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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해상질서의 발전과 형성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질서의 발전과 형성 | 201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홍성화(부산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5S1A5A8017527
선정년도 201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09월 23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1년차 : 「戰爭과 使節 : 屯門海戰과 明朝의 對外政策變化」


    1521년‧22년에 걸친 屯門海戰을 통하여 고아와 말래카를 점령한 뒤에, 다시 중국에서 합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포르투갈의 장기적인 의도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시대가 개막된 이래 포르투갈이 해상에 진출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최초로 직면한 군사적인 패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투갈 선박은 결국 寧波 부근의 雙嶼 등으로 진출하여 왜구와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즉 둔문해전의 패배는 장래 포르투갈의 對동방진출이 갖는 성격을 크게 변모시켰던 것이다. 1570년 전후에는 민간 상선이 장주(漳州) 해징현(海澄縣)에서 동남아시아로 도항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됨으로써, 포르투갈인에 의해 마카오-나가사키 교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明初의 대외정책은 ‘조공=해금정책’이라는 ‘조공일원론’이었으나, 대외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점차 互市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互市는 어디까지나 市舶司를 통한 교역으로 일정한 세금(抽分)을 징수하는 것으로서, ①조공에 수반한 호시(‘朝貢互市’)와 ② 조공을 수반하지 않는 호시(‘非조공호시’)로 구분할 수 있다. 명중기 그 규모가 커진 호시는 ②이지만, 어디까지나 시박사를 통한다는 점에서 사무역과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非조공호시론이 확대되고 있는 시기에 마침 포르투갈이 중국에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태도나 위세에 반감을 드러낸 명조정에서는 非조공호시를 철회하고 다시 강경한 ‘조공일원론’으로 회귀하였다. 그 과정에서 屯門海戰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해전을 계기로 명조정 역시 ‘조공일원론’이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과의 합법적 무역을 단념한 포르투갈은 중국 연해에서 밀무역을 일삼고 왜구와 손을 잡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계속 일으켰고, 이를 체제내에 포섭하기 위하여 결국 月港開港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는 명조정의 입장에서는 전면적으로 사무역을 허용했다기 보다도, 非조공호시론에 다시 입각하여 포르투갈 등을 체제 내로 포섭하여 해상질서를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2) 2년차 :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貿易의 盛衰」

