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유교책판에 보이는 각수 기록에 의거하여 조선시대 문집이나 족보 등을 판각한 각수의 정보와 각수의 활동, 책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판각 과정상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한 문집 간행에 참여한 각수의 참여 인원과 ...
본 연구는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유교책판에 보이는 각수 기록에 의거하여 조선시대 문집이나 족보 등을 판각한 각수의 정보와 각수의 활동, 책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판각 과정상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한 문집 간행에 참여한 각수의 참여 인원과 각수별 판각 분량을 살펴보았다. 참여 인원은 비슷한 분량의 문헌이라 할지라도 차이가 많이 나타났다. 책판별 각수 1인당의 판각 분량은 비슷하거나 일정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을 새기는 각수와 많은 양을 새기는 각수의 편차가 있었다. 유일하게 『매헌집』의 경우 각수 한 명이 한판씩만 판각한 특이한 경우이다. 『밀암집』은 48권 24책으로, 89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하여 조사된 책판 가운데 참여 각수가 가장 많은 경우에 해당된다. 『회당집』은 43권 21책 분량으로 33명의 각수가 참여하여 한 명의 각수가 최대 72판을 판각하여 조사된 책판 가운데 한 명이 가장 많이 판각한 경우에 해당된다.
판각상 특징으로 대부분의 책판은 앞뒤로 홀수로 된 연속된 장차이지만 같은 권차에서 마지막 장이 홀수로 끝나게 되면 나머지 한 면은 다른 권의 홀수인 마지막 장차와 함께 판각하였다. 이것은 공판을 활용하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거의 모든 종류의 책판에서 나타난다. 또한 한판의 전후면을 2명의 각수가 판각한 것, 한 문집의 책판 뒤에 다른 문집이 판각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동일한 주체가 주관하여 판각하고, 책판을 보관해오다가 다른 책판을 판각할 때 한 면이 모자라 이전에 판각한 책판의 한 면을 활용한 것이다. 또한 각수가 새김에 실수가 있을 때 다른 책판의 반면이나 새로운 책판에 새겼으며, 실수한 책판에는 ‘불용(不用)’이라 표기하여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있었다.
책판 표기를 근거로 하여 각수의 판각 활동을 살펴보았다. 각수의 당대 판각 활동으로 민간 각수중 가장 장일재는 『퇴계집』, 『지헌집』, 『만곡집』, 『번암집』, 『후산집』, 『경정집』, 『상변통고』, 『학고집』, 『취사집』, 『우헌집』, 『옥봉집』 등의 판각에 참여하였으며, 정덕인은 『근사록』, 『하당집』, 『남병집』, 『학호집』, 『퇴계집』, 『포헌집』, 『간재속집』, 『상변통고』, 『취사집』, 『우헌집』, 『파산일고』, 『입재집』, 『학고집』, 『송월재집』 등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중엽까지 많은 문헌의 판각에 참여하였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문집이나 족보의 간행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사찰 각수의 민간 활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사찰 각수 중 원민은 안동 광흥사 소속으로 『안동권씨세보』(1794)의 판각 작업을 총지휘한 책임자였다. 그는 『안동권씨세보』, 『근시재집』, 『운암일고』, 『졸재집』, 『하지집』, 『겸암집』, 『칠봉집』, 『눌은집』, 『항재집』, 『송암속집』, 『하당집』, 『남병집』, 『학호집』, 『예의보유』, 『만곡집』, 『지헌집』, 『개암집』, 『노애집』 등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당대 뛰어난 각수였다. 보혜는 『교남빈흥록』, 『함계집』, 『백운재충의공실기』, 『구암집』, 『안동권씨세보』 등의 판각에 참여하였다. 기타 『역학도설』 책판에 표기된 각수 중 ‘혜영’의 경우 1637년 통도사에서 간행된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의 판각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양산 통도사 소속의 각승인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