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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韓中 지식인의 高句麗 인식
  •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DB구축사업 참여 관련분야 전문가가 추가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교수연구지원
연구과제번호 2004-003-A00008
연구기간 2004-07-01~ 2005-07-01
연구책임자 한명기(명지대학교)
연구수행기관 명지대학교
  • 신청시초록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구려는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국왕이나 관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애정은 두드러졌다. 세종은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평양에 고구려의 시조를 모시는 묘사(廟祠)를 건립하고, 제사 의식을 정비토록 했다. 세조는 동명왕(東明王)을 모신 사당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올리고, 수와 당이 국력을 기울여 침략했음에도 그를 물리쳤던 고구려의 '무용담'을 책으로 엮어 무신들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했다.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은 과거 '고구려의 고토'로서 요동(遼東)에 대한 은근한 관심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한 예로 연산군대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은 연산군에게 올린 상소에서 압록강부터 요하(遼河)에 이르는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다.
    조선 내부의 관인들 사이에 이러한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간파했던 명은 조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명은 특히 조선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면서도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질까봐 우려했다. 명 조정은 일찍이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을,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진 인물로 지목하여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초반에는, 조선 조정이 두만강 접경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을 회유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중단하라는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의 관인들 가운데는 임진왜란을, 조선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전쟁'이라고 왜곡하여 인식하는 인물도 있었다. 1597년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의 전공(戰功)을 조사하러 왔던 찬획주사(贊劃主事) 정응태(丁應泰)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등의 존재를 근거로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있었고, 왜란은 결국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고 명 조정에 보고하여 커다란 외교적 파장을 일으킨 바 있었다. 이러한 '정응태의 무고(誣告)'는 당시 명 조정의 당쟁(黨爭) 때문에 촉발된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당시 명 조정 일각에서는 여전히 조선이 만주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가 존재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똑같은 논란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에도 재연된 바 있다. 이미 기존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명 조정은 최초 인조반정의 발생을 인지했던 직후부터 조선의 정정(政情)을 예의주시했다. 조선에서의 정권교체가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처해 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 당시 명 조정 일각에서는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일본군을 끌어들여 광해군을 시해하고, 궁극에는 요동을 공략하려 한다"는 유언비어까지 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명은 조선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 그것의 여파가 요동으로 번지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었음을 또한 반증하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조선 전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군사 강국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쇠약해졌느냐?'고 의문을 표시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앞의 최부와 관련된 일화에서도 이미 드러났듯이 수당(隋唐)에 정면으로 맞섰던 고구려의 무위(武威)는 조선시대 내내 명나라 관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명군 지휘관들이 보기에는 '섬나라 오랑캐(-일본)'의 침략을 받아 수도까지 함락당한 조선의 '허약함'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에 그들은 나름대로 조선이 '쇠약해진' 원인을 분석하는데 골몰하게 되었고, 그 원인으로서 '조선의 문약(文弱)'을 지적했다. 즉 그들은 조선이 고구려와 달리, '문약'에 빠졌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부르고 결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진단'을 내렸다. 나아가 그 문약으로부터 '탈출'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어내기 위해 무비(武備)를 충실히 할 것을 주문한 바 있었다.
    실제로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고구려, 나아가 만주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에 비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야만족'이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의 청에게 병자호란을 통해 굴복하고, 이후 그들의 압박 때문에 국체(國體)를 유지하기도 급급한 상황에서 고구려나 만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낼 여유가 없었다. 특히 청이 만주 지역을 자신들 '선조의 발상지'라고 신성시하고, 조선인들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유입하는 것을 엄금하면서부터 조선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 결과등록초록
  • 본고에서 필자는 삼국시대 이래 잠재되어 면면히 계승되어 왔던 "고구려는 수당(隋唐)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인식이 조선시대 한중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계승, 변화되었는지를 살폈다. 필자는 조선시대 고구려 인식과 관련된 자료를 분류하면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고구려는 강국'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서 강조하는 형식과 목적이 시기별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왕조 개창 직후의 15세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었던 17세기 초반, 그리고 북벌론이 대두되었던 숙종대, 탕평론이 강조되었던 영조대 등 각 시기별로 '고구려가 강국'임을 강조하는 의미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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