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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冊封儀禮와 그 성격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한국 고대 冊封儀禮와 그 성격 | 2016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채미하(고려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7915474
선정년도 201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10월 25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글은 신라의 책봉의례가 지니고 있는 대내외적인 의미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책봉 전후에 행해진 사신의 왕래와 그 의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책봉을 전후하여 신라는 당에 고애사와 사은사를, 당은 조제 겸 책명사를 보냈다. 신라에서는 왕위가 교체될 때 전왕의 죽음을 알림과 동시에 책봉을 당에 요청하였다. 그리고 당은 고애사의 보고를 받은 후 대체로 그 다음해에 책명사를 보내 신라왕을 책봉하였고, 신라왕은 책봉에 대한 사은사를 당에 보냈다. 이와 같은 책봉을 전후하여 당과 신라는 사신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빈례를 포함한 다양한 의례를 행하였다. 신라는 당으로부터 오례를 수용하고 운용하였는데, 오례의 내용은 왕권의례로, 의례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책봉 授受를 전후하여 행해진 양국의 빈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하였다.
    책봉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세계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당은 책봉을 통해 책봉의 이념, 즉 천자국과 제후국에 대한 대외 질서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당 황제는 신라왕에게 책문, 관고, 정절, 예물 등을 보냈다. 책봉의 이념은 책문의 본문 내용과 책봉호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책봉호는 관고에도 있었다. 정절 역시 당 황제가 신라왕을 제후왕으로 여기는 표식이었다. 그리고 당 황제는 신라 중대에 왕을 책봉할 때 왕에게만 예물을 내렸다. 그런데 신라 하대에 들어와 왕 뿐만 아니라 왕 이하에게도 예물을 내려 그들에게도 책봉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신라 하대에 왕의 책봉호가 명예직으로 변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신라 역시 책봉의 주체국이기도 하였다.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에 책봉하고, 탐라의 조공을 받았다. 이와 같이 신라 역시 蕃國을 둠으로써 책봉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안승이 문무왕에게 보낸 표문의 형식은 문무왕이 당 고종에게 보낸 乞罪表와 비교된다고 하였다. 게다가 신라왕은 당의 책봉을 당연하게 여기고, 책봉을 받은 이후 사은사를 보내지 않기도 하였다. 애장왕은 당의 책봉 전에 왕모와 왕비를 책봉하고, 고애사 겸 책명사를 홀대하기도 하였다. 이로 볼 때 신라는 피책봉국이면서 책봉의 주체국이었으며 중국의 책봉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고 보았다.
  • 영문
  • This thesis is studying the political function that Chaekbong ceremoy had internally and externally. First of all, it is studies about the coming and going of envoys and its ceremony. Seeing the example of King Hyegong, Silla sent Goaesa and Saunsa to Tang around the time of Chaekbong, while Tang sent Chaekmyungsa concurrent Joje. And seeing the example of Tang’s envoy, Hyungsook in king Hyosung period, various ceremonies including Binrye were performed in the course of rendering and receiving Chaekbong between Silla king and Tang emperor. Such ceremonies performed around Chaekbong had political character, and the ceremonies had inseparable relation with Chaekbong.
    Chaekbong is an idea about Chinese centered order to world, so Tang emperor sent Chaekmun, Gwango, Jeongjeol, Yemul etc. to Silla specifying that Tang is Chenjaguk(emperor country) and Silla is feudal country(Beonguk). But Silla’s kings would take Tang Chaekbong for granted, not sending Saunsa after taking it. And Silla also became a owner of Chaekbong that king Munmu did a Chaekbong to king Bodeokguk, so Pyo sent by Ansung had the same form as Pyo sent from Silla toTang. King Aejang would take Jogong from Tamla. As these showed, Silla’s kings also tried to realize the idea of Chaekbong by placing BeonGuk.
