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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62330&local_id=10086588
부자들의 빈곤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부자들의 빈곤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 | 2015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정진영(안동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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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2015S1A5A2A01015030
Year(selected) 2015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17년 10월 23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17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이 연구는 앞서 검토하였던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을 18세기 중엽 한 특정가문을 중심으로 다시 확인함과 아울러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원인하는 것인지, 이를 어떻게 극복.대응해 나갔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본 것이다.
    검토 대상 가문인 대구의 경주 최씨가는 관직자도 배출했고, 중소지주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학보 혹은 유지했으며, 특히 최흥원은 학문적으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최씨가에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등과 함께 최흥원(1705~1786)이 남긴 방대한 <<曆中日記>> 등의 자료가 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족친들, 외가와 사돈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빈곤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빈곤의 원인은 자연재해와 많은 식구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등이었고, 곡식과 돈을 빌리거나 토지와 노비를 팔거나 관의 환곡 등을 통해 여기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최씨가에서도 주위의 인척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토지를 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씨가에서는 助祭庫와 別庫 등 다양한 문중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다만 그 본래의 기능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최씨가에서는 여기에도 크게 의지할 수 있었다.
    흉년이나 빈곤에 대한 이상과 같은 대응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미봉책에 불과했다. 따라서 흉년이나 빈곤이 장기적 혹은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더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씨가의 빈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씨가의 경우는 빈곤의 일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몰락’의 길로 내몰렸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양이지만 전답의 매득과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건축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최씨가의 빈곤은 말하자면 ‘부자들의 빈곤’인 셈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지출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빈곤은 조선 후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농업경영이 자연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됨으로써 안정적이지 못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 English
  • This study reconfirmed the poverty of the landed gentry in country villages in the 16th - 18th centuries that was reviewed in the previous study mainly based on a specific family in the mid-18th century, and generally examined where their ‘poverty’ or ‘penury’ was originated and how they coped with and responded to it.

    The Gyeongju Choi clan family in Daegu, the target family of the study, produced government officials and secured or maintained their financial foundation as an owner of the small and medium-sized lands or higher. In particular, the Choi family left Yeok-Joong-Il-Gi (曆中日記) written by Choi Heung-won (1705 – 1786), along with the records of property inheritance and trading statements.

    The journal Yeok-Joong-Il-Gi by Choi Heung-won frequently described the issues related to poverty in himself, brothers, relatives, relatives of his mother’s and wife’s sides and many other people. The reasons for poverty were natural disaster, the large number of family members and reception of the guests of ancestral rites, and the family handled the issue by borrowing grain and money or selling lands and slaves or using the Grain Loan System (Hwangok) of provincial government. However, these were not just unilateral measures because the Choi family also often lent lands or grain to many relatives and neighbors or purchased lands from them.

    Such responses to bad years or poverty were only temporary remedies rather than the fundamental solutions. Therefore, when bad years or poverty continued for a long time or occurred periodically, the gentry were forced to be placed in more extreme situations. In these circumstances, it can be assumed that more and more of the gentry had to face a financial collapse in the 18th - 19th centuries.

