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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종교 – 1798/99년 무신론 논쟁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윤리와 종교 – 1798/99년 무신론 논쟁 연구 | 2016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안윤기(장로회신학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6S1A5A8019739
선정년도 201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10월 1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서양 문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는 1800년 어간 독일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역사적-문헌학적으로 조명해 우리 학계의 지식을 확충하고, 그 논쟁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추출하여,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함을 목표로 한다. 연구 대상은 1798/99년 피히테를 둘러싸고 벌어진 ‘무신론 논쟁’이다. 액면상의 논점은 단순하다. 피히테, 그리고 그의 제자였던 포어베르크가 표방한 종교철학이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피히테는 아니라고 맞섰고, 에버하르트, 야코비 등은 피히테 주장이 무신론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도덕적 해이와 숙명론, 허무주의, 무정부 상태로 치닫게 된다고 경고했다. 결국 이 사건은 사법 당국이 개입해 피히테를 정죄하고, 그가 예나 대학의 교수 자리를 내놓고 떠나는 것으로 종결된다.
    단순히 표면적인 사건 전개만 나열하면 별 의미 없어 보이겠지만, 이 사건의 심연에 흐르는 논란의 촛점은 칸트의 종교철학, 곧 ‘윤리에 기초한 종교가 가능한가’ 여부에 있었다. 약간의 변형은 가했지만, 피히테 등이 주장한 핵심 내용은 거의 칸트의 생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윤리에 기초한 신학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신론, 내지 반(反)종교를 주장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고, 도리어 계몽시대 이후 모든 것을 새로이 자리매김 하는 이 시점에 윤리와 종교의 관계도 기존과는 다르게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적대자들은 피히테 등이 칸트에 힘입어 주장하는 것처럼 윤리와 종교의 관계가 정립되면, 거기서 수립된 종교는 실상 제대로 된 종교도 아니고, 또 종교가 붕괴되면 마땅히 그에 의거해야 할 윤리도 붕괴되기에, 결국 매우 반사회적인 부정적 결과가 도출된다고 보았다. 요컨대 비록 적대자들이 피히테의 주장을 문제 삼았지만, 그들의 최종적 공격목표는 칸트의 윤리신학이었다. 이것을 승인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 두 진영이 일대 격돌을 벌인 것이 무신론 논쟁이었던 것이다.
  • 영문
  • This study aims to expand the knowledge of our scholarship by illuminating an event in 18th century Germany. The subject of the study is the ‘Atheism Controversy’, which took place around Fichte in 1798/99. The issue on the face is simple: Is the philosophy of Fichte atheistic? Fichte argued that he was not an atheist, but Eberhard and Jacoby warned that the Fichte’s claim is atheistic, and that it will lead to moral hazard, fatalism, nihilism, and anarchy. Eventually, the case ends with judicial authorities intervening and condemning Fichte, leaving him as a professor.

    Although it may seem meaningless to list only the development of superficial events, the focus of the controversy that flows through the depths of this event was whether Kant’s religious philosophy, d. i. the ‘religion based on ethics’, was possible. Although a few variations have been made, Fichte claims that Kant’s thought is not an exaggeration.

    They did not even dream of claiming atheism or anti-religion, and believed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ethics and religion should be re-established at a time of the Enlightenment, when everything is newly to settle. However, even if the relationship between ethics and religion could be established as the Fichte claims, that religion is not a proper one, and if the religion would be collapsed, the ethics to be based on it must be also collapsed, In the end, weI saw a very antisocial negative result. In short, even though the antagonists questioned Fichte's claim, their ultimate goal of attack was Kant’s ethical theology. It was the atheistic debate that the two camps had a clash on whether or not they could approve thi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798/99년 일어난 한 사건을 역사적, 문헌적, 철학적 방법으로 접근해 ① 구체적 사실 관계를 정리하고, ② 관련 인물들의 문헌에 담긴 사상 체계를 재구성하며, ③ 논란의 쟁점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분석해, ④ 그 현대적 함축과 적용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① 이를 위해 우선 ‘무신론 논쟁’의 정확한 일지 및 정황을 확인하였다. 쿠노 피셔의 피히테 연구와 베르너 뢰르, 욜란다 에스테스 등을 주로 참고하여, 그 복잡한 내용을 최대한 자세히 역사적으로 정리하였다.
