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카리브의 최남단에 위치한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서 태어나 십대 후반에 북미 캐나다(Canada)로 이주한 흑인여성작가 디온 브랜드(Dionne Brand, 1953-)의 첫 장편소설인 여기 아닌 또 다른 장소에서(In Another Place, Not Her ...
본 연구의 목적은 카리브의 최남단에 위치한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서 태어나 십대 후반에 북미 캐나다(Canada)로 이주한 흑인여성작가 디온 브랜드(Dionne Brand, 1953-)의 첫 장편소설인 여기 아닌 또 다른 장소에서(In Another Place, Not Here, 1996)에 나타난 흑인 퀴어 디아스포라(Black Queer Diaspora)의 위치를 분석하는 데 있다.
비평가 다니테(Milan Danyté)는 브랜드가 작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명할 때 아프리카계 캐나다인(African Canadian)이나 카리브계 캐나다인(Caribbean Canadian)과 같은 용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항상 “흑인”(Black)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캐나다 문학계에서 정당하게 캐나다 작가로서의 올바른 입지와 평가를 받기 어렵다고 주장한다(37). 브랜드가 자신을 표명할 때 캐나다인이라기보다는 흑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캐나다 사회에 동화되거나 백인들과의 제휴와 동맹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는 제스처로 읽힐 수 있다. 브랜드의 작품에서 재현된 캐나다의 현실은 기존의 문학작품에서 일종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로 상상되는 캐나다와 사뭇 다르다. 캐나다에서 안전과 네이션은 동일어로 취급되고, 이곳은 다양한 민족의 삶을 제도적으로 안전하게 뒷받침해 주는 포용력있고 다문화주의를 실현하는 이상화된 공동체로서 재현된다. 그러나 캐나다의 현실은 “타자들”을 수용하는 “백인 국가”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여전히 규범적이고, 선하고 좋은 것은 백인성이며, 이러한 백인성이야말로 늘 캐나다인들이 꿈꾸고 갈망하는 바람직한 이상이자 모델로서 작용한다. 브랜드가 백인성과 캐나다 사회에 반기를 들며, 백인 사회와의 동화, 동맹, 제휴를 꺼려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공론의 장으로 확장시키면서 집 떠나기와 디아스포라의 경험, 더 나아가 소속감, 포스트식민, 인종과 계급, 이성애중심주의의 문제에 대해 백인중심의 에피스테메에 파열을 일으키고자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캐나다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인권과 관용을 강조하지만, 캐나다인으로서의 소속감을 지니기 위해서 흑인/타자의 몸이 학대받고, 오용되고, 훈육되고, 과도하게 단속되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브랜드에게 캐나다는 불편한 장소이자 저항해야 할 공간이 된다. 브랜드는 제3세계인들이 정치・경제적이고 자의적인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망명과 이주를 통해서 제1세계와의 제휴나 동맹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흑인이 경험한 디아스포라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과거 역사와의 소통을 통해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심문한다. 제1세대 망명과 이주를 경험한 작가들이 주로 고향땅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 브랜드는 과감히 거부한다. 흑인성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사고는 결국에 모든 것이 아프리카로 귀결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브랜드는 카리브 출신 이주 작가들의 글쓰기가 종종 현재 그들이 처해 있는 위치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단순히 과거를 향한 향수에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에 매우 비판적이다. 브랜드가 이처럼 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디아스포라에 대한 기존 담론과 비평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북미 캐나다와 카리브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사이에 낀 자신의 위치, 제1세계와 제3세계, 백인과 흑인, 강대국과 약소국, 식민과 피식민, 지배와 종속, 동화와 이화, 제휴와 단절, 귀향과 망명, 포섭과 배제, 사실과 허구, 역사와 픽션의 경계를 분열시키고 가로질러 서구 백인 중심의 인식론에 틈새와 균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사이에 낀 위치에 있는 브랜드가 기존 카리브 작가들의 글쓰기에서 보이는 서구 식민지배 담론을 와해시키고 전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강조했던 혼종성, 양가성, 흉내내기와 모방을 통한 저항을 수용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흑인 퀴어 디아스포라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은 채 “힘들고 곤란한 지리” 만들기를 지속하는가를 분석하였다. 즉 브랜드의 퀴어 디아스포라 내러티브는 백인유럽과 아메리카인들의 망명을 모델로 하는 잃어버린 기원을 향해 전형적으로 노스탤지어를 갈망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고향과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이민자들의 욕망 또한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 영향으로 브랜드의 표류하는 주체들은 소속을 향한 욕망의 대상과 그러한 욕망의 궤적의 형태를 다시 바꾸고자 시도하며, 탈중심화하기, 부유하기를 지속한다. 따라서 브랜드의 표류하기를 통해 역사에 대한 포기나 유기가 아닌 계급,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한 공유된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다층적인 역사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