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이덕무(李德懋)의 경릉파(竟陵派) 인식과 수용양상 연구
A study on the Lee Deokmu(李德懋)'s Awareness and Acceptance of Jingling Coterie(竟陵派)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7038848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9월 01일 ~ 2015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권정원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李德懋의 竟陵派에 대한 인식과 수용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덕무는 20대 초반에 이미 중국 명말청초 문단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실제적으로 그의 문학작품은 공안파를 비롯한 중국 문단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경릉파 역시 이덕무가 20대 초반에 관심을 가졌던 유파의 하나로, 그의 독서물 중에는 경릉파의 서적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이덕무가 펼친 시론 가운데는 경릉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덕무의 경릉파 인식과 수용양상에 관한 연구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竟陵派는 공안파를 이어서 擬古派의 擬古主義的 창작 방법을 철저히 비판한 문학유파이다. 경릉파의 비평은 17세기 조선 문단에 전래되어 비평과 창작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公安派는 명말에 의고파의 대척점으로 생겨났다. ‘문장은 반드시 선진양한을,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이라는 창작이론을 전면에 내세웠던 의고파의 복고적 창작이론에 맞서 공안파는 ‘오로지 성령만을 서술하고 격투에 얽매이지 않는다[獨抒性靈, 不拘格套]’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에 경릉파는 공안파의 性靈論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한계점으로 지적되는 서툴고 거친 표현형식은 典範을 따를 것을 주장했다. 경릉파는 공안파의 새로운 이론을 적극 옹호하면서도 형식적인 부분에서 그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다시 말해 性靈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정서 및 사유의 자연스런 유출이라는 공안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지만, 진정한 성령은 ‘選詩’ 즉 전범이 될 만한 시를 통해서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야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요컨대 경릉파는 공안파의 성령이론을 발전시켜 자신들의 비평적 근거로 삼고, 비평형식으로써 전범의 詩를 활용하였다. 경릉파의 핵심 인물인 鐘惺과 譚元春의 문집과 그들이 함께 엮은 {詩歸}라는 비평집이 그들의 논리를 잘 보여주는 문헌들이다. 경릉파는 공안파의 문학론과 시풍에 반발하며 그들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유파임에도 불구하고 경릉파는 공안파와 병칭되거나 공안파의 수정적 계승자로 평가받아 왔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조선후기 문인들의 경릉파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조선후기 문단에 끼친 영향력이 공안파에 비해 미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릉파 수용’에 관한 독자적이고도 전면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공안파와 구별되는 경릉파의 비평이론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경릉파를 공안파의 아류로 취급하고 있는데서 기인한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경릉파가 조선후기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경릉파 문학이론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에 관한 연구 역시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인들 중 경릉파 비평이론에 가장 깊이 경도했었다고 평가받는 이덕무가 경릉파의 비평이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였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상의 연구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연구 목표를 설정하였다.
    첫째, 공안파와 변별되는 경릉파 문학이론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이덕무의 경릉파 비평이론의 이해와 수용 양상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의 이해와 수용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인들 중 경릉파 비평이론에 가장 깊이 경도했었다고 평가받는 이덕무가 경릉파의 비평이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가 원활히 수행된다면, 다음과 같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에 대한 단초
    무엇보다도 본 연구가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면 이를 바탕으로 본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인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이해와 수용 양상’을 규명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영향이 공안파에 비해 결코 미미하지 않았음을 확인
