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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상영의 변화 양상 연구 -경성의 영화관을 중심으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박사후국내연수)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1-354-G00039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1 년 (2011년 07월 01일 ~ 2012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함충범
연구수행기관 중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중일전쟁 발발(1937) 이후, 특히 조선영화령 공포 및 실시(1940)를 계기로 1940년대 식민지 조선영화(계)가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공론이었다. 그리고 이는 2005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공개한 일련의 일제강점기 조선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관련 자료 발굴이 진척됨에 따라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영향 등으로 1940년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일제말기 한국영화사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영화 제작 부문에 집중되어 이루어져 왔고, 그렇다 보니 당시 민간 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및 조선군 보도부에서 제작된 친일영화들의 특징, 논란, 식민성(혹은 저항성) 등에 다소 천착된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물론 한 국가나 민족의 영화사 연구가 제작 부문을 중심으로 진행됨은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공간적이고 역사적인 특수성이 존재하는 식민지 시기, 더구나 그것이 극대화되는 일제말기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이러한 일반성에 대한 검증과 재고와 비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 분야의 변화는 동시기 일본의 전시체제 구축 심화 및 그에 따른 식민지 정책 변화에 연동되어 이루어졌다. 일례로, 조선영화령 실시 이후 형성된 영화일원화 체계는 국민총력조선연맹(1940)을 정점으로 하는 관제 체계로부터 파생된 것이었고, 또한 이는 동시기 일본에서의, 대정익찬회(1940)를 중심으로 하는 ‘신체제운동’과 그에 따른 ‘영화신체제’를 모태로 하는 것이었다.
    둘째,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는 점차 일본영화(계)에 종속되어 갔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지위에 변동을 가하며 일본과 조선의 전시동원 관제 체계를 일원화하였던 일제의 식민지 정책 방향이 영화 분야로 파급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조선영화(계)의 종속화는 조선인의 전시동원을 위한 영화 시스템 및 콘텐츠 양면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1942년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및 조선영화배급사의 설립은 전자의 일환으로, 1943년부터 시작된 일본어 전용 영화의 제작은 후자의 일환으로 실행된 것이었다.
    셋째, 이러한 일원화 및 종속화 과정을 겪으며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는 정책적 차원에서 제작 부문보다 오히려 배급 및 상영 부문이 중요시되었고, 그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영화령에 근거한 제작사와 배급사의 통폐합 과정에서 일본과 조선이 각각 제작-상영 공간으로 위계됨을 전제한 조선영화 무용론(無用論)이 대두되었다는 점, 1942년 9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앞서 동년 5월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가 먼저 설립되었다는 점, 1944년 4월 이들 제작사와 배급사가 다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로 흡수되는 방식이 취하여졌다는 점 등이 구체적인 예증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일제말기 조선영화계에 나타난 변화의 원리 및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통치 체계의 변화와 영화계 변화의 연관성에 여전히 주목하면서도 그 시야를 기존의 제작 부문에서 배급 및 상영 부문까지로 넓혀야 할 것이다.
    이에, 본 지원자는 이번 연수를 통해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어떠한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배급되고 상영되었으며 그 변화의 궤적이 어떠하였는지, 아울러 그것이 전황의 전개 양상 및 전시체제의 구축 과정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 실증에 토대하면서도 논리적인 해석 작업을 통해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이번 연수의 연구 결과물은 일단 학술논문 형식으로 발표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재로서는 영화사학 관련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에 투고하여 게재되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영화 관련 학회나 연구소가 개최하는 학술세미나에서의 연구 내용에 대한 발표를 통해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도 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본 지원자는 한국영화사 연구 분야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학문적인 기여를 하고자 한다.
    첫째, 194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영화의 변화 양상에 관한 주제를 기존의 제작 부문에서 배급 및 상영 부문으로까지 확대하여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고, 나아가 미군정기를 포함한 1940년대 한국영화의 변화 양상의 원리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한국영화사에서 중요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간과하고 지나쳤을지 모르는 부분에 대한 충실한 연구의 모델을 제시한다.
