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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 | 2018 년 | 장영숙(상명대학교& #40;천안캠퍼스& #41;)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8S1A5A2A01033717
선정년도 2018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9년 12월 22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풍경궁은 광무6년(1902) 5월 14일 고종이 건립 령을 내린 후 공사가 시작되어 1903년 12월에 부분적으로나마 완공을 본 평양지역의 행궁이다. 풍경궁은 고종이 황권강화를 통해 대민결속력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여기에 평양이 갖는 지역적인 가치, 기자조선의 중심지로서 서경복설과 황실의 정통성 확보, 러일간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이이제이 방책이라는 복합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경공사를 핑계로 국가의 재정과 인민의 혈세가 낭비되었고, 행궁 공사 기간에 저지른 평안도 관찰사 민영철의 부정과 탐학은 지배층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러일전쟁이 가속화되자 일본은 풍경궁 부지를 군용지와 철도용지로 광점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인민의 가옥도 철도부지로 점거되면서 재산권이 침탈되었다.
    평양 외지에서 올라오는 백성들의 불만은 중앙정부로 향하고 있었고, 신문지상에서는 연일 정부의 무능과 일본의 침탈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적 교섭은 지지부진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어떠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는 속에서 대한제국과 황제는 민들에게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국가’로 인식되게 되었다.
  • 영문
  • Punggyeonggung Palace is a temporary palace in Pyeongyang of which the construction was started in May 14th KwangMu 6 (1902) by the construction order of Gojong and partially completed in December 1903. Punggyeonggung Palace was constructed by Gojong as a measure to intensify public cohesion by reinforcing absolute authority of the emperor. Moreover, there were complex meanings contained such as local value of Pyeongyang, reinstallation of palace in Seokyeong as a center of Gija Joseon, securing legitimacy of imperial family, and coping with the Russo-Japanese War with a measure of taking control of a group by using another group’s.
    However, waste of national finance and taxpayer’s precious money with an excuse for Seogyeong construction, and the corruption and greed committed by Min, Yeong-cheol, governor of Pyeongan province during the construction period led to discontentment toward ruling class. Furthermore, as the Russo-Japanese War was accelerated, Japan began to take over wide site of Punggyeonggung Palace for military and railroad uses. Numerous houses of the people were taken over as the land for railroad dispossessing property rights.
    The public discontentment outside Pyeongyang was facing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re was public sentiment that strongly criticized government’s inability and Japan’s pillage everyday in the newspapers. Nevertheless, diplomatic negotiations by the Korean Empire was slowly unfolded. Eventually, the Korean Empire and Emperor were perceived as ‘incompetent government’ and ‘corrupted country’ by the public making no alternativ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풍경궁은 광무6년(1902) 5월 14일 고종이 건립 령을 내린 후 공사가 시작되어 1903년 12월에 부분적으로나마 완공을 본 평양지역의 행궁이다. 풍경궁은 고종이 황권강화를 통해 대민결속력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여기에 평양이 갖는 지역적인 가치, 기자조선의 중심지로서 서경복설과 황실의 정통성 확보, 러일간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이이제이 방책이라는 복합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경공사를 핑계로 국가의 재정과 인민의 혈세가 낭비되었고, 행궁 공사 기간에 저지른 평안도 관찰사 민영철의 부정과 탐학은 지배층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러일전쟁이 가속화되자 일본은 풍경궁 부지를 군용지와 철도용지로 광점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인민의 가옥도 철도부지로 점거되면서 재산권이 침탈되었다.
    평양 외지에서 올라오는 백성들의 불만은 중앙정부로 향하고 있었고, 신문지상에서는 연일 정부의 무능과 일본의 침탈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적 교섭은 지지부진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어떠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는 속에서 대한제국과 황제는 민들에게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국가’로 인식되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의 기대효과와 활용계획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종이 풍경궁을 건립하여 평양이 가진 장구한 역사를 계승하려한 측면에서황권강화에 대한 고종의 강력한 노선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전제군주제를 꿈꾸고 시행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대한제국의 성격 규정에 확실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둘째, 본 연구를 통해 러일전쟁에 대한 대한제국의 대응책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다. 평양은 일본과 러시아가 탐을 내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기대어 일본을 방어하는 이이제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평양을 중심지역으로 삼아 행궁건립을 주도하였다. 고종의 평양 경영의 주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이이제이 정책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대응노력을 제시할 수 있다.
    셋째,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조세 부담자로서 피탈되던 인민들에게 풍경궁 공사는 또 하나의 엄청난 부담이었다. 국가재정의 낭비는 물론, 고종의 처족인 평안도 관찰사 민영철의 부정과 탐학으로 인해 인민의 불만은 지배층 모두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곧 정권의 부담이 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인민들에게 ‘무능한 정부’, ‘부패한 국가’로 각인되며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민중의 눈에 비친 대한제국과 고종의 리더십을 규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넷째, 풍경궁은 공사를 마친 후 빈 궁궐로 남아 있다가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의 군용지와 철도부지로 편입되었다. 합방 후에는 일제의 관립의료기관 설립정책에 따라 자혜의원 부지로 활용되었다. 러일간의 전쟁이라는 급박한 대외정세 속에서 애당초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아까운 혈세와 국가재정만 낭비하게 된 것이다. 고종의 황권강화정책이 좌초되는 하나의 사례로 실증하는 가운데 국제정세를 제때 파악하지 못하고 외교력을 발휘하지 못한 한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
  • 색인어
  • 풍경궁, 서경, 평양행궁, 일본, 군용지,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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