    ② 이 논쟁에 직접 관여한 주요 인물들의 일차 문헌 연구를 하였는데, 누구보다도 피히테의 글이 가장 큰 주목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철학저널』에 실려 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거」, 이로 인해 불거진 갑작스러운 비난 여론에 대해 피히테가 강경하게 답변한 「대중에게 호소함」이란 글, 그리고 재판을 앞두고 피히테가 작성한 변론서가 가장 면밀한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 밖에도 동시대에 출간된 에버하르트(「피히테 교수와 적대자들의 논쟁점을 보다 정확히 규정하려는 시도」), 야코비(「피히테에게 보낸 편지」), 라인홀트(「신에 관한 믿음에 관해 라바터와 피히테에게 보내는 공람서한」), 슐라이에르마허(「종교론」)의 관련 문헌 등도 참고할 일차문헌이었다. 또한 예나를 떠난 피히테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생각을 정리한 글(「회상, 답변, 의문」)도 연구하였다.
    ③ 특히 본 연구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분석하려는 것은 피히테의 작품인데, 여기에 담긴 그의 종교철학을 추출함에 있어 본 연구에서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이성적 윤리신학과의 본질적 동일성에 주안점을 둘 생각이다. 물론 피히테의 종교철학이 칸트의 종교철학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고, 여러 측면에서 다분히 피히테다운 개성을 드러내는 변형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심층부에는 분명히 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본 연구자 혼자만의 해석이 아니라, 피히테를 대적했던 당대 인물들, 예컨대 야코비 같은 사람이 공유했던 확신이었다. 우리가 무신론 논쟁에서 만나게 될 피히테는 칸트가 뿌린 종교철학의 씨앗이 발아하여 성장해 커다란 나무로 자란 모습인 것이다.
    적대자의 문헌 중에서는 특히 야코비의 글 「피히테에서 보낸 서한」이 관심 대상이다. 이 문서는 ‘허무주의’(Nihilismus)란 단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으로도 유명한데, 야코비는 이 단어가 바로 피히테가 역설하는 종교철학 및 칸트 초월철학의 미래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보았다. 과연 종교가 윤리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윤리가 종교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지 문제에 있어서도 야코비는 칸트-피히테 진영에 가장 적대적인 맞수였다.
    ④ 칸트와 피히테가 주장한 이성적 도덕 신앙, 그리고 이에 기초해 수립될 윤리종교는 당시 무신론 논쟁에서는 국가 권력의 압박에 의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강제로 베어버림을 당하고 말았는데, 과연 그런 비극적 결말이 그 사상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오히려 현대로 올수록, 그리고 우리 같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현실적으로 다수의 종교가 평화 공존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특정 종교에 입각한 윤리보다는, 보편적 실천이성에서 나온 윤리가 더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현실적, 실천적 고민이 본 연구를 추진시킨 배후 원동력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의 결과물은 ① 해당 사건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기술과 주요 일차문헌의 번역 및 해설이 담긴 한 권의 단행본과 ② 이성적 도덕신앙의 현실화 가능성을 적대자들과의 논박 속에서 가늠하는 연구논문으로 나올 것이다. 연구의 결과물은 서양 근대철학사를 다루는 대학 수업에서 사용할 수 있고, 철학 및 서양 문화사에 관심을 가진 학생과 일반인의 교양 증진에, 또 종교와 윤리의 건전한 관계 설정을 주제로 이루어질 토론에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색인어
  • 피히테, 무신론 논쟁, 윤리, 종교, 칸트의 윤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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