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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開城 厚陵 건설의 정치사적 의미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조선초기 開城 厚陵 건설의 정치사적 의미 | 2016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윤정(진주교육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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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6S1A5A8018630
선정년도 201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10월 0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靖安君(태종)은 정종의 世子로 책봉되었다. 신료들은 同母弟를 세자로 삼은 전례가 없음을 들어 王太弟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정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는 입장을 관철하였다. 정종은 선위교서에서 자신이 태조의 嫡長子로서 즉위하였고, 스스로 세자에게 양위하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즉위 후 태종은 정종을 상왕으로, 정종비는 大妃로 추봉하였다. 태종이 대비의 책문에서 ‘母儀’와 ‘子道’를 강조한 것은 의례적으로 母子관계가 수립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상왕과 대비가 전면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정종은 仁德宮에서 거처하며 사신을 위한 연회를 여는 등 정치적 역할을 하였지만 그에 대한 견제도 필수적이었다.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 환도하는 데에는 개성에 형성된 정종의 세력을 의식한 측면도 있었다. 실제 한양 천도 후 정종의 위상이 저하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것은 대비 정안왕후의 위상 변화를 통해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정안왕후는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에도 중전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태종의 즉위로 조선왕조의 첫 번째 대비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壽昌宮이 소실된 이후에는 內殿의 연회는 물론 중궁의 책봉례와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도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행사가 태종이 머물던 敬德宮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행사에 참석할 여지가 차단되었던 것이다.
    상왕과 대비의 위상 약화는 대명관계에서 두드러졌는데 정종이 즉위 당시 명에 “세자로 國事를 署理”할 것을 허가 받은 權知國事였기 때문이었다. 명은 태조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태종이 즉위하였고 그의 아들인 元子의 존재까지 인지하면서 태조-태종-원자로의 계승구도를 당연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왕의 책봉을 받지 않은 정종의 위상이 약화되고 대비의 역할도 사실상 부정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환도와 함께 정종이 한양의 私第로 돌아오면서 가속화되었다. 상왕과 대비를 위한 제도적 기반은 유지되었지만 정부의 공적 관리 아래 두어 권한을 약화시켜 나갔다. 대비로서 정종비의 권위를 하락시킨 결정적인 조치는 태종 6년 태조의 후궁을 誠妃로 책봉한 것이었다. 태종은 大妃를 封崇하는 禮文에 따라 책봉의례를 성대하게 시행하고 옥책과 금보를 올려 왕비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성비는 태조의 배필이므로 명분상 정종비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이를 통해 건국 후 유일한 대비로서의 위상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정종비는 태종 12년 사망하였는데 ‘定安王后’로 尊諡하고 ‘厚陵’으로 능호를 정한 뒤 개성에 능을 건설하였다. 태종은 사망 당일부터 禮葬 때와 啓殯 등의 제사를 모두 행하고 상여를 발인할 때 서대문 밖까지 직접 배웅하고 상례를 마무리 짓고 연회를 베푸는 등 상례의 모든 과정에서 상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역할은 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永安君(정종)이 태조의 세자로 책봉된 후 즉위하고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정안군(태종)이 정종의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한 때문이었다. 정변으로 정종과 태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그의 비는 세자빈으로 책봉된 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종묘의 제사를 받드는” 冢婦로서 嫡妃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후계구도에서 嫡妃인 母后의 위상은 왕위 정당성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례과정에서 정안왕후가 가지는 위상을 명에 그대로 알릴 수는 없었다. 이에 대비를 ‘兄妻’나 ‘母’라 칭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태종의 즉위 명분이 가지는 난점을 반영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태종이 이러한 명분적 제약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지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정안왕후의 축문에서 드러난다. 축문에서는 형제로서 왕위에 오른 송 태종의 사례를 준용하여 ‘孝子’라는 칭호를 회피하고 공식적인 의미의 ‘國王’으로 처리하여 ‘大妃’와 조응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태종이 정종의 왕위를 이었다는 의미만 나타날 뿐, 그의 아들이 되었다는 명분은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는 태종이 혈연에 따라 정종의 동생으로 환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안왕후와의 관계를 형수로 복원한다고 해도 그의 적비로서의 위상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러한 명분은 태조의 嫡長子로서 즉위하고 嫡長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태종은 정종의 뜻에 따라 상례를 진행하였는데, 후릉의 건설한 것 역시 정종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상례가 끝나고 정종은 후릉의 건설을 둘러보는데 齊陵 참배를 연계하였다. 태종 4년에 세워진 제릉비에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적장자로서의 정종의 위상과 정종과 대비 사이에 적자가 없어 태종을 세자로 삼았다는 태종의 즉위 명분을 충실히 정리하였다. 또한 신의왕후가 正嫡으로 응당 왕비가 되었어야 하는데, 개국에 앞서 사망함으로써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태조 2년 세워진 태조의 부친 환조의 定陵碑에는 신의왕후에 대해 적비로서의 위상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제릉이 모후의 적비로서의 위상을 통해 정종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종으로서는 제릉에 각별한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었고, 태종도 이를 부정할 수 없었다. 개성 환도기 정종과 태종 모두 지속적으로 제릉을 참배하였으며,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端午와 秋夕의 제사는 정종이 지냈다. 이것은 신의왕후의 장자라는 위상에 따른 것이었다.