    조선후기 문단의 의고파나 공안파의 영향에 관한 연구 성과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경릉파의 수용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과연 연구 성과의 미진한 이유가 경릉파의 수용이 공안파이 비해 미미했기 때문일까? 본 연구는 ‘경릉파 수용’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는 사실이 알려주는 이러한 기존 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조선후기 문단에 끼친 경릉파의 영향력이 다른 유파에 비해 진정 미미했던 것인지? 아니면 현재 학계의 경릉파에 대한 연구 부진의 결과인지? 이에 대한 해명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가 성과를 거둔다면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의 영향력이 공안파에 비해 결코 미미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셋째, 한국한문학사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
    최근 조선후기 문학 이론의 혁신을 내재적으로만 파악하는 편협성을 극복하는 외재적 영향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혁신의 근원을 단순히 공안파에 한정시키고 경릉파를 공안파의 그늘에만 드리워 놓은 대체적인 연구흐름의 잘못을 부정할 수 없다. 경릉파는 공안파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나온 유파로 공안파와 같고도 다른 길을 걸으려 했으며, 조선 문단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확실하다. 그러므로 공안파와 구별되는 경릉파 이론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문단에 끼친 경릉파의 영향 관계를 밝혀낸다면, 한문학사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한중 문학관계를 보다 세밀히 파악할 수 있는 계기
    조선후기 문단의 외재적 형성 요인과 관련하여 의고파와 공안파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 업적이 축적되어 있다. 경릉파는 의고파, 공안파와 더불어 明代 3대 문학 유파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유파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다. 조선 문단과 명청대문단의 영향관계를 밝히는 작업이 의고파와 공안파에 치중되어 있는 것은 한․중비교문학 측면에서 편파적인 시각의 가질 여지가 있다. 경릉파가 조선후기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는 바, 이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면 조선후기 문단의 중국명대유파-의고파, 공안파, 경릉파의 영향관계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이덕무의 경릉파 인식과 수용 양상을 고찰하여, 궁극적으로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의 일단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 목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다음과 같이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첫째, 공안파와 변별되는 경릉파 문학이론의 전모를 밝히는 데 주력할 것이다.
    조선후기 문단에 끼친 명대문학유파의 영향에 대한 연구에서 경릉파는 독자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공안파와 병칭되거나 ‘수정적 계승자’라는 아류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경릉파는 공안파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출현했던 유파인 만큼, 공안파와의 同異點이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 문단에 수용된 경릉파의 문학이론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공안파와 변별되는 경릉파의 문학이론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1)중국 혹은 한국에서 출판된 ‘중국문학비평사’를 통해 경릉파를 이해하는 작업, 2)경릉파 문학이론에 관한, 그리고 공안파와 경릉파 문학이론의 비교에 관한 연구 논문을 참조하는 작업, 3)경릉파의 문학이론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으로 경릉파의 대표 문인인 종성과 담원춘의 문집을 살피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종성은 {隱秀軒集}, 담원춘은 {譚友夏合集}이라는 개인 문집이 있다. 그리고 종성과 담원춘이 수집한 {詩歸} 역시 그들의 비평이론을 잘 보여주는 문집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들의 문집을 통해 경릉파의 문학이론을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둘째, 이덕무의 경릉파 비평이론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을 밝히는 것에 주력할 것이다.
    이덕무는 20대 초반에 이미 경릉파를 인식하고 있었고, 경릉파 관련 문집 역시 열독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가 펼친 시론 가운데는 경릉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덕무의 경릉파 인식과 수용양상을 살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측면에 초점을 맞춰고자 한다. 1)이덕무의 경릉파 인식 경로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는 ①열독 및 저작을 통한 경로와 ②스승과 선배 및 벗들과의 인적 교유를 통한 경로로 나누어 살필 것이다. 2)경릉파 비평인식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을 파악하고자 한다. 선행 연구에서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을 한편으로는 부정적 인식과 한편으로는 공감하는 ‘양면적 입장’이라 파악한 바 있다. 이는 이덕무가 경릉파에 대해 일방적인 부정도, 일방적인 수용도 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덕무는 경릉파에 대해 어떤 측면을 부정하고, 어떤 측면을 공감했던 것일까? 경릉파를 수용하되 비판적 수용을 했다면 경릉파 비평이론과 이덕무의 문학이론 간의 同異點은 무엇일까? 이 점을 밝히는 것은 이덕무 문학에 수용된 경릉파 문학 이론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3)이덕무 시론과 시작품에 적용된 경릉파의 흔적 파악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셋째,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의 이해와 수용 양상의 일단을 밝히는 데 주력할 것이다.
