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798/99년 일어난 한 사건을 역사적, 문헌적, 철학적 방법으로 접근해 ① 구체적 사실 관계를 정리하고, ② 관련 인물들의 문헌에 담긴 사상 체계를 재구성하며, ③ 논란의 쟁점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분석해, ④ 그 현대적 함축과 적용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을 내 ...
본 연구는 1798/99년 일어난 한 사건을 역사적, 문헌적, 철학적 방법으로 접근해 ① 구체적 사실 관계를 정리하고, ② 관련 인물들의 문헌에 담긴 사상 체계를 재구성하며, ③ 논란의 쟁점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분석해, ④ 그 현대적 함축과 적용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① 이를 위해 우선 ‘무신론 논쟁’의 정확한 일지 및 정황을 확인하였다. 쿠노 피셔의 피히테 연구와 베르너 뢰르, 욜란다 에스테스 등을 주로 참고하여, 그 복잡한 내용을 최대한 자세히 역사적으로 정리하였다.
② 이 논쟁에 직접 관여한 주요 인물들의 일차 문헌 연구를 하였는데, 누구보다도 피히테의 글이 가장 큰 주목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철학저널』에 실려 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거」, 이로 인해 불거진 갑작스러운 비난 여론에 대해 피히테가 강경하게 답변한 「대중에게 호소함」이란 글, 그리고 재판을 앞두고 피히테가 작성한 변론서가 가장 면밀한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 밖에도 동시대에 출간된 에버하르트(「피히테 교수와 적대자들의 논쟁점을 보다 정확히 규정하려는 시도」), 야코비(「피히테에게 보낸 편지」), 라인홀트(「신에 관한 믿음에 관해 라바터와 피히테에게 보내는 공람서한」), 슐라이에르마허(「종교론」)의 관련 문헌 등도 참고할 일차문헌이었다. 또한 예나를 떠난 피히테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생각을 정리한 글(「회상, 답변, 의문」)도 연구하였다.
③ 특히 본 연구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분석하려는 것은 피히테의 작품인데, 여기에 담긴 그의 종교철학을 추출함에 있어 본 연구에서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이성적 윤리신학과의 본질적 동일성에 주안점을 둘 생각이다. 물론 피히테의 종교철학이 칸트의 종교철학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고, 여러 측면에서 다분히 피히테다운 개성을 드러내는 변형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심층부에는 분명히 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본 연구자 혼자만의 해석이 아니라, 피히테를 대적했던 당대 인물들, 예컨대 야코비 같은 사람이 공유했던 확신이었다. 우리가 무신론 논쟁에서 만나게 될 피히테는 칸트가 뿌린 종교철학의 씨앗이 발아하여 성장해 커다란 나무로 자란 모습인 것이다.
적대자의 문헌 중에서는 특히 야코비의 글 「피히테에서 보낸 서한」이 관심 대상이다. 이 문서는 ‘허무주의’(Nihilismus)란 단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으로도 유명한데, 야코비는 이 단어가 바로 피히테가 역설하는 종교철학 및 칸트 초월철학의 미래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보았다. 과연 종교가 윤리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윤리가 종교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지 문제에 있어서도 야코비는 칸트-피히테 진영에 가장 적대적인 맞수였다.
④ 칸트와 피히테가 주장한 이성적 도덕 신앙, 그리고 이에 기초해 수립될 윤리종교는 당시 무신론 논쟁에서는 국가 권력의 압박에 의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강제로 베어버림을 당하고 말았는데, 과연 그런 비극적 결말이 그 사상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오히려 현대로 올수록, 그리고 우리 같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현실적으로 다수의 종교가 평화 공존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특정 종교에 입각한 윤리보다는, 보편적 실천이성에서 나온 윤리가 더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현실적, 실천적 고민이 본 연구를 추진시킨 배후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