    1521년과 22년의 둔문해전을 거쳐 浙江省 雙嶼港을 중심으로 비합법적·약탈적 무역을 진행하던 포르투갈은 1557년 명조의 허락을 얻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다. 1571년 규슈의 나가사키가 개항하게 되면서 마카오-나가사키 루트가 성립되었다. 즉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는 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인도의 고아를 거처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극히 광대한 범위까지 미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對동아시아 네트워크의 성쇠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 네트워크에서 거래되는 상품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하자. 리스본으로부터 고아를 거쳐 마카오로 운반되는 물품으로는 후추, 蘇木, 상아, 단향, 은(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포르투갈산이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이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의 각국에서 생산되는 모직물, 수정, 유리제품, 시계, 적색 의료 직물, 기계제품들을 고아, 말래카, 소순다 열도 등에 판매하고 그곳의 물산을 구매해서 마카오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중에서 은이 가장 많았다.
    포르투갈과 일본과의 무역에 대해서는 시기순으로 각각 나뉘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처음 포르투갈이 일본과 접촉했던 시기는, 당시의 일본이 오닌(應仁)의 난 이후, 통일정권이 붕괴되어, 각 지역의 다이묘가 자립하면서 서로 경쟁하던 시기였고, 뒤에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치면서 점점 해외 무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운반된 화물은 은(銀)이 위주이고, 어떤 통계에 따르면 1585년-1630년의 45년간에 1489.9만냥에 달하고, 연평균 135.만량에 이르렀다. 1636년 나가사키에서 반출된 백은의 수량은 이 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향한 포르투갈배는 4척으로 그 운반된 수량은 245만냥에 달하였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1599-1637년에 걸쳐 그 수량은 5,800만냥에 달하였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한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커다란 적수가 나타났으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였다. 숭정14년(1641)에 네덜란드인이 말래카를 점령하고 그 선단이 남양해역의 항로를 장악하면서 마카오와 고아의 교통로가 막히게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포르투갈인을 인도로부터 쫓아내고 아시아 지역의 전체 무역과 운송을 독점하면서 서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이 70여년간 경영해온 마카오와 고아·리스본의 무역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對아시아 무역은 16세기 후반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17세기 초 서양으로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적수를 맞이하여 커다란 어려움을 맞이하였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역상대인 일본으로부터 추방되면서 對아시아 무역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본이 아닌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그 중심을 전환하였다. 그 이후, 동아시아 역내 무역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타이완-나가사키를 잇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그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다.
  • 영문
  • In the Age of Exploration, after the conquest of Malacca in 1511, Portugal had got information on China and steered its way to China. While Ming Dynasty put The Superintendency of Merchant Shipping(市舶司) in Canton which allowed foreign ships only for a tribute as ‘조공일원론’, local officials allowed its foreign trade in remote Tamao(屯門) or Nantou(南頭) which was 100km far away from Canton in reality. Staying in Tamao, Portugal sent Tome Pires to Beijing. But Beijing authority changed its attitude to Portugal, showing its wariness and boiling debates on banishment. This controversy led foreign policy to take a tough line through the death Zhengde Emperor(正德帝) and the appearance of Jiading Emperor(嘉靖帝) who oriented to Confucianism. In the meantime, the first and second Tamao battle occurred and Portugal was defeated in the war, being withdrawn to the ocean.
    On the other hand, the foreign policy of Ming Dynasty in early ages ‘tributary system monism(朝貢一元論)’ which is ‘Tribute=Maritime Embargo Policy’. Following a brisk foreign trade, it is necessary to allow mutual trade(互市) gradually. mutual trade(互市) is a certain amount of tax collection for a trade through The Superintendency of Merchant Shipping(市舶司). It was classified by ① ‘tributary mutual trade(朝貢互市)’ and ② ‘non-tributary mutual trade(非朝貢互市)’. In the middle of Ming Dynasty, ② was quite extensive and distinguished by The Superintendency of Merchant Shipping from Private Trade. At a time these debates on ‘non-tributary mutual trade(非朝貢互市)’ were growing, Portugal timely came to China. However, expressing antipathy to the attitude and power of Portugal, Ming Authorities ceased its ‘non-tributary mutual trade’ and returned to ‘tributary system monism(朝貢一元論)’ firmly. In this process, The Tamao battle broke out. Also, this naval battle was served as a momentum to make ‘tributary system monism’ as a basic principle for foreign policy of Ming Dynasty firmly. Giving up the legal trade with China, Portugal caused many troubles such as a secret trade along the coast in China, joining with Japanese. In order to embrace them in a system, Ming Authorities had no choice but to choose the openning of Yue-Port(月港). From Ming’s perspectives, it was not a full permission to Private Trade but a series of trial to recover the marine order in a way of embracing Portugal as a ‘non-tributary mutual trade(非朝貢互市)’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 1년차 : 「戰爭과 使節 : 屯門海戰과 明朝의 對外政策變化」

    1521년‧22년에 걸친 屯門海戰을 통하여 고아와 말래카를 점령한 뒤에, 다시 중국에서 합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포르투갈의 장기적인 의도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시대가 개막된 이래 포르투갈이 해상에 진출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최초로 직면한 군사적인 패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투갈 선박은 결국 寧波 부근의 雙嶼 등으로 진출하여 왜구와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즉 둔문해전의 패배는 장래 포르투갈의 對동방진출이 갖는 성격을 크게 변모시켰던 것이다. 1570년 전후에는 민간 상선이 장주(漳州) 해징현(海澄縣)에서 동남아시아로 도항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됨으로써, 포르투갈인에 의해 마카오-나가사키 교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明初의 대외정책은 ‘조공=해금정책’이라는 ‘조공일원론’이었으나, 대외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점차 互市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互市는 어디까지나 市舶司를 통한 교역으로 일정한 세금(抽分)을 징수하는 것으로서, ①조공에 수반한 호시(‘朝貢互市’)와 ② 조공을 수반하지 않는 호시(‘非조공호시’)로 구분할 수 있다. 명중기 그 규모가 커진 호시는 ②이지만, 어디까지나 시박사를 통한다는 점에서 사무역과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非조공호시론이 확대되고 있는 시기에 마침 포르투갈이 중국에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태도나 위세에 반감을 드러낸 명조정에서는 非조공호시를 철회하고 다시 강경한 ‘조공일원론’으로 회귀하였다. 그 과정에서 屯門海戰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해전을 계기로 명조정 역시 ‘조공일원론’이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과의 합법적 무역을 단념한 포르투갈은 중국 연해에서 밀무역을 일삼고 왜구와 손을 잡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계속 일으켰고, 이를 체제내에 포섭하기 위하여 결국 月港開港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는 명조정의 입장에서는 전면적으로 사무역을 허용했다기 보다도, 非조공호시론에 다시 입각하여 포르투갈 등을 체제 내로 포섭하여 해상질서를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2) 2년차 :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貿易의 盛衰」