    둘째, 전시체제 구축의 심화 과정에서 더욱 공고화되던 일본과 조선의 제국-식민지의 관계성이 영화 분야에서 제작 부문과 상영 부문으로 위계화되어 적용되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일제말기 조선영화(계)의 식민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가 기존의 논의를 발전시켜 일제말기 한국영화사를 재정립시키는 촉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여러 가지 한계로 그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매일신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꼼꼼히 해석하는 한편, 특히 한국영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서 거의 활용하지 못하였던 《경성일보》나 《에가준포》, 《에가효론》, 《니혼에가》 등 일본어 자료를 조사의 대상으로 하여 새로운 사료의 발굴을 시도한다. 나아가 이러한 서지 자료의 실증을 통해 기존 영화사 서술의 오류를 정정한다. 이는 연구의 질을 높이고 내연을 심화시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이처럼, 본 연구는 연구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 한국영화사학적 차원에서, 그리고 학제 간 연구의 차원에서 학술적인 효과를 창출하고자 한다.
  • 연구요약
  • 이번 연수를 통해 본 지원자가 다루고자 하는 연구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실증적이고도 논리적인 대답들이라 할 수 있다.
    ① 194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들은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어떠한 내용과 종류의 영화를 제공받았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어떠한 추이를 보이게 되었는가?
    본 연구는 일차적으로 1940년대 경성의 영화관에서 상영된 영화들의 내용과 종류가 어떤 것이었고, 그것이 전시 상황 및 체제의 변화와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파악한다. 여기서 내용이라 함은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또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선전 및 국책성향에 관한 것에서부터 이를 대중적으로 표상하는 스토리나 스타일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내의 것들이다. 또한 종류라 함은 당시 조선에서 상영된 극영화, 문화영화, 시사영화들을 포함한다. 영화 신체제 성립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동시기 일본에서의 경우와 연동되어 영화 상영에 있어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 및 시사영화의 상영이 의무화되었다. 문화영화란 극영화보다는 짧은 형식에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시사영화란 뉴스영화를 지칭한다. 문화영화와 시사영화를 문헌자료를 통해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듯하나, 당시 문화영화와 시사영화가 일반 영화관에서는 극영화와 함께 상영되었고, 전용관에서는 전문적으로 상영되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분류 작업을 시도한다면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전쟁 기간 중에 이들 영화의 상영을 의무화하였다는 것은 영화의 형식을 통해 내용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서 상영된 영화들의 내용과 종류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동시기 일본의 대 조선 영화 정책의 방향 및 실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당시 상영 작품 중에 외국영화의 비율 및 분포도와 그 변화 양상은 어떠하였는가?
    1940년대 들어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조선에서는 외국영화의 수입 비중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일본이 서구 세력과 대결 양상에 놓이게 되었으니 그들의 이념과 생활 방식을 다룬 영화들이 수입 금지됨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예측만 가능할 뿐,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통계적 자료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본 연구는 당시 경성의 영화관에서 상영된 영화들 가운데 외국영화의 비율 및 국가별 분포도는 어떠하였으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여기에 어떠한 변화상이 보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실증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③ 당시 조선에서 상영된 일본영화의 비중과 그 변화 양상은 어떠하였는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영화의 상영 양상에 대한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한 연구는 거의 없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면 일본에서도 영화 제작사가 몇 개 회사로 통폐합되어 제작 편수가 현저히 줄어들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가운데 조선에 배급되는 작품은 일부였기 때문에, 당시 신문 등 1차 자료를 꼼꼼히 조사한다면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시기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의 내용과 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의 내용을 비교, 대조하며 주로 어떠한 성격의 영화가 얼마간의 시간적 차이를 두고 조선에서 상영되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일본의 대 조선 영화 정책의 현실에의 적용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④ 당시 조선에서 영화(특히 일본영화) 상영은 제작 부문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본 연구는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상영, 특히 일본영화의 상영이 동시기 조선영화의 제작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일본영화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으로 수입된 영화들과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들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설명한 연구 내용들에 주목하여 1940년대 조선영화(계)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고, 이를 통해 일제말기 한국영화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이 그대로 연구 결과물인 논문의 단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본 지원자는 연구를 진척시키면서 각각 연구 내용들을 결합, 분화하거나 그 비중을 조정하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연구 계획 단계상에서의 중심 논지를 일관성 있게 끌고 가는 것을 전제로 하여 논문의 방향을 견지하도록 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1940년대,영화,조선영화,조선,영화계,식민지,한국영화,상영,배급,사단법인 조선영화사,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영화신체제,조선영화령,일본영화법,친일영화,국책영화,일원화,태평양전쟁,전시체제,제국,일본영화,일본,경성
  • 영문키워드
  • Japanese cinema,filmdom,colony,screening,system of the war,Pacific war,unification,empire,national policy movie,pro-Japanese movie,Film Production Company,Distribution Company,distribution,1940's,film,Chosun,Kyungsung,Korean cinema,Chosun cinema,Japa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상영의 변화 양상’에 관한 연구이다. 본 연구를 통해 연구자는 1940년대 전반기 경성의 영화관을 중심으로 관련 내용에 대해 실증적이고 분석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여파로 1940년대 들어 일본에서와 같이 조선에서도 영화 상영 체제가 정비되었다. 우선, 상영 방식에 있어서는 영화관의 상시 상영과 이동영사 간헐적 상영 시스템이 유지되면서도 후자의 체계가 갈수록 통합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다음으로, 영화관의 상영 시간이 점점 단축되는 가운데 상영 영화의 종류가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로 정착되어 갔다.
