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와 면국간의 충돌은 원면 여정중 중요한 금치지역의 추장에 의해 야기되었다. 원면전의 구체적인 경과를 살펴보았는데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금치지역에 출사하였으므로 폴로의 기록을 통해 금치지역의 정보를 활용하였지만 정확하지 않은 ...
원나라와 면국간의 충돌은 원면 여정중 중요한 금치지역의 추장에 의해 야기되었다. 원면전의 구체적인 경과를 살펴보았는데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금치지역에 출사하였으므로 폴로의 기록을 통해 금치지역의 정보를 활용하였지만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밝힐 수 있었다. 정면전의 루트는 면국과의 왕래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가 되었다. 서남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행정기구가 개편되어 영창부, 등총부를 비롯하여 路의 설치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후에 정면전을 통해 木邦路 등 10 개의 로가 면국 경내에 신설되었다. 금치 등 제만을 포함한 운남지역 뿐만 아니라 정면전의 결과 면국이 원나라의 통제에 들어가고 나서, 상공된 금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금치 등 제만의 변경지역엔 정면전이나 기타 여러 이유로 유우하는 여러 종족(백족, 몽골인, 회회인, 서하인, 한인 등)의 장수들과 현지의 토관이 혼거하였다. 특히, 금치 등 제만지역에 설치된 안무사, 선무사, 초토사, 각 로의 총관, 선위사 등엔 토관이 주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토관을 분석한 결과, 금치 등 제만지역의 토관 성명과 承襲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면전에 참가한 장수의 성명, 종족과 정면전 때의 직함, 전쟁이 끝난 후 관직의 변천, 운남에 정착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므로 이에 대한 분석도 하였다. 대리국을 정벌할 때나 운남행성이 설치될 때, 원나라의 정책에 의해 운남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는데 운남에서 임직하고 있으면서 금치 등 제만의 정벌이나 정면전과 안남의 경략에 참여하고 전쟁에 끝난 뒤에 그 공적으로 승진하였으며 혹자는 운남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였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엽에 버간왕조가 점차 쇠퇴하고 경내의 샨족, 맹족 등 민족의 수령의 세력이 점차 커져서 중앙왕조에 대한 이심력도 증가하였다. 1271년 쿠빌라이는 면국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73년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처형당하였으므로 江頭城(지금의 바모)를 공점하여 정면전이 시작되었다. 이 후에도 몇차례 정면전이 발생하여 버간왕조가 멸망하였는데 기존엔 원과의 전쟁이 멸망원인으로 강조하였는데, 내란도 중요한 요인에 속한다. 나라띠하빠띠의 아들 쪼소와가 1289년에 버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버간이 혼란해지자 샨족 삼형제가 미엔사잉(木連城), 멕커야(米加耶), 삔레(賓里)를 차지하였다. 쪼소와는 이들이 점령한 지역을 인정해주고 1297년 1월에 몽골군에 복속하여 성종은 쪼소와의 작은 아들 소닛(1298-1312)을 왕위에 세웠다. 1303년에 몽골이 철수하고 띠하뚜는 1309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삔야(邦牙)에 왕실을 짓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원면간의 사신왕래는 면국에서 23차례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원나라는 7차례 면국에 사신을 보냈다. 쪼소와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자 친아들 아띤크야의 반발을 사 스가잉에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1331년 우즈나가 통치하던 삔야에 홍수가 나 1364년 삔야왕이 샨족과 연대하여 스가잉을 공격하고 미얀마 북부는 샨족에게로 넘어갔다. 면국이 이처럼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원나라와 사신왕래가 이루어졌던 나라는 번간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두 나라간의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측의 기록엔 면전이라고만 되어있지 이러한 변화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좀더 자료의 보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리에서 버간왕조까지 50일여정이며 영창, 등총,간애,건도국,강두성이 있다. 팔백식부국은 치앙마이에 독립된 왕국 난나국으로 원명시기의 문헌에서는 八百媳婦國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덕 초년에 팔백식부국이 자주 운남변경을 공격하여 대덕 5년에 팔백식부를 정복하였으나 팔백식부국에 도달하지 않아 토관 타절, 송융제의 반란에 직면하여 실패한 후 성종이 정복전을 일으키지 않고 수성의 군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말 망래왕이 원교근공책을 써서 남방의 수코타이와 연합하여 버간과 함께 역량을 집중하여 1292년에 여왕국을 병합하고, 1338년에 부요국을 점령하여 중국 서남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팔백식부국과 교류를 살펴보면, 인종 황경 원년에 팔백식부국에서 사신과 꼬끼리 방물을 보내 교류가 시작되었다. 태정 4년에 팔백국왕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여 원나라의 책봉을 받고자 하였다. 원나라는 蒙慶선위사도원수부를 설치하여 선위사도원수에 임명하였다. 8년이 지나 명칭을 팔백선위사도원수부로 고치고 비단과 전폐 등을 주어 우의를 표시하였다. 1312-1330년까지 팔백국은 8차례 입공하여 쌍방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코타이 왕조가 태족이 건립한 첫 번째 정권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치앙마이에 팔백식부국등 태족이 건립한 나라가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처리(현 시쐉바나)와 노고 지역까지도 원나라의 통치범위가 확대되었으며 군민총관부를 두어 통치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원나라와 윈난 지역의 금치 등과, 면국 북부, 팔백식부국, 수코타이, 처리, 노고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