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년차 : 「戰爭과 使節 : 屯門海戰과 明朝의 對外政策變化」
1521년‧22년에 걸친 屯門海戰을 통하여 고아와 말래카를 점령한 뒤에, 다시 중국에서 합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포르투갈의 장기적인 의도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시대가 개막된 이래 포르투갈이 해상에 ...
1) 1년차 : 「戰爭과 使節 : 屯門海戰과 明朝의 對外政策變化」
1521년‧22년에 걸친 屯門海戰을 통하여 고아와 말래카를 점령한 뒤에, 다시 중국에서 합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포르투갈의 장기적인 의도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시대가 개막된 이래 포르투갈이 해상에 진출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최초로 직면한 군사적인 패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투갈 선박은 결국 寧波 부근의 雙嶼 등으로 진출하여 왜구와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즉 둔문해전의 패배는 장래 포르투갈의 對동방진출이 갖는 성격을 크게 변모시켰던 것이다. 1570년 전후에는 민간 상선이 장주(漳州) 해징현(海澄縣)에서 동남아시아로 도항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됨으로써, 포르투갈인에 의해 마카오-나가사키 교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明初의 대외정책은 ‘조공=해금정책’이라는 ‘조공일원론’이었으나, 대외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점차 互市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互市는 어디까지나 市舶司를 통한 교역으로 일정한 세금(抽分)을 징수하는 것으로서, ①조공에 수반한 호시(‘朝貢互市’)와 ② 조공을 수반하지 않는 호시(‘非조공호시’)로 구분할 수 있다. 명중기 그 규모가 커진 호시는 ②이지만, 어디까지나 시박사를 통한다는 점에서 사무역과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非조공호시론이 확대되고 있는 시기에 마침 포르투갈이 중국에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태도나 위세에 반감을 드러낸 명조정에서는 非조공호시를 철회하고 다시 강경한 ‘조공일원론’으로 회귀하였다. 그 과정에서 屯門海戰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해전을 계기로 명조정 역시 ‘조공일원론’이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과의 합법적 무역을 단념한 포르투갈은 중국 연해에서 밀무역을 일삼고 왜구와 손을 잡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계속 일으켰고, 이를 체제내에 포섭하기 위하여 결국 月港開港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는 명조정의 입장에서는 전면적으로 사무역을 허용했다기 보다도, 非조공호시론에 다시 입각하여 포르투갈 등을 체제 내로 포섭하여 해상질서를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2) 2년차 :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貿易의 盛衰」
1521년과 22년의 둔문해전을 거쳐 浙江省 雙嶼港을 중심으로 비합법적·약탈적 무역을 진행하던 포르투갈은 1557년 명조의 허락을 얻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다. 1571년 규슈의 나가사키가 개항하게 되면서 마카오-나가사키 루트가 성립되었다. 즉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는 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인도의 고아를 거처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극히 광대한 범위까지 미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對동아시아 네트워크의 성쇠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 네트워크에서 거래되는 상품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하자. 리스본으로부터 고아를 거쳐 마카오로 운반되는 물품으로는 후추, 蘇木, 상아, 단향, 은(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포르투갈산이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이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의 각국에서 생산되는 모직물, 수정, 유리제품, 시계, 적색 의료 직물, 기계제품들을 고아, 말래카, 소순다 열도 등에 판매하고 그곳의 물산을 구매해서 마카오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중에서 은이 가장 많았다.
포르투갈과 일본과의 무역에 대해서는 시기순으로 각각 나뉘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처음 포르투갈이 일본과 접촉했던 시기는, 당시의 일본이 오닌(應仁)의 난 이후, 통일정권이 붕괴되어, 각 지역의 다이묘가 자립하면서 서로 경쟁하던 시기였고, 뒤에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치면서 점점 해외 무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운반된 화물은 은(銀)이 위주이고, 어떤 통계에 따르면 1585년-1630년의 45년간에 1489.9만냥에 달하고, 연평균 135.만량에 이르렀다. 1636년 나가사키에서 반출된 백은의 수량은 이 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향한 포르투갈배는 4척으로 그 운반된 수량은 245만냥에 달하였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1599-1637년에 걸쳐 그 수량은 5,800만냥에 달하였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한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커다란 적수가 나타났으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였다. 숭정14년(1641)에 네덜란드인이 말래카를 점령하고 그 선단이 남양해역의 항로를 장악하면서 마카오와 고아의 교통로가 막히게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포르투갈인을 인도로부터 쫓아내고 아시아 지역의 전체 무역과 운송을 독점하면서 서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이 70여년간 경영해온 마카오와 고아·리스본의 무역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對아시아 무역은 16세기 후반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17세기 초 서양으로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적수를 맞이하여 커다란 어려움을 맞이하였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역상대인 일본으로부터 추방되면서 對아시아 무역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본이 아닌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그 중심을 전환하였다. 그 이후, 동아시아 역내 무역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타이완-나가사키를 잇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그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