    신의왕후가 적비로서 정종의 왕위 계승을 보증하는 논리는 정안왕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정안왕후의 졸기에 “上王의 嫡妃”임을 명시한 것은 태종의 왕위 계승이 이로부터 연원하기 때문이다. 상례 당시 정종이 정안왕후의 七齋를 위해 開慶寺에 유숙하였는데, 이는 정안왕후가 태조의 제사를 맡는 冢婦의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시어머니인 신의왕후와의 관계에도 적용되어 제릉과 후릉의 여러 의례를 연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신의왕후와 정안왕후의 관계를 드러냈다.
    결국 정종이 후릉을 한양이 아니라 개성에 조성한 것은 이곳에 있는 제릉과의 연계를 도모한 것으로서 이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즉위 명분을 부인의 상례를 통해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영문
  • This article centers on the political meaning connoted in construction of Hurung Royal tomb which was the tomb of King Jeongjong(定宗) and his wife Queen Jeongan Whang hu(定安王后), built through King Taejong-Saejong(世宗) period, and the next paragraph is abstract of the discussed contents.
    Jeongangun who came to power through the Second Strife of Princes was proclaimed the crown prince of King Jeongjong who was his older brother, and ascended to the throne. As he proclaimed King Jeongjong as the abdicated king and the queen as queen dowager(大妃) after his ascending the throne, blood relationship with sister-in-law turned to the ritualistic mother-son relationship. Justifying that the queen of King Jeongjong didn't have the son as the cause, King Jeongjong made his older brother as his son. This cause is intactly extension of the logic that King Jeongjong who denied the successor selection of his father, King Taejo(太祖) through the First Strife of the Princes justly succeeded to the throne as his primogeniture.
    Going through this political course, status of the queen mother was embossed as important element in regard to the throne legitimacy of the heir. Because of that, when Queen Jengan Whang hu died in the 12th year of King Taejong's reign, he built Hurung Royal tomb, tomb of Queen Jeongan Whang hu in Gaeseong even though he made Geonwolleung Royal tomb(建元陵), tomb of King Taejo close by Hanyang(漢陽) after he returned to Hanyang. As building Hurung Royal tomb close by Jeleung Royal tomb(齊陵), tomb of Queen Sinyi Whang hu(神懿王后) who was the mother of King Jeongjong and Taejong, he emphasized status of the queen and tried to rationalize the legitimacy o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with King Taejo, Jeongjong and Taejo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태종-세종대 개성에 건설된 定宗과 그의 비 定安王后의 무덤인 厚陵의 조성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태종대 정안왕후의 상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靖安君(태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는 정종의 입론에 따라 世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태종은 정종을 상왕으로, 정종비를 大妃로 추봉하였는데, 상왕과 부자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대비와는 의례적으로 母子관계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상왕과 대비가 전면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權知國事에 머물렀던 정종의 위상은 대명관계에서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태조의 후궁이 誠妃로 책봉되어 왕비의 위상이 부여됨으로써 유일한 대비로서의 위상도 약화되었다.
