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성과물 유형별 검색 > 보고서 상세정보

보고서 상세정보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26541&local_id=10047663
戰國時代 楚 都城 硏究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戰國時代 楚 都城 硏究 | 2011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용일(영남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74
선정년도 2011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3년 02월 2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3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Ⅱ장에서는 楚 都城 郢에 관해 살피고자 한다. 春秋初期 楚는 丹陽에서 郢으로 遷都하였다. 楚都 郢의 地望에 대해서는 異說이 많았으나, 현재는 고고발굴을 통해 지금의 湖北省 江陵서북쪽 10여리 떨어진 紀南城으로 인정되고 있다. 楚가 처음 郢에 都邑했을 때는 城을 쌓지 않았다. 그러나 楚康王시기에 令尹 子囊(즉 公子貞)이 吳軍에게 패배하자, 郢城을 건축할 것을 건의하였다. 현존하는 紀南城은 춘추말기와 전국초기에 여러 차례 확충하여 완성되었다. 楚 都城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검토 과정을 거치고자 한다.
    먼저 郢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제 郢은 頃襄王 21년(기원전 278年), 秦將 白起에 의해 함락될 때 까지 줄곧 楚의 都城이었다. 따라서 楚都 郢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은 郢이 계속해서 楚都가 될 수 있는 조건과 기준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연구로서, 楚가 가장 우선시했던 都城의 조건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① ‘郢’의 地望, ② 楚 통치계급의 구성요소, ③ 郢의 정치ㆍ경제적 위상, ④ 郢과 외부세력과의 거리 등을 감안하여 郢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Ⅲ장에서는 사료를 통해 자주 언급되는 楚의 別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楚에서 ‘別都’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외부의 압박을 받아 首都를 임시로 옮긴 지역을 말하고, 둘째, 어떠한 정책적 목적으로 설치한 首都 이외의 都城을 말한다. 楚에서 別都는 대부분 軍事重鎭의 역할을 한 都城으로 후에 대부분 縣으로 바뀌었다. 楚에 이러한 다수의 別都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楚都 郢이 군사적 성격이 아닌 다른 성격의 都城이었다는 방증이 된다. 따라서 楚의 別都에 대한 연구는 楚의 主都 郢의 성격을 밝히는 단초를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別都 역할을 하였던, 武成ㆍ析ㆍ東不羹ㆍ西不羹ㆍ鄢 등에 대해서도 살피고자 한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楚가 郢을 상실한 후 陳, 壽春 등으로 자주 遷都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계속되는 秦의 압박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나, 郢의 상실 이후 넓은 판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점 역시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Ⅳ장에서는 고고자료를 통한 기존의 楚 都城 연구의 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楚 都城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郢의 현재의 위치라고 알려진 紀南城遺址 복원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근래 많은 고고자료의 출토로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침체되었던 戰國時代 都城 연구에 활기를 주고 있다. 그러나 출토자료는 해석의 차이와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옴으로 여전히 문헌사료 부족의 공백을 메우기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 戰國時代 都城 연구는 출토자료를 중심으로 하고, 문헌사료로서 출토자료의 부족분 내지는 신뢰성을 보조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범위한 고고자료를 정리ㆍ분석하여야 하고, 이를 반드시 문헌사료와 결합하여야 종합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지금도 중국 각지에서는 고고발굴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성취를 이루고 있다. 또한 歷代 주요 都城遺址에서도 고고발굴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고고발굴조사의 기초 하에 이미 발표된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문헌사료와 결합하여 좀 더 나은 결과물을 내고자 한다.
  • 영문
  • This study focuses particularly on what the capital city really was, especially in Cho's Lieguo among those of the Age of Civil wars, from its structure, character, and functions, based on archeological specimens. The biggest reason Why this study is focusing Cho's Lieguo is that the its process of the transfer of the capital was carried out in a very complex and various forms, compared with those of the other Lieguos. After deciding on Danyang as the capital city, Cho transferred the capital to Ying in the age of Wenwang. Later it transferred the capital to Ruo again in the 12th Year of Zhaowang(504 B.C.), changing its name to Yanying. It transferred the capital to Xiyang againin the 50th Year of Huiwang(433 B.C.), but before long it came back to YangYing. Again, it transferred the capital from Yangying to Chen in the 21th Year of Qingxiangwang(278 B.C.), and to Shouchun in the 22 Year of Kaoliewang(241 B.C.). This kind of the frequent transfers of the capital is a rare case in Lieguo throughout the Age of Civil wars. It seems that this was intended in order to avoid the external aggressions and manage the wide territory efficiently as well.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硏究의 目的은 戰國時代 楚 都城의 實體를 규명하는 것에 있다. 都城은 한 국가의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이다. 국가가 형성될 때, 都城 건설은 가장 우선시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都城을 건설할 장소 선택, 규획, 시공, 완성 등은 모두 君主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都城 건설은 당시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방면의 발전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사회경제의 발전, 정치체제의 변혁 및 시기별 정치ㆍ군사ㆍ경제 방면의 서로 다른 수요가 都城을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이를 통해 都城의 구조는 시기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이것은 결국 都城의 기능 문제로서 그 사회 전반을 투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戰國時代 列國 중 楚 都城을 중심으로 都城의 구조ㆍ성격ㆍ기능 등에 중점을 두고 都城의 실체를 밝히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 楚 都城을 주제로 잡은 가장 큰 이유는 楚의 遷都 과정이 列國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楚는 熊繹시기 처음 丹陽을 도읍으로 정한 후, 文王시기 郢으로 遷都하였다. 이후 昭王 12年(기원전 504年) 도읍을 다시 鄀으로 옮긴 뒤 鄢郢으로 改稱했다. 楚惠王 56년(기원전 433年) 西陽으로 遷都했으나 얼마 후 다시 鄢郢으로 돌아왔다. 楚頃襄王 21年(기원전 278年) 鄢郢에서 陳으로, 楚考烈王 22年(기원전 241년)에 壽春으로 都邑을 다시 옮겼다. 이와 같은 잦은 楚의 遷都는 戰國時代를 통해 列國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는 외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목적과 넓은 판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원래 이 연구의 대상은 戰國時代 列國의 모든 都城이었다. 그러나 연구자가 寡聞하여 능력이 미치지 못하였고, 그 선행 기초 작업으로 우선 楚 都城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ek. 후에 더욱 증진하여 반드시 戰國時代 中原 諸國의 都城 연구도 진행하여, 능력이 된다면 󰡔戰國時代 列國의 都城 硏究󰡕라는 저술로 연결시키고 싶다. 그리고 수많은 열국의 都城 연구에 관한 고고발굴성과를 정리하여, 미력하나마 우리나라 戰國史 연구의 일부분을 담당했으면 좋겠다.
  • 색인어
  • 도성, 전국시대, 초, 영, 별도, 기남, 성곽
  • 이 보고서에 대한 디지털 콘텐츠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 본 자료는 원작자를 표시해야 하며 영리목적의 저작물 이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또한 저작물의 변경 또는 2차 저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