    Lastly, there is a question left about how to understand poverty of the Choi family. In this case, the family’s poverty was temporary rather than habituated poverty. Therefore, they were not forced to ‘collapse.’ The family continued to buy small farmlands and constructed buildings that required a considerable amount of finance. Poverty experienced by the Choi family was so-called ‘poverty of the rich.’ They experienced poverty because of excessive spending rather than being poor. Such poverty was commonly found in the families of the landed gentry in country villag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also considered evident that agricultural management was unstable as it was significantly limited by the natural conditions.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이 연구는 앞서 검토하였던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을 18세기 중엽 한 특정가문을 중심으로 다시 확인함과 아울러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원인하는 것인지, 이를 어떻게 극복.대응해 나갔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본 것이다.
    검토 대상 가문인 대구의 경주 최씨가는 관직자도 배출했고, 중소지주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학보 혹은 유지했으며, 특히 최흥원은 학문적으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최씨가에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등과 함께 최흥원(1705~1786)이 남긴 방대한 <<曆中日記>> 등의 자료가 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족친들, 외가와 사돈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빈곤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빈곤의 원인은 자연재해와 많은 식구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등이었고, 곡식과 돈을 빌리거나 토지와 노비를 팔거나 관의 환곡 등을 통해 여기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최씨가에서도 주위의 인척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토지를 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씨가에서는 助祭庫와 別庫 등 다양한 문중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다만 그 본래의 기능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최씨가에서는 여기에도 크게 의지할 수 있었다.
    흉년이나 빈곤에 대한 이상과 같은 대응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미봉책에 불과했다. 따라서 흉년이나 빈곤이 장기적 혹은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더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씨가의 빈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씨가의 경우는 빈곤의 일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몰락’의 길로 내몰렸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양이지만 전답의 매득과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건축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최씨가의 빈곤은 말하자면 ‘부자들의 빈곤’인 셈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지출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빈곤은 조선 후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농업경영이 자연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됨으로써 안정적이지 못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제2차 년도의 연구 내용은 제1차 년도에서 제기하였던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을 다시 한 번 확인함과 아울러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원인하는 것인지, 이를 어떻게 극복ㆍ대응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개괄적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앞의 연구가 16~18세기의 몇몇 양반가문을 중심으로 한 산발적인 검토였다면, 이 연구는 영남의 한 특정가문, 대구의 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1705~1786) 가문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 가문에는 최흥원이 남긴 방대한 일기(<<曆中日記>>)와 여러 고문서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자료가 이 연구를 사실상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검토의 대상 시기는 대략 18세기 중반이 된다.
    검토 대상 가문인 대구의 경주 최씨가는 관직자도 배출했고, 중소지주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학보 혹은 유지했으며, 특히 최흥원은 학문적으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최씨가에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등과 함께 최흥원(1705~1786)이 남긴 방대한 <<曆中日記>> 등의 자료가 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족친들, 외가와 사돈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빈곤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빈곤의 원인은 자연재해와 많은 식구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등이었고, 곡식과 돈을 빌리거나 토지와 노비를 팔거나 관의 환곡 등을 통해 여기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최씨가에서도 주위의 인척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토지를 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씨가에서는 助祭庫와 別庫 등 다양한 문중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다만 그 본래의 기능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최씨가에서는 여기에도 크게 의지할 수 있었다.
    흉년이나 빈곤에 대한 이상과 같은 대응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미봉책에 불과했다. 따라서 흉년이나 빈곤이 장기적 혹은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더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씨가의 빈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씨가의 경우는 빈곤의 일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몰락’의 길로 내몰렸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양이지만 전답의 매득과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건축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최씨가의 빈곤은 말하자면 ‘부자들의 빈곤’인 셈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지출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빈곤은 조선 후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농업경영이 자연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됨으로써 안정적이지 못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제2차 년도에서 활용한 <<역중일기>>는 백불암 최흥원(1705년 ; 숙종 31 ~ 1786년 : 정조 10)이 1735년에서 1786년까지 장장 51년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른바 생활일기이다. 학계에 그 전모가 공개되고 구체적으로 활용된 것은 이 연구가 처음이다. 이것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은 1735년(을묘, 31세, 영조 11)에서 1746년(병자, 41세, 영조 22)까지 10년간의 기록으로 329쪽의 분량이고, 제 2권은 1747년(정묘, 영조 23)에서 1755년(을해, 50세, 영조 31)에 이르기까지 9년간의 기록으로 250쪽의 분량이다. 제 3권은 1756년(병자, 51세, 영조 32)에서 1764년(갑신, 59세, 영조 40)에 이르기까지 8년간의 기록으로 313쪽의 분량이다. 제 4권은 1765년(을유, 60세, 영조 41)에서 1786년(병오, 82세, 정조 10)에 이르기까지 23년간의 기록으로 178쪽이다. 모두 52년간의 기록이라고 하나 매일 기록한 것은 1737년부터 1770년에 이르기까지의 44년에 해당한다. 총 분량은 1070쪽에 달한다.
    <<역중일기>> 앞으로 번역되어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 자료로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한 본 연구성과는 향후 <<조선후기 사람들의 생활사>>를 집필하는데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 Index terms
  • x향촌 양반지주, 빈곤, 경주 최씨가, 최흥원(1705~1786), <<역중일기>>, 봉제사 접빈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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