 표시하였다. 1312-1330년까지 팔백국은 8차례 입공하여 쌍방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코타이 왕조가 태족이 건립한 첫 번째 정권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치앙마이에 팔백식부국등 태족이 건립한 나라가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처리(현 시쐉바나)와 노고 지역까지도 원나라의 통치범위가 확대되었으며 군민총관부를 두어 통치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원나라와 윈난 지역의 금치 등과, 면국 북부, 팔백식부국, 수코타이, 처리, 노고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English
  • Jinchi and the other ethnic groups dwelled in Myanmar and the border areas in the south-western region of Yunnam. They were important political forces. Since the posture of Jinchi on various matters in regional and national level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relation of Yuan dynasty with Myanmar. Yuan exerted serious efforts through various policies to expand its influences to the southwestern region. Yuan considered geopolitical positions of the ethnic groups including jinchi and the increases in their population, debating the administrative. Status of their dwelling districts dian to lu. Yuan also established jinmincongguanfu in the districts, appointing Zhangling, leaders of the ethnic groups to the government positions as Dalugaci or Zhfushi in the Chongguanfu.
    As the southwestern borderland gained importance during the Yuan period the influential area of the border land was changed from Dali to Yongchang. The persons including Dalijincidengchuxuanweishi who were appointed as Tuguan were usually, in many cases, avorigines, Boren who had served as civil officials in Daliguo. As the Yuan’s need to conquer Myanmar grew greater even constructed to pass through strategic areas of military importance in the land of Jinchi and other ethnic groups. This could be arrtibuted for the gaining importance of Yongchang area.
    To effectively, govern the vast extended land the Yuan dynasty established servant, Xuanweishi, Anfushi, Chutaoshi and Chongguanfu in Xuanweishiyuanshoufu, and also quite a few Tuguan. It was not unusual to appoint the surrendered leaders of the various ethnic groups as Tuguan, Zhangling, the leaders of various races who participated in Zhaoyu and Zhengmianzhan were also as Tuguan, Anong Tuguan there were variety of races, such as Dali aborigines Boren, Muselms, Xixia, Mongols and even Hanren. Tuguan from servant and zhangling of these various races, in some cases moved to others to their descendants.
    The Tugan system enforced in the south western border lands during the Yuan period was in some aspect, transitional system with a trait of the Liuguan system. The various races moved to the borderlands also showed a tendency to be assimilated with local people. while the changes due to the immigration policies were important also local power was confirmed to exert a great influence in introducing a new system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원나라와 면국간의 충돌은 원면의 여정에서 중요한 금치지역의 추장에 의해 야기되었다. 원면전의 경과를 살펴보았는데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금치지역에 출사하였으므로 폴로의 기록을 통해 금치지역의 정보를 활용하였다. 정면전의 루트는 면국과의 왕래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가 되었다. 서남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행정기구가 개편되어 영창부, 등총부를 비롯하여 路의 설치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후에 정면전을 통해 木邦路 등 10 개의 로가 면국 경내에 신설되었다. 