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한국현대문학 연구의 수준은 양적 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근대문학 형성기인 개화기 문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자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선 일차적으로 자료부족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
그 동안 한국현대문학 연구의 수준은 양적 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근대문학 형성기인 개화기 문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자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선 일차적으로 자료부족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비평적 관심사에만 머물러 보다 실증적인 연구작업에는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기는 일본을 통한 서구 문물의 수입과 내재적인 전통의 가치가 상충 보완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이 이루어진 시기인 만큼, 이 시기 한국근대문학의 성립과 전개에 관한 비교문학적 논의는 전한국현대문학사를 관통하는 맥을 파악하는 매우 기초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개화기에서의 일본 신파극의 유입과 한국 신파극의 성행이 한국근대문학의 형성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전혀 없었다. 이는 특히 개별 장르에 국한하여 문학사를 이해하려는 편협된 연구자의 시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자는 우선 일본 신파극이 한국 신파극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영향이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실증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신파극의 유입과 그 영향, 한국 신파극의 전개 과정과 그 영향 등을 국내외의 당대 신문 기사와 잡지,단행본 등의 일차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1차자료가 부족하므로 필연적으로 일본에서 간행된 제문건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한국근대문학의 성립과정이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비단 문학 장르뿐 아니라, TV드라마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정서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까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1세기를 맞아 개방과 개혁의 조류가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뒤흔들 우려가 많은 만큼 객관적으로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재검토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개별 장르의 벽이 허물어지고 다국적 기업의 문화상품이 세계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한국적 특수성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한국학의 필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과등록초록
일반적으로 한국근대문학사는 1910년을 전후로 하여 1900년대의 애국계몽기의 문학이 1910년대의 통속적 신소설로 변질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1910년대 신소설의 경우도 1910년대 초기까지는 활발히 발표되다가 1915년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는 1917년 이광수의 ...
일반적으로 한국근대문학사는 1910년을 전후로 하여 1900년대의 애국계몽기의 문학이 1910년대의 통속적 신소설로 변질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1910년대 신소설의 경우도 1910년대 초기까지는 활발히 발표되다가 1915년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는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을 계기로 이른바 ‘근대문학’의 시기를 맞아 소멸하고 만다. 이러한 1910년대의 문학에 대해서는 이광수의 ‘돌연한’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문학이 ‘근대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으로 설명될 뿐, 그 내적 계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명이 없는 현실이다. 1910년대는 신파극의 시대이다. 1910년대는 그 어떤 문학예술 장르보다도 신파극이 압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모든 문예활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신파극에 대해서는 뚜렷한 근거 없이 단순히 일본 신파극의 모방 또는 이식이라는 전제 아래 그 긍정적인 의미 규정의 작업은 외면해 온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분명 신파극은 일본의 공연 양식이며 한국의 신파극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다. 일본의 신파극은 일본뿐 아니라 190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빈번히 공연되었다. 물론 한국의 문예종사자들이 일본의 신파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없어 뚜렷이 규정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1906년 文藝協會의 제1회 공연이 있고 나서도 1911년 일본신파극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川上音二郞이 사망할 때까지 明治期는 분명히 신파극이 공연의 중심 양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파극은 1903년 川上音二郞이 <오셀로>를 번안하여 공연하고 일본 근대극의 대부격인 小山內薰이 1904년 신파극 활동에 가담할 정도로 서양의 근대극을 섭취하며 발전하였다. 따라서 190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일본의 신파극이 1910년대 한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며, 한국의 신소설이 이 시기에 구태를 벗고 근대소설로 전환한다고 하는 점은 필경 양자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나라간의 문화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고, 특히 막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현실에서 종주국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은 그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본고에서는 일본 신파극이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공연 팜플렛이나 대본과 같은 뚜렷한 물증이 없는 현실에서 이를 밝힌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허황된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허황함을 최대로 줄이기 위하여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하기로 한다. 우선 일본 신파극이 일본과 한국에서 어떻게 공연되었는지 특히 소설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펴보도록 한다. 다음으로 일본 신파극이 한국 신파극에 미친 영향과 한국신파극의 발전과정, 그리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관객의 의미, 주제와 제재의 근대적 성격, 대본 창작과 각색 작업의 문학사적 의미를 점검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작업의 중심에 서 있던 조일재의 문예활동을 점검하고 특히 그의 번안소설이 지니는 문학사적 의미를 고찰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본 신파극의 일본과 한국에서의 공연 목록과 한국 신파극의 공연 내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