    둘째, 1940년 조선영화령의 공포 및 시행, 그리고 이후의 조치들로 인해 영화 상영 부문에서의 변화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단,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라는 상영 포맷의 도입으로 영화의 오락적 측면은 억제된 반면 선전의 기능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어, 미국 및 영국 영화의 수입 금지 조치와 맞물리며 일본영화가 조선의 상영 공간을 잠식하며 그 영향력을 더하였다.
    셋째, 1943년 이후 조선영화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1942년 출범), 사단법인 조선영화사(1944년 발족) 또는 조선군 보도부(1938년 개편)에서 제작되었다. 한편, 조선영화계의 통폐합 조치에 따라 일본과의 영화 교류 또한 보다 활발해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 극영화에 다큐멘터리 요소가 삽입되거나 일본 극영화의 색채가 첨가되는 특징적 양상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
  • 영문
  • This research is about the aspects of change of the film exhibition in Chosun, colonial Korea, during the 1940s. Focusing on movie theaters in Kyungsung in the early 1940s, it looked into their exhibition practices in practical and analytical ways and have found out what is followed.
    First, in the aftermath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the practice of film exhibition in Chosun was reformed like that of Japan. At the time, its film screening practice consisted of three kinds of screening, regular, mobile and intermittent film screening. In the late 1940s, the intermittent basis became dominant. Also, the showing time was more and more shorten and a set of film exhibition practice, consisting of newsreels, cultural movie (Munwha Yeongwha), and feature film, was established.
    Second, the proclamation and enforcement of Chosun Yeongwha-Ryeong (Film Law of colonial Korea) and related reforms would lead to various forms of changes in the film exhibition practice. The introduction of the movie package of newsreel, cultural movie, and feature film gradually restricted the entertainment function of cinema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hand, emphasized its propagandistic role. After the importation of American and British films was prohibited, Japanese films deminated the visual space of film exhibition in Chosun and wield strong influence over the colonized.
    Last, after 1943, films in Chosun were only produced by Chosun Yeongwha Jusikwhoeysa (Chosun Film Co.), founded in 1942, Chosun Yeongwhasa (Chosun Film Production), established in 1944, and the press section of Chosun military (Chosunkun Bodobu), the Armed Forces Information Bureau of Chosun, re-organized in 1938. Because of the consolidation of film productions in Chosun, the trade of films between the imperial Japan and Chosun was vitalized. Such changes had a decisive effect on even the production of feature films in Chosun during this period. Documentary filmmaking practices were newly used in its feature filmmaking and also specific styles of Japanese cinema were introduced into many of Chosun film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940년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일제말기 한국영화사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영화 제작 부문에 집중되어 이루어져 왔고, 그렇다 보니 당시 민간 제작회사 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및 조선군 보도부에서 제작된 친일영화들의 특징, 논란, 식민성(혹은 저항성) 등에 다소 천착된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공간적이고 역사적인 특수성이 존재하는 식민지 시기, 더구나 그것이 극대화되는 일제말기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이러한 일반성에 대한 검증과 재고와 비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 분야의 변화는 동시기 일본의 전시체제 구축 심화 및 그에 따른 식민지 정책 변화에 연동되어 이루어졌다. 둘째,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는 점차 일본영화(계)에 종속되어 갔다. 셋째, 이러한 일원화 및 종속화 과정을 겪으며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는 정책적 차원에서 제작 부문보다 오히려 배급 및 상영 부문이 중요시되었고, 그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본 연구는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어떠한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배급되고 상영되었으며 그 변화의 궤적이 어떠하였는지, 아울러 그것이 전황의 전개 양상 및 전시체제의 구축 과정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 실증에 토대하면서도 논리적인 해석 작업을 통해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특히, 1945년 8월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으로 발행된 유일한 조선어 및 일본어 정기간행물이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전시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조선의 민간 신문과 잡지가 거의 폐간되는 1940년대에 있어서는 그 중요성이 배가되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일간지 《매일신보》를 중심으로, 그리고 일본어 일간지 《경성일보》를 참고하여 실증적 연구 활동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1940년대 들어 일본 ‘내지’뿐만 아니라 본토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식민지 조선에도 전시체제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동시기 일본에서와 같이 조선에서도 영화 정책적인 차원에서 상영 체제가 정비되었다. 우선, 상영 방식에 있어서는 영화관의 상시 상영과 이동영사 간헐적 상영 시스템이 유지되면서도 후자의 체계가 갈수록 통합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다음으로, 영화관의 상영 시간이 점점 단축되는 가운데 상영 영화의 종류가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로 정착되어 갔다.