    정종비는 사망 후 ‘定安王后’로 시호가 정해지고 ‘厚陵’이 개성에 건설되었다. 태종은 사망 당일부터 제사를 모두 섭행하는 등 상례의 전 과정에서 상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례에서 ‘兄妻’나 ‘母’라 칭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 명에 대비의 사망을 알리지 않은 것은 嫡妃로서 태종의 母后라는 명분을 명에 그대로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정안왕후의 위상은 태조의 嫡長子로서 즉위하고 嫡長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에게 자신의 왕위정통성과도 관련되는 중요한 요소로서 후릉의 건설은 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정안왕후의 졸기에 “上王의 嫡妃”임이 명시되어 있는데, 태종의 왕위 계승이 이로부터 연원하기 때문이었다. 태종 4년에 세워진 齊陵碑에는 태조와 神懿王后의 적장자인 정종의 위상과 정종과 대비 사이에 적자가 없어 태종을 세자로 삼았다는 태종의 즉위 명분을 충실히 정리하였다. 또한 신의왕후가 正嫡으로 응당 왕비가 되었어야 하는데, 개국에 앞서 사망함으로써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정당화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端午와 秋夕의 제사를 정종이 직접 지낸 것은 신의왕후의 장자라는 위상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정종이 후릉을 한양이 아니라 개성에 조성한 것은 이곳에 있는 제릉과 여러 의례를 연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의왕후와 정안왕후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신의왕후의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즉위 명분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일차적으로 세종대 정종에 대한 예우와 그의 사후에 이루어진 후릉 합장에 대한 연구의 토대가 될 것이다, 아울러 다음 분야에 그 결과물을 활용할 수 있다.
    첫째,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시야의 확대이다. 조선 건국의 정치사는 연구사적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답보 상태에 있다. 이는 먼저 실록 기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부족하여 태종 중심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종대의 인식임에도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의 정치 활동에 대한 이해는 창업주인 태조와 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정종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고려말 신흥사대부의 성장과 분화, 급진파 사대부리 조선 건국이라는 구도에 머무르면서 국왕의 역할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 점도 지적된다. 근래 조선 정치사에서 국왕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점에서 조선초기에도 그러한 방법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후릉을 대상으로 한 태종의 정치적 행위를 조망하는 것이지만, 이는 결국 정종에 대한 태종의 정치적 부담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종의 정치적 의미를 찾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것은 태종 일변도로 되어 있던 조선초기 정치사 이해의 시각을 확장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태조-세종대 정치사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기반을 제공한다.
    둘째, 조선초기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이다. 세종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조선초기 정치사는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 분야가 되고 있다. 역사소설이나 사극 등으로 친숙한 시대이기도 하며, 최근에도 이 시기를 다룬 사극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태종과 정도전을 중심으로 시대를 그리는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고려말-조선초의 역사를 태종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권력을 차지한 태종과 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세종의 인식에 따른 것이다. 당시 역사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태조와 정종의 역할이 복구되어야 한다. 이에 본 연구의 성과는 사회 일반의 역사 이해를 새롭게 환기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왕릉의 정치사’라는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다. 왕릉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현 국왕의 정통성이나 정책과 관련하여 상징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왕은 선왕의 왕릉을 매개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표현하였다. 선왕을 매개로 자신의 권위와 정통성을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대로 해당 국왕, 또는 왕비를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의도를 드러낼 수 있었다.
    이 점에서 후릉 연구의 결과는 이후 왕릉 연구의 방향 설정과 방법론 구사에 원용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모든 왕릉은 저마다 정치적 맥락을 가진다. 그러한 맥락을 찾아내고 이를 효율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그만큼 조선시대 정치사 연구를 풍부하게 할 것이다. 기존의 정치서 연구는 지나치게 정치세력 위주로 전개된 면이 있는데, 왕조국가의 원리상 그것만으로 정치 상황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왕릉 연구를 축적해 나가면서 이를 연구서 및 대중서 등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開城, 厚陵, 太宗, 定宗, 定安王后, 世宗, 太祖, 建元陵, 漢陽, 神懿王后, 齊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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