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은 실재하지만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며, 물체에 부속된(parasitic) 존재로서 어디에나 존재한다. 2차원 표면에 난 구멍은 이를 둘러싼 물체에 의해 경계 지워진 빈 배경이지만, 일상 경험에서 구멍의 모양은 다른 물체만큼 쉽게 지각된다. 즉, 구멍은 형/배경 체제화 ...
구멍은 실재하지만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며, 물체에 부속된(parasitic) 존재로서 어디에나 존재한다. 2차원 표면에 난 구멍은 이를 둘러싼 물체에 의해 경계 지워진 빈 배경이지만, 일상 경험에서 구멍의 모양은 다른 물체만큼 쉽게 지각된다. 즉, 구멍은 형/배경 체제화의 깊이-형태 간 연결 관계(depth-shape coupling)를 예외적으로 위반하여, 깊이 상으로는 배경이지만 형태를 갖는 준-전경적(quasi-figural) 사례처럼 보인다.
구멍의 이러한 역설적 속성은 최근 10여 년간 많은 시지각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아왔으며, 구멍의 형태지각에 대한 최근 연구는 구멍이 다른 배경 영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대상인지, 구멍의 모양지각은 가능한지, 그리고 어떤 조건하에서 지각가능한지를 다뤄왔다. 그러나, 배경과 전경의 속성을 모두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구멍의 모순적인 양상은 선행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있으며, 이 모순적인 현상들을 통합할 수 있는 수렴적 이론이나 가설은 아직 도출되지 않고 있다.
본 연구는 다양한 지각적 실험 과제를 사용하여 기존 연구들이 규명하지 못한 구멍 형태 표상의 지각적 실재를 확인하고, 시지각과 관련된 여러 처리 과정(형태 확인, 시각주의, 시각 작업기억)에서 구멍과 물체 간 차이를 검토하여 구멍 표상의 지각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연구 1은 방법론적인 제약으로 인해 구멍의 전역적 모양 지각 여부를 직접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선행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언어심리학 분야에서 잘 알려진 부바/키키(Bouba/Kiki) 패러다임을 사용하여 구멍의 지각적 표상의 현상학적인 실제를 확인하였다. 연구 1의 결과는, 구멍 윤곽선의 곡률(오목 또는 볼록)은 구멍을 둘러싼 물체의 관점에서 지각됨에도 불구하고, 물체에서와 마찬가지로 구멍의 모양 또한 그 내부에 할당됨을 보여준다.
연구 2는 시각 주의(visual attention) 분야에서 잘 알려진 주의 선택에 따른 동일 물체 이득(same object advantage) 효과가 구멍에서도 관찰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연구 결과, 직사각형 구멍의 한쪽 끝을 주의하게 되면, 반대쪽 끝에 제시되는 표적에 대한 반응시간이 빨라지는 동일 대상 이득이 관찰되었다. 이 결과는 구멍도 일반적인 물체와 마찬가지로 주의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 3은 변화탐지 과제를 사용하여 시각작업기억 부호화 시, 구멍의 윤곽선 속성(방향이나 형태)이 구멍을 둘러싼 물체의 표면 속성과 통합적으로 처리되는지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구멍이 있는 물체 조건에서는 물체 중심적 처리 이득이 관찰되지 않았으며, 이는 구멍의 경계선이 둘러싼 물체에 할당됨에도, 구멍의 방향이나 형태는 물체의 표면 속성과 통합적으로 부호화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처리됨을 시사한다.
이상의 결과는 구멍의 윤곽선이 에워싼 물체에 할당됨에도 불구하고, 구멍의 지각적 표상이 존재하며 이 표상이 다른 시지각 및 인지적 과정에 영향을 주는 기능적 표상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구멍의 형태 지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형태 지각의 첫 단계인 전경-배경 조직화 과정 이후의 추가적인 처리과정에 대한 가설이 요구된다. 우선, 경계선의 부분들에 대한 국지적인 전경-배경 조직화 이후, 구멍 전체의 형태에 대한 지각적 처리가 일어날 가능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구멍 윤곽선의 부분들이 국지적으로는 외부 물체에 할당될지라도, 모서리 통합 과정의 창발적 속성(emergent feature)으로서 구멍 전체의 형태가 표상될 수 있다. 둘째로, 전경-배경 조직화 기반의 표면 표상과 독립적인 표상으로서 닫힌 영역이 구멍 지각에 기여할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구멍은 전경/배경 조직화의 원리를 연구하는데 이상적인 자극일 뿐만 아니라, 주의 선택의 기제와 시각작업 기억 부호화 기제 등을 테스트하는 데에도 유용한 자극으로서, 본 연구의 결과는 주의 선택과 시각 작업기억 등의 시지각 처리 과정에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