    본 연구는 궁극적으로 조선후기 문단에서의 경릉파의 이해와 수용양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첫 시도로 이덕무의 경우를 통해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다면, 이덕무의 경릉파 인식 경로와 비평이론에 대한 입장, 그리고 수용 양상을 개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이해와 수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李德懋의 竟陵派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이덕무가 경릉파의 문학을 언제, 어떻게 접하고 인식했으며,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어떠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1741~1793)는 명말청초 서적의 유입과 학풍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학자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중국 명말청초 문단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실제 그의 문학작품에는 公安派를 비롯한 중국 문단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竟陵派 역시 이덕무가 20대 초반에 관심을 가졌던 문학 유파 중의 하나로, 그의 독서물 중에는 경릉파의 서적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이덕무가 펼친 시론 가운데는 경릉파와 관련된 언급 역시 보인다. 이는 이덕무가 경릉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고, 그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가 중국 명청 문학을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서적을 통해서였다. 경릉파 문학이론 역시 서적의 입수와 열독을 통해서였다. 가난한 서얼 출신 선비였던 이덕무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새로운 서적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로부터 책을 빌려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로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학문적․문학적으로 형성된 인적 교유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형성된 경릉파에 대한 인식은 이덕무 저작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덕무의 문집 『靑莊館全書』에는 경릉파에 관한 언급이 총 15회 보인다. 그 중 최초의 언급은 『歲精惜譚』의 것으로 이덕무 나이 23세 때이다. 이후 30대 후반까지 경릉파에 관한 언급은 간간히 보이나, 20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가 이덕무의 경릉파에 관한 관심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이덕무의 경릉파에 관한 언급은 대부분 종성과 담원춘의 시 비평가로서의 위상과 실제에 관한 내용이다. 대체로 『고시귀』와 『당시귀』의 비평이 다른 문장가들이 쉽게 미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비평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견해이든 종성과 담원춘, 그리고 『시귀』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뉘앙스이다. 첫 언급은 23세였지만 경릉파를 처음 접했던 것은 그 이전인 10대 후반~20대 초반 이었던 듯하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는 이덕무가 경릉파를 접한 정확한 경로와 시기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전겸익은 경릉파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남겼다. 비판일지언정 경릉파에 대한 언급을 많이 남겼고, 조선후기에 끼친 전겸익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아직 공안파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경릉파는 공안파를 비판하고 나온 유파이기에, 상식적으로는 공안파에 대한 인식이 경릉파에 그것에 앞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덕무가 명청대 문학유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서적을 통해서였고, 서적을 구할 수 있는 기회 역시 두서없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덕무 문집에 경릉파에 대한 언급이 공안파에 관한 언급보다 앞선다는 것은 조선에 수입된 중국의 서적의 현황에 따라, 그리고 조선 문인에게 읽힌 정황에 따라 조선 문단에 끼친 영향관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이해 역시 순수한 이덕무만의 시각이기보다는 조선에 수입된 한정된 중국 서적에 통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영향력 있었건 것은 전겸익의 『列朝詩集小傳』이었다.
    이덕무가 경릉파에 경도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특히 종성과 담원춘의 비평가로서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들의 글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덕무는 공안파를 비롯한 다른 문학 유파에 대한 언급에 비해 경릉파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비평하는 자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보이는 등,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내면적으로는 경릉파의 비평이론과 시비평 양상에 크게 공감을 보이는 듯 보이나, 표면적으로는 경릉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양면적 입장은 당시 조선후기 문단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우선 앞서도 말했듯이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는 전겸익에 의해 소개받은 바 크므로 경릉파에 대한 전겸익의 입장, 곧 부정적 시선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경릉파에 대한 정조의 입장 역시 부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문단에서 경릉파에 대해 표면적으로 긍정적 표현을 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덕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후기 문단 전반의 분위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이덕무만의 것은 아니다.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후기 문인의 것, 더 나아가서는 조선후기 문단의 그것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이덕무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를 살핀 작업은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의 일단을 보여주는 단서로 활용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토대로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진행되리라 기대한다.
  • 영문
  • This study is part of a study on Gyeongreung(竟陵派) understanding and acceptance of the late Chosun Dynasty paragraph. Salpineun that the recognition and acceptance of the wave aspects of light Gyeongreung Lee Deok-Mu(李德懋) was intended.
    Direct mention of the wave Gyeongreung the anthology 『Cheongjanggwangjeonseo(靑莊館全書)』"Zheng Secretary Testament" of Lee Deok-Mu it seems a total of 15 times. The first mention of Lee Deok-Mu for Gyeongreung waves are able to see that already in the earlier wave Gyeongreung fold through the nuances that describe what is familiar, but the 23-year-old was at his age. Perhaps it is estimated whether it is through the Jeon Gyeomik(錢謙益) jeophaetdeon gyeongreung wave.