금치 등 제만을 포함한 운남지역 뿐만 아니라 정면전의 결과 면국이 원나라의 통제에 들어가고 나서, 상공된 금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금치 등 제만의 변경지역엔 정면전이나 기타 여러 이유로 유우하는 여러 종족(백족, 몽골인, 회회인, 서하인, 한인 등)의 장수들과 현지의 토관이 혼거하였다. 특히, 금치 등 제만지역에 설치된 안무사, 선무사, 초토사, 각 로의 총관, 선위사 등엔 토관이 주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토관을 분석한 결과, 금치 등 제만지역의 토관 성명과 承襲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면전에 참가한 장수의 성명, 종족과 정면전 때의 직함, 전쟁이 끝난 후 관직의 변천, 운남에 정착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므로 이에 대한 분석도 하였다. 대리국을 정벌할 때나 운남행성이 설치될 때, 원나라의 정책에 의해 운남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는데 운남에서 임직하고 있으면서 금치 등 제만의 정벌이나 정면전과 안남의 경략에 참여하고 전쟁에 끝난 뒤에 그 공적으로 승진하였으며 혹자는 운남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였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엽에 버간왕조가 점차 쇠퇴하고 경내의 샨족, 맹족 등 민족의 수령의 세력이 점차 커져서 중앙왕조에 대한 이심력도 증가하였다. 1271년 쿠빌라는 면국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73년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처형당하였으므로 江頭城(지금의 바모)를 공점하여 정면전이 시작되었다. 이 후에도 몇차례 정면전이 발생하여 버간왕조가 멸망하였는데 기존엔 원과의 전쟁이 멸망원인으로 강조하였는데, 내란도 중요한 요인에 속한다. 나라띠하빠띠의 아들 쪼소와가 1289년에 버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나라가 혼란해지자 샨족 삼형제가 미엔사잉(木連城), 멕커야(米加耶), 삔레(賓里)를 차지하였다. 쪼소와는 이들이 점령한 지역을 인정해주고 1297년 1월에 몽골군에 복속하여 성종은 쪼소와의 작은 아들 소닛(1298-1312)을 왕위에 세웠다. 1303년에 몽골이 철수하고 띠하뚜는 1309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삔야(邦牙)에 왕실을 짓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원면간의 사신왕래는 면국에서 23차례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원나라는 7차례 면국에 사신을 보냈다. 쪼소와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자 친아들 아띤크야의 반발을 사 스가잉에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1331년 우즈나가 통치하던 삔야에 홍수가 나 1364년 삔야왕이 샨족과 연대하여 스가잉을 공격하고 미얀마 북부는 샨족에게로 넘어갔다. 원나라와 사신왕래가 이루어졌던 나라는 번간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두 나라간의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측의 기록엔 면전이라고만 되어있지 이러한 변화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좀더 자료의 보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리에서 버간왕조까지 50일여정이며 영창, 등총,간애,건도국,강두성이 있다. 팔백식부국은 치앙마이에 독립된 왕국 난나국이 출현했는데 원명시기의 문헌에서는 八百媳婦國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덕 초년에 팔백식부국이 자주 운남변경을 공격하여 대덕 5년에 팔백식부를 정복하였으나 팔백식부국에 도달하지 않아 토관 타절, 송융제의 반란에 직면하여 실패한 후 성종이 정복전을 일으키지 않고 수성의 군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말 망래왕이 원교근공책을 써서 남방의 수코타이와 연합하여 면전의 버간과 함께 역량을 집중하여 1292년에 여왕국을 병탄하고, 1338년에 부요국을 점령하여 중국 서남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팔백식부국과 원나라간의 교류를 살펴보면, 인종 황경 원년에 팔백식부국에서 사신과 꼬끼리 방물을 보내 원과 교류하게 되었다. 태정 4년에 팔백국왕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여 원나라의 책봉을 받고자 하였다. 원나라는 蒙慶선위사도원수부를 설치하여 선위사도원수에 임명하였다. 8년이 지나 명칭을 팔백선위사도원수부로 고치고 비단과 전폐 등을 주어 우의를 표시하였다. 1312-1330년까지 팔백국은 8차례 입공하여 쌍방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코타이 왕조가 태족이 건립한 첫 번째 정권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치앙마이에 팔백식부국등 태족이 건립한 나라가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처리(현 시쐉바나)와 노고 지역까지도 원나라의 통치범위가 확대되었으며 군민총관부를 두어 통치하였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본 연구를 통해 국내에 연구가 미비한 중국 서남방 변경지역과 인접국가
