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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南道 內浦地域 지역엘리트의 재편과 근대화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忠淸南道 內浦地域 지역엘리트의 재편과 근대화 | 2002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박찬승(충남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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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번호 AM1008
선정년도 2002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5년 01월 27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5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 국 문 〉
    내포문화권은 금강문화권에 비해 유교적인 보수성도 약하였고, 양반의 기반도 약하였다. 따라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천주교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내포지역이었고, 동학농민봉기 때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도 내포지역이었다. 근대적 교육이나 개신교의 도입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늦지 않았다. 내포지역은 또 예당평야라는 넓은 평야가 있는 동부지역과, 작은 산맥이 상하로 가로지르는 서부지역으로 나뉜다. 동부의 예산과 당진, 그리고 서부의 서산, 태안에는 상대적으로 부재지주와 재지지주가 모두 많았고, 홍성의 경우에는 평야가 적어 지주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예산, 당진, 서산의 지역엘리트 가운데에는 평민출신의 지주적 기반을 가진 이가 많았다. 예산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상업적 기반을 가진 엘리트도 많았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고 지역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신흥청년들도 지역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이들 신흥청년들은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에서 주역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고, 여기서 우익은 미군정과 경찰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여기서 우익청년운동에 참여하는 계층이 새로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좌익계로 간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고, 1950년대초 농지개혁을 전후하여 재지지주층과 이에 기반을 둔 지역엘리트도 몰락했다. 1950년대 그들 대신 새로이 등장한 지역엘리트는 우익청년단 출신이나, 상공업자 등 신흥 자산가계층이었다.
  • 영문
  • Modernization and the Change of Local Elite in the Naepo Area, Chungcheongnam-do

    In Comparison with the Geumgang Cultural Region, the Naepo Cultural Region has weak Confucian conservatism and a weak basis of the nobility. Therefore, it shows a liberal and open tendency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Roman Catholicism was first introduced to South Korea in the Naepo Area. In addition, the Naepo Area had the strongest power in Chungcheong-do during the Donghak Farmers' Uprising. Modern Education and Protestantism were introduced earlier than in the other areas. The Naepo Area is divided into the Eastern and Western parts referring to the vast plains called the Yedang Plains and to a small mountain range crossing north to south, respectively. Yesan and Dangjin in the Eastern part and Taean in the Western part have more non-residing and residing landlords than other areas. Hongseong has relatively few plains and few landlords. Accordingly,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many of the local elitesin Yesan, Dangjin, and Seosan are from the common people with basis of lands. Being a center of commerce, Yesan had elites with economic foundation. Having modern education, the newly emerging youth engaged in national and social movements in the area became local elites. The newly emerging youth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Founding Joseon and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ion after the liberation. However, they were divided into the left and the right wings and in conflict with each other. The right wing got support from the American Military Administration and the police and expanded its power. The class participating in the Right Youth movement newly emerged. Meanwhile, social movement activists in the left wing collapsed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early 1950s, around the time of theAgricultural Land Reform, residing landlord classes and local elites based on them collapsed. In the 1950s, instead of them, the former Right Youth members or the propertied classes such as merchants and industrialists newly appeared as local elit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내포문화권은 금강문화권에 비해 유교적인 보수성도 약하였고, 양반의 기반도 약하였다. 따라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천주교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내포지역이었고, 동학농민봉기 때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도 내포지역이었다. 근대적 교육이나 개신교의 도입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늦지 않았다. 내포지역은 또 예당평야라는 넓은 평야가 있는 동부지역과, 작은 산맥이 상하로 가로지르는 서부지역으로 나뉜다. 동부의 예산과 당진, 그리고 서부의 서산, 태안에는 상대적으로 부재지주와 재지지주가 모두 많았고, 홍성의 경우에는 평야가 적어 지주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예산, 당진, 서산의 지역엘리트 가운데에는 평민출신의 지주적 기반을 가진 이가 많았다. 예산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상업적 기반을 가진 엘리트도 많았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고 지역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신흥청년들도 지역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이들 신흥청년들은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에서 주역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고, 여기서 우익은 미군정과 경찰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여기서 우익청년운동에 참여하는 계층이 새로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좌익계로 간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고, 1950년대초 농지개혁을 전후하여 재지지주층과 이에 기반을 둔 지역엘리트도 몰락했다. 1950년대 그들 대신 새로이 등장한 지역엘리트는 우익청년단 출신이나, 상공업자 등 신흥 자산가계층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학문적 기여

    본 연구는 한 지역을 대상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동안의 고립분산적인 연구를 지양하고, 학제간 연구, 협동적 연구를 실행함으로써 연구 과정에서도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 또한 한국에서의 지방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을 새롭게 개발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밖에 내포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 조사와 수집, 그리고 목록 발간 등을 수행하였으며,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마을지 발간 등 이 지역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2) 사회적 기여

    본 연구에서 조선후기 이후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대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이른바 ‘내포문화권’의 성격규정에 어느 정도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내포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에 기초한 ‘내포문화권’의 ‘문화적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3) 인력양성 방안

    본 연구에는 교수와 박사급 연구자 13명 이외에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학생 10명이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현지조사, 문헌자료 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자료조사의 방법론을 터득하는 한편 누구보다도 현장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아울러 각종 콜로키엄, 팀별 세미나, 학술심포지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지방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 많은 지식을 터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 색인어
  • 내포지역, 지역엘리트, 예산, 당진, 서산, 홍성,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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