    둘째, 1940년 조선영화령의 공포 및 시행, 그리고 이후의 조치들로 인해 조선의 영화 환경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특히 영화 상영 부문에서의 변화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단,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라는 상영 포맷의 도입으로 영화의 오락적․예술적 측면은 억제된 반면 선전과 계몽의 기능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어,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는 물론 극영화에 있어서도 미국 및 영국 영화의 수입 금지 조치와 맞물리며 일본영화가 조선의 상영 공간을 잠식하며 그 영향력을 더하였다. 더욱이 일본영화는 당시 제도적으로 국책을 이끌던 관공 단체 주관의 추천영화와 우수영화를 선도하며 '제국영화'의 모범으로 군림하였다.
    셋째, 1942년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출범, 1944년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의 발족으로 이후 조선영화는 이곳 또는 조선군 보도부 등 통합 회사나 국가 기관에서 제작되었다. 사단법인 조영의 경우 연간 6편의 극영화는 물론 6편의 문화영화와 12편의 뉴스영화를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조선군 보도부 역시 몇 편의 극영화와 문화영화를 제작 또는 후원하였다. 한편, 조선영화계의 통폐합 조치에 따라 193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가속되어 오던 일본과의 영화 교류 또한 보다 활발해져, 일본인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기타 스테프가 조선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횟수와 정도가 다대해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 극영화에 다큐멘터리 요소가 삽입되거나 일본 극영화의 색채가 첨가되는 특징적 양상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내용들을 정리하며 1940년대 식민지 조선영화계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고 이를 통해 일제말기 한국영화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내용들은 수정, 보완, 검증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연구 결과물인 학술 논문의 각 단원에 반영, 배치될 예정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수자는 논문 형태의 연구 결과물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학술적 효과를 거둠으로써 한국영화사 연구 분야에 학문적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첫째, 194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영화 변화 양상에 관한 주제를 기존의 제작 부문에서 배급 및 상영 부문으로까지 확대하여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고, 나아가 미군정기를 포함한 1940년대 한국영화의 변화 양상의 원리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둘째, 전시체제 구축의 심화 과정에서 더욱 공고화된 일본과 조선의 제국-식민지의 관계성이 영화 분야에서 제작 부문과 상영 부문으로 위계화되어 적용되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일제말기 조선영화(계)의 (탈)식민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셋째, 여러 가지 한계로 그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매일신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꼼꼼히 해석하는 한편, 특히 한국영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서 좀처럼 활용하지 못하였던 《경성일보》나 최근 자료집 출간으로 접근성과 해석력이 매우 높아진 당대 일본어 잡지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료 활용의 지평을 확대한다.
    본 연구 결과물은 우선적으로 학술논문 형식으로 발표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영화학 또는 인문학 관련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에 투고하여 게재할 예정이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나 영화를 주제로 하는 학술 세미나에서의 발표를 통해 토론의 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 색인어
  • 1940년대, 식민지, 영화, 영화계, 조선, 조선영화, 한국영화, 경성, 일본, 일본영화, 제국, 중일전쟁, 전시체제, 태평양전쟁, 일원화, 국책영화, 친일영화, 일본영화법, 조선영화령, 영화신체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조선군 보도부, 배급, 상영,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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