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이해와 수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李德懋의 竟陵派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이덕무가 경릉파의 문학을 언제, 어떻게 접하고 인식했으며,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어떠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 ...
본 연구는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이해와 수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李德懋의 竟陵派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이덕무가 경릉파의 문학을 언제, 어떻게 접하고 인식했으며,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어떠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1741~1793)는 명말청초 서적의 유입과 학풍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학자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중국 명말청초 문단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실제 그의 문학작품에는 公安派를 비롯한 중국 문단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竟陵派 역시 이덕무가 20대 초반에 관심을 가졌던 문학 유파 중의 하나로, 그의 독서물 중에는 경릉파의 서적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이덕무가 펼친 시론 가운데는 경릉파와 관련된 언급 역시 보인다. 이는 이덕무가 경릉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고, 그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가 중국 명청 문학을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서적을 통해서였다. 경릉파 문학이론 역시 서적의 입수와 열독을 통해서였다. 가난한 서얼 출신 선비였던 이덕무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새로운 서적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로부터 책을 빌려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로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학문적․문학적으로 형성된 인적 교유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형성된 경릉파에 대한 인식은 이덕무 저작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덕무의 문집 『靑莊館全書』에는 경릉파에 관한 언급이 총 15회 보인다. 그 중 최초의 언급은 『歲精惜譚』의 것으로 이덕무 나이 23세 때이다. 이후 30대 후반까지 경릉파에 관한 언급은 간간히 보이나, 20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가 이덕무의 경릉파에 관한 관심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이덕무의 경릉파에 관한 언급은 대부분 종성과 담원춘의 시 비평가로서의 위상과 실제에 관한 내용이다. 대체로 『고시귀』와 『당시귀』의 비평이 다른 문장가들이 쉽게 미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비평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견해이든 종성과 담원춘, 그리고 『시귀』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뉘앙스이다. 첫 언급은 23세였지만 경릉파를 처음 접했던 것은 그 이전인 10대 후반~20대 초반 이었던 듯하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는 이덕무가 경릉파를 접한 정확한 경로와 시기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전겸익은 경릉파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남겼다. 비판일지언정 경릉파에 대한 언급을 많이 남겼고, 조선후기에 끼친 전겸익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전겸익을 통해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아직 공안파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경릉파는 공안파를 비판하고 나온 유파이기에, 상식적으로는 공안파에 대한 인식이 경릉파에 그것에 앞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덕무가 명청대 문학유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서적을 통해서였고, 서적을 구할 수 있는 기회 역시 두서없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덕무 문집에 경릉파에 대한 언급이 공안파에 관한 언급보다 앞선다는 것은 조선에 수입된 중국의 서적의 현황에 따라, 그리고 조선 문인에게 읽힌 정황에 따라 조선 문단에 끼친 영향관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이해 역시 순수한 이덕무만의 시각이기보다는 조선에 수입된 한정된 중국 서적에 통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영향력 있었건 것은 전겸익의 『列朝詩集小傳』이었다.
이덕무가 경릉파에 경도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특히 종성과 담원춘의 비평가로서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들의 글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덕무는 공안파를 비롯한 다른 문학 유파에 대한 언급에 비해 경릉파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비평하는 자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보이는 등,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내면적으로는 경릉파의 비평이론과 시비평 양상에 크게 공감을 보이는 듯 보이나, 표면적으로는 경릉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양면적 입장은 당시 조선후기 문단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우선 앞서도 말했듯이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는 전겸익에 의해 소개받은 바 크므로 경릉파에 대한 전겸익의 입장, 곧 부정적 시선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경릉파에 대한 정조의 입장 역시 부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문단에서 경릉파에 대해 표면적으로 긍정적 표현을 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이덕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후기 문단 전반의 분위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경릉파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이덕무만의 것은 아니다.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후기 문인의 것, 더 나아가서는 조선후기 문단의 그것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이덕무의 경릉파 수용과 이해를 살핀 작업은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의 일단을 보여주는 단서로 활용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토대로 조선후기 문단의 경릉파 수용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진행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