    (미얀마북부, 오늘날의 태국 일부, 라오스 일부)가 원대에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남은 과제이지만 본 연구는 경계를 초월하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음을 숙지할 수 있었다.(예를들면 불교문화 등) 본 연구결과는 첫째, 원대에 운남지역을 중심으로 서남방 변경에 위치한 金齒지역과 인접국 緬國, 八白媳婦國, 老告 등을 정복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諸蠻(종족의 구성을 포함하여)과 전쟁이나 협상을 통해 왕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필요한 관료 기구를 설치하고 통치하는 과정을 통해(征緬을 위한 기구, 변경지역을 정복한 후 土官을 설치하여 통치) 원나라의 서남방 변경 정책과 인접국의 관련 정책이 어느정도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둘째, 기존의 동남아시아 연구에서 비교적 강조되어 온 원나라의 동남아 정복전의 실패라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운남에서 육로나 수로를 통한 인접국가의 진출과 교류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수코타이의 전사인 팔백식부국의 존재를 어느정도 밝혔으며 원나라와의 교류까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고 또한 安南(베트남)을 비롯한 후속연구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중국과 경계에 있는 미얀마 북부, 태국의 일부 등 인접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인접국간의 문화교류를 심도있게 이해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동양사 교육에서 중원 중심의 편중된 시각이나 내용을 보충하여 원나라와 동시대에 있었던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중국과의 관계를 대학에서 교육하여 안목을 넓힘은 물론이고 이러한 연구성과를 출판하여 일반인에게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연구를 진행한 후, 애초에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연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측면도 고려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⓵ 명대초까지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명대에 중국과 팔백식부국의 관계는 더 밀접해져 홍무 21년에서 정덕 8년(1388-1513) 까지 팔백에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한 것이 33차례, 명나라가 4차례 파견하였다. 명사에서 팔백을 운남토사조에 넣었고 외국전에 넣지 않은 것은 팔백이 이미 명나라의 “속국”인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는 四夷館에 팔백식부국관을 설립하여 蘭那泰문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가정 간(1522-1566)에 면전에 겸병되고 刀氏가 景線으로 피하여 小八百이라 하였다. 치앙마이가 면전에 의해 오랫동안 통치되어졌고 후에 1773년에 치앙마이를 수복하였다. 이 후에 치앙마이는 전쟁으로 파괴되고 방콕 왕조 초기에 치앙마이가 비로소 태국의 판도에 들어오게 된다.
    ⓶ 여말선초의 토관제와 비교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후기에 유형원은 토관의 혁파(폐지)를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토관제가 중국과 이름은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名同而實異)라고” 주장하였다.(반계수록 보유 권 1, 군현제) 그러나 토관이 실시된 세 지역은 (동녕부,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 원나라의 통치하에 있다가 수복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토관제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본인의 1차 연구에서도 밝혔듯이 원나라의 토관제는 서남변방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나라가 통치할 시기에 이 지역에 토관제가 실시되지 않았는데 고려에서 수복한 후에 토관제가 실시되었는지는 의문이다.(제주도는 예외를 보임, 제주도는 원나라가 직접 통치한 시기가 있으므로 이미 토관 관련 직명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향후 토관의 명칭과 중국의 토관제와 유사한 직명이 실시되었는지는 좀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⓷ 관광지로서의 효과: 주지하듯이 치앙마이는 태국 제2대 도시이다. 치앙마이는 관광 휴향지로 잘 알려져 있으나 역사적인 측면은 그다지 강조되지 못하였다. 오늘날 문화에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기존에 이해가 부족한 팔백식부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치앙마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이전 蘭那고성을 참관하고, 山地박물관을 답사함으로서 그 시대의 삶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다라데비 치앙마이(Dhara Dhevi chiang Mai) 호텔은 휴양과 문화 향유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변경도시에 관심을 가져볼 수 있다. 이를테면 캥퉁(Kengtung)의 변경도시 타킬렉(Thakhilek)과 매싸이(Mae Sai, 태국과 미얀마의 변경을 지나 태국 치앙라이(Chiang Rai)의 변경도시) 등이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이 원나라 시기이므로 향후 어떠한 변화를 보이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 Index terms
  • 원대, 운남지역, 서남변경, 금치, 원면전, 토사제, 면국, 팔백식부국, 영창, 운남왕, 버간왕조, 네트워크, 변강지역, 역참, 사신왕래, 초유정책, 수코타이, 치앙마이, 쌴국, 망래왕. 토관, 원-팔백식부 전쟁, 섬국. 처리, 노고, 군민총광부, 토관, 태국과 중국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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