    In the meanwhile, On his 6th king year, king Aejang took Chaekbong from Tang, and On his 9th king year, he asked for Chaekbongjoseo of his father, king Soseong. However king Aejang did chaekbong to the queen and king’s mother before Chaekbong from Tang and treated Chaekmyeongsa concurrent Goaesa poorly. King Aesjang broke out of pro-Tang foreign policy taking good foreign policy with Japan and seiged military power through his 5 years filing. Seen from this, king Aejang focused ruling power to king himself before his own ruling in his 6th king year. Begining his own ruling on this base, king Aejang did chaekbong to queen and king’s mother and could treat poorly chaekmyeongsa concurrent Goaesa from Tang, and Tang’s chaekbong rendered later was only a formal thing to hi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글은 신라의 책봉의례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기능을 대내외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책봉 전후에 행해진 사신의 왕래와 그 의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혜공왕의 예를 통해 신라는 책봉을 전후하여 당에 고애사와 사은사를, 당은 조제 겸 책명사를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효성왕대의 당 사신인 형숙을 통해서 당 황제와 신라 왕이 책봉을 授受하는 과정에서 빈례를 포함한 다양한 의례가 행해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책봉을 전후한 시기에 행해진 각종 의례는 당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책봉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이념으로, 당 황제는 신라 왕에게 책문․관고․정절․예물 등을 보내 당이 천자국(황제국)이며 신라는 제후국(번국)임을 明示하였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예물을 왕 이하에게도 내렸다. 하지만 신라왕은 당의 책봉을 당연하게 여기고, 책봉을 받은 이후 사은사를 보내지 않기도 하였다. 신라 역시 책봉의 주체국으로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책봉하였으며, 안승이 문무왕에게 보낸 表는 신라가 당에 보낸 乞罪表와 그 형식이 같았고 애장왕은 탐라의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왕역시 蕃國을 둠으로써 책봉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한편 애장왕은 왕 6년에 당의 책봉을 받았고 왕 9년에는 아버지인 소성왕의 책봉조서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애장왕은 당의 책봉에 앞서 왕비와 왕모를 책봉하고 당의 고애사 겸 책명사를 홀대하였다. 애장왕은 초기부터 대일본외교를 통해 친당 외교 일변도에서 벗어났고 애장왕 5년 대열을 통해 군사권을 장악하면서 왕 6년 親政에 앞서 애장왕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애장왕은 왕비와 왕모를 책봉하였고 당의 고애사 겸 책명사를 홀대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후 당은 왕을 비롯하여 왕모 등을 책봉하였지만 애장왕은 당을 견제하였는데, 이것은 일본과의 우호관계 지속이라든가 개혁정치에서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嘉禮 중 冊封儀禮를 통해 한국 고대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삼국 이래로 지식층에게 축적된 유교정치이념이 가례의 예론에 의한 왕권의 수립과 운영을 가능하게 한 시기는 고려시기부터였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가례체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그 절정은 조선시대로 대체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 고대 사회에도 가례는 수용되어 운용되었다.
    유교사상에서 禮는 현실의 질서를 규범적․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그 질서의 내용구조로 구현되면서 五禮, 즉 吉禮·嘉賓·賓禮·軍禮·凶禮의 형식을 갖고 역사에 나타나고 있다. 오례의 예론은 왕권과 왕실의 정치적 권위를 명분화하려는 광범한 유교정치이념의 내용으로부터 기초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왕권을 에워싼 사회계층의 정치질서 이론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교사상의 禮를 이해할 수 있다면 고대 역사를 움직인 여러 제도와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연구는 한국 고대의 嘉禮를 연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한국 고대 王者들이 정치적 권위와 명분을 내세우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것을 五禮 중 가례의 내용 중 책봉의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까지 책봉의례는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간의 사대 관계에서 조공이 반대로 급부로 주어지던 것으로 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본 연구는 한국 고대 冊封의례의 禮論이 한국 고대 사회에 수용되었고 그것이 한국 고대사회에도 운용되었음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한국 고대 책봉의례를 복원하고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자료는 그 양에서 무척 적다. 때문에 그 중요성이 점차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본 연구에서는 동시대의 국가, 문화 또는 같은 문화권에서 시대를 달리하면 남긴 자료들을 비교 검토하였고 한국 고대 가례에 대한 이해,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된 조공-책봉에 대해서도 살폈다.
    책봉의례는 嘉禮의 하나로, 한국 고대 책봉의례를 연구함으로써 한국 고대 가례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 질 것이며 이를 통해 한국 고대 유교사상을 특질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고대 책봉의례를 통해 당시 한국 고대사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 한국 고대인들이 설정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전근대 동아시아의 책봉의례에 대한 비교를 통해 한국사의 전개에서 한국 고대 책봉의례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책봉의례를 통해 한국 고대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한국 고대 역사의 여러 부분인 정치사나 경제사, 사회사 등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이해에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고대에서 정치나 경제, 사회의 제도와 질서는 바로 사상을 통해서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는 커다란 눈을 갖게 하는 것이다. 미래를 가능케 하는 현재 자신의 정체성은 과거 속에서 배태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설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사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 국가, 문화와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정체성을 이해함으로서 완성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 민족과 역사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한국사 교육은 완숙한 한국사 교육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 동안 한국사 교육에서는 우리 것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했을 뿐 우리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취약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주제는 한국사 교육에 있어서도 작은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본 주제는 작은 분야에 한정된 주제이지만 그것을 주변의 국가와 문화의 것들과 비교해 보고 왜 비슷한 역사적, 정치적 기반에서 하나의 문제를 서로 다르게 표현했는가 그 내용과 의미를 음미해 볼 수 있다면 한국사와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색인어
  • 책봉, 책봉의례, 고애사, 책명사, 사은사, 책문, 관고, 조공, 혜공왕, 효성왕, 문무왕, 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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