    1521년과 22년의 둔문해전을 거쳐 浙江省 雙嶼港을 중심으로 비합법적·약탈적 무역을 진행하던 포르투갈은 1557년 명조의 허락을 얻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다. 1571년 규슈의 나가사키가 개항하게 되면서 마카오-나가사키 루트가 성립되었다. 즉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는 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인도의 고아를 거처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극히 광대한 범위까지 미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對동아시아 네트워크의 성쇠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 네트워크에서 거래되는 상품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하자. 리스본으로부터 고아를 거쳐 마카오로 운반되는 물품으로는 후추, 蘇木, 상아, 단향, 은(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포르투갈산이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이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의 각국에서 생산되는 모직물, 수정, 유리제품, 시계, 적색 의료 직물, 기계제품들을 고아, 말래카, 소순다 열도 등에 판매하고 그곳의 물산을 구매해서 마카오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중에서 은이 가장 많았다.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운반된 화물은 은(銀)이 위주이고, 어떤 통계에 따르면 1585년-1630년의 45년간에 1489.9만냥에 달하고, 연평균 135.만량에 이르렀다. 1636년 나가사키에서 반출된 백은의 수량은 이 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향한 포르투갈배는 4척으로 그 운반된 수량은 245만냥에 달하였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1599-1637년에 걸쳐 그 수량은 5,800만냥에 달하였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한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커다란 적수가 나타났으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였다. 1520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對아시아 무역은 16세기 후반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17세기 초 서양으로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적수를 맞이하여 커다란 어려움을 맞이하였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역상대인 일본으로부터 추방되면서 對아시아 무역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본이 아닌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그 중심을 전환하였다. 그 이후, 동아시아 역내 무역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타이완-나가사키를 잇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그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 활용계획

    첫 번째, 명청사 연구 대상의 확대 : 동양사의 대표적인 학회인 동양사학회에서 올해 2014년 동계연토회에서는 󰡔동아시아의 바다, 그 열린 공간과 교류󰡕라는 주제하에서 동아시아 해양교류사에 대한 연토회가 열릴 정도로 현재 해양사에 관한 관심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동아시아 삼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따름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바다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동남아시아인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던 ‘열린 공간’이었다. 다만 아직까지 한국학계에서는 관심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까지 한국학계에서 16세기 포르투갈과 동아시아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논문은 없는 것이 실정이다. 현재 명청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현재 新淸史(New Qing-History)로 인하여 만주어 사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음에 비해서, 명대사 연구에서는 그만큼의 새로운 시각이나 자료가 발굴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연구대상을 개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 : 동양사학계와 서양사학계의 소통을 통한 진정한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istory)’의 제시 : 서양사학계에서는 대항해시대에 대한 논의가 다수 제시되어 왔지만, 대체로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논의되었을 뿐, 16세기 포르투갈이 동아시아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비해서 서술이 극히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 일례로 주경철, 󰡔대항해 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서울대출판부, 2008)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제2장 1절 “에스타도(Estado) : 포르투갈의 해외 거점제국”이라는 절 하나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고, 對중국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서술하고 있지 않고 있다.
    반면 동양사학계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포르투갈의 역할에 대해서는 ‘서양 왜구’정도로 간단히 축소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서양사학계에 기대하는 것이 또한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경제(world economy)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그에 상응할 만한 통섭적인 견해를 제시하지 못해 왔던 것이다. 본 연구는 서양인 포르투갈 제국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과 그리고 그에 따른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대응을 살펴 봄으로써, 동양사학계와 서양사학계의 소통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또한 2년차 연구과제인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貿易의 盛衰」 속에서는 이제까지 각각 논의되어 온 포르투갈 – 중국 무역과 포르투갈 – 일본무역을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동아시아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세 번째, 16세기에 대한 재조명 : 17세기 동아시아는 1636년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1644년 明淸交替나 1603년 일본 에도막부의 성립 등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기였다. 때문에 이 시기의 변동을 규명하기 위하여 다수의 논의들이 나와 있고 그 변동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애트웰의 ‘17세기 위기론’ Atwell, W. S., "A Seventeenth-Century 'General Crisis' in East Asia?", Modern Asian Studies, 24-4, 1990.
    등이 나와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단초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16세기 초반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1543년 포르투갈의 철포전래나 1557년 마카오 조차 등의 16세기 중반에는 어느 정도 주목이 이루어졌으나, 16세기 초반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를 통하여 16세기 명대 중국과 동아시아 해역질서에 대한 새로운 재조명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 색인어
  • 명대, 은무역,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제국, 마카오, 남만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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