    Lee Deok-Mu for the recognition of Gyeongreung wave seems to be ambivalent. While generally positive mention are showing negative attention, too. Most of the shows mentioned critical views about the attitude that there is too strict criticism focused on the agent's status as a consonant and when chunui critics, but generally positive.
    Gyeongreung ambivalent stance on this wave of Lee Deok-Mu is not independent of the mood of the late Choseon paragraph. It seems that the negative stance was negative attention for Gyeongreung wave of the introduction of Gyeongreung wave by Jeon gyeomik and king Chongjo(正祖) wage gyeongreung wave acts as one of the factors that can not seem to reveal a positive representation for gyeongreung waves in the late Choseon paragraph on the surface.
    As such this research will be a glimpse of Ggyeongreung wave of acceptance and understand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cluding Lee Deok-Mu paragraph.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이해와 수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李德懋의 竟陵派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이덕무가 경릉파의 문학을 언제, 어떻게 접하고 인식했으며,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어떠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의 문집 『靑莊館全書』에는 경릉파에 관한 언급이 총 15회 보인다. 그 중 최초의 언급은 『歲精惜譚』의 것으로 이덕무 나이 23세 때이다. 이후 30대 후반까지 경릉파에 관한 언급은 간간히 보이나, 언급 내용을 보면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관심이 20대 초반에 가장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덕무의 경릉파에 관한 언급은 대부분 종성과 담원춘의 시 비평가로서의 위상과 실제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언급은 익히 알고 있는 뉘앙스이다. 아마도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겸익은 경릉파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남겼다. 비판일지언정 경릉파에 대한 언급을 많이 남겼고, 조선후기에 끼친 전겸익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덕무가 경릉파에 경도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공안파를 비롯한 다른 유파에 대한 언급에 비해 경릉파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심지어는 경릉파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입장을 함께 견지하고 있다. 즉, 내면적으로는 경릉파의 비평이론과 시 비평 양상에 크게 긍정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양면적 입장은 조선후기 문단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경릉파에 부정적 입장이었던 전겸익에 영향력과 정조의 경릉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조선후기 문단에서 경릉파에 대해 언급을 드러내놓고 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이는 이덕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 문단 전반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결국,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조선후기 문단의 그것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이덕무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를 살핀 작업은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의 일단을 보여주는 단서로 활용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토대로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진행되리라 기대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에 경릉파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총 15회 보인다.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첫 언급은 그의 나이 23세 때였지만, 익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서술하는 뉘앙스를 통해 그 이전에 이미 경릉파를 접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인식은 양면적인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긍정적인 언급을 하면서도 부정적인 시선 역시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언급은 종성과 담원춘의 시 비평가로서의 위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대체로 긍정하면서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비평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 견해를 보이고 있다. 내면적으로는 경릉파의 비평이론과 시 비평 양상에 크게 긍정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양면적 입장은 조선후기 문단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경릉파에 부정적 입장이었던 전겸익에 의한 경릉파의 소개와 정조의 경릉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조선후기 문단에서 경릉파에 대해 긍정적 표현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없게 만든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비단 이덕무만의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조선후기 문인 전반에 해당되는 입장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본 연구는 1)이덕무 한 개인의 사례를 넘어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후기 문단에서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의 단초가 될 것이다. 좁게는 박제가, 유득공 등 이덕무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문인에서부터 넓게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에 관한 대략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뿐만 아니라 본 연구는 공안파와 구별되는 경릉파 이론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안파 수용과는 다른 경릉파 수용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을 정리하고자 하였기에, 기존의 공안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평가되는 이덕무의 문학이론을 새로운 재해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이덕무의 경릉파 이해와 수용 양상을 살펴본 본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는 궁극적으로 조선 문단에 끼친 중국 문학의 영향 관계, 더 나아가서는 한중 문학의 영향관계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이덕무(李德懋), 경릉파(竟陵派), 공안파(公安派), 전겸익(錢謙益), 종성(鐘惺), 담원춘(譚元春), 고시귀(古詩歸), 당시귀(唐詩歸), 진시(眞詩), 학고(學古), 박제가(朴齊家), 김창협(金昌協).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