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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이성계의 군사 활동과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의 결집 양상
Military action of Yi Seong-gye and the gathering base of support in the late Goryeo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3S1A5B5A07048657
선정년도 2013 년
연구기간 1 년 (2013년 09월 01일 ~ 2014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윤훈표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고려말 이성계 군사 활동의 내용과 성격을 시기별로 구분해서 분석하고, 그 전개 과정에 보이는 조선 건국 주도 세력들의 결집 양상을 단계별로 파악하는 것이 본 연구의 기본 목표이다. 1361년(공민왕 10)의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던 첫 출전에서 1388년(우왕 14)의 위화도 회군에 이르는 시기 동안에 펼쳤던 활동들이 고찰 대상이다. 시기별로 활동의 내용과 성격을 파악하는 가운데 어떤 단계를 거치면서 세력을 결집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성계의 활동상을 재조명해서 지금까지 역사 교육 현장 등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는 신흥사대부 중심의 왕조 교체에 대한 논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한번 진단해 보고자 한다.

    ◯ 고려말 이성계 군사 활동상의 재평가와 조선 건국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고려말에 이성계가 펼친 군사 활동이 단순히 개인의 출세나 주위에 추종자들을 규합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왕조 교체라는 역사적 전환점의 토대가 쌓여가는 과정이었다. 이 문제를 빼놓고 이성계를 논하거나 평가하기 어려우며 궁극적으로 왕조 개창의 역사를 올바르게 서술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다소 미진한 편이다.
    반면에 신흥사대부들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갈수록 그 범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 급진과 온건파로 분류되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당시 가장 심각했던 토지 문제와 관련해서 개혁론자와 개선론자로 구분해서 그 각각에 대해 상세하게 검토되었다. 심지어 통치 체제의 전반에 걸친 개편 작업 추진에 대해 신법파와 구법파로 분간해서 그 입장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했던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널리 알려졌듯이 척불론자와 호불론자로 나누어서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장수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관심이 크게 떨어진다.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에서 신흥사대부들의 활약이 컸다는 판단으로 그런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계속된 내우외환으로 군사력의 동원이 다른 때보다 빈번했으며 지휘관들의 영향력도 지대했다. 다수의 인사들이 각축을 벌였고 그 중의 하나가 이성계였다. 그는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새왕조를 개창하였다. 그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본 연구의 기본 목표이다.
    이성계가 단지 어떤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서 전투에서 이겼는지를 해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위에서 여하한 방법과 단계를 거쳐 필요한 세력을 결집하여 마침내 건국 과정으로 나아갔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군사 활동을 건국 주도 세력의 결집 과정으로 파악하고서 시기별, 단계별로 그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 건국에 대한 지금까지의 신흥사대부 중심의 시각과 다른 측면을 새롭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 이성계 군사 활동의 시기 구분과 세력 결집의 단계성 파악
    이성계의 군사 활동에 대해 지금까지 대체로 중요 작전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 예를 들어 원나라 잔존 세력인 나하추[納哈出]와의 전투, 동녕부(東寧府) 정벌, 위화도 회군 등을 다루면서 각각의 내용이나 이성계의 활약상, 그리고 의의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였다. 다만 위화도 회군의 경우에는 역사적인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정치적인 해석이 오히려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군사 활동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많다. 변화와 성장을 통한 주변 세력의 결집 양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활동 시간과 공간이 늘어나면서,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확대되면서 역할과 기능에 변화가 생겼고 그로 인해 성격도 달라졌다. 초창기에는 주변적이며 종속적인 입장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심부로 진입하며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절대로 일방 통행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상황을 거치며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도달하였다. 당시 사회 형편상 부득이하였다. 그러므로 개별 분산적 고찰로서는 곤란하며 여러 각도에서의 검토를 통해 이성계 자신은 물론 그 주변의 변화상까지도 입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시기별로 군사 활동의 내용과 특징을 당시의 대내외 사정과 연결시켜 분석해서 그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 정치가 뿐만 아니라 전술 전략가로서의 이성계 부각
    군사 활동에 대한 분석이 자칫 권력 획득으로 나가는 과정의 이해로 귀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성계의 전술 전략적 능력을 크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동시에 일종의 영웅 사관으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에 전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리고 전술 전략가는 단순히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해 승리를 쟁취하는 자가 아니라 주변의 상황을 냉철히 둘러보고 활용 가능한 모든 요소를 동원하여 전투에 임하여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그 때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 인적 자원이며, 거기에는 다양한 집단이 포진하였다. 이들의 통솔 문제가 아마도 중대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전술 전략가로서의 이성계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엄청나게 고민했을 것이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그 강도는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직계나 휘하에 속했던 자들은 체계적으로 단련시켜 좀더 유능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영입과 초빙을 통해 채우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했다. 본 연구는 이 문제에 집중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그것은 동시기의 다른 장수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아예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기록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이성계 관련해서만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 이의 해명을 통해 어떤 식으로 보충하고 충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완성되고 모든 것이 갖춰진 이성계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며 진화해 가는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이는 역사 교육 현장에서도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할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 고려말 군사 활동의 현재성 부여와 역사 교육 현장에서의 활용
    이성계의 군사 활동은 전근대적인 것인데 현대에 있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보면 달리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순전히 국내 문제만으로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다. 또 외세의 일방적 개입만으로 발생했던 것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와 달랐다. 내부의 사회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급격하게 변동하는 것으로 인해 파생되었다. 대륙 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를 포함하여 커다랗게 바뀌면서 제세력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어났다. 이런 정황 때문에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의 국제 정세를 그 시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토대가 변하기는 했지만 국면에서 본다면 크게 바뀐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시기적으로 군사 활동이 중대하다. 복잡한 상황에서 절묘한 선택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에 요구되는 정보를 매우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었던 고려말의 군사 활동, 특히 성공했던 이성계의 그것에서 구할 필요가 있다.
    이성계의 군사 활동이 현재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 보다 매우 복잡한 상황에서,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힘든 문제가 얽혀져 있는 가운데 자체 역량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체제의 수립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그런 각도에서 군사 활동을 면밀히 검토했을 때 현재에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역사 교육 현장에서 유형 비교를 통한 토론형 학습 주제의 확장
    주변부 출신 인물로써 군사 활동을 통해 성장하여 마침내 왕조 교체의 큰 일을 이루었던 인물들이 전근대 중국의 왕조와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종종 보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이성계이다. 고려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도 비슷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또한 중국 명나라의 창업주인 주원장도 같은 유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비슷한 면도 있으나 다른 점들도 많다. 따라서 본 연구의 결과는 이런 부분을 통해서 교육 현장에서의 주제 발제나 토론을 통해 상호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소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 이성계의 정확한 실상 파악을 전제로 하는 재창조 작업의 시도
    사회적으로 이성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것은 여러 차례 방송된 사극이나 상영된 영화, 그리고 몇 차례 출간된 소설이나 논설 등에서 확인된다. 그 과정에서 영웅이 되기도 하고 반역자 내지 음모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성계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것이 전제되어야 여러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재창조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긍정이나 부정적인 평가 어느 쪽에도 상관이 없으나 역사적 사실만은 왜곡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본 연구의 결과는 사회적으로 다소의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연구요약
  • ◯ 단계적으로 군사 활동과 세력 결집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시기를 구분하여 접근하고자 한다.
    (1) 초창기 군사 활동의 분석과 주위 세력 결집의 토대 마련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1361년 당시 독로강만호였던 박의가 일으켰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이는 홍건적의 대규모 침입과 연관돼서 일어난 전초전격인 성격이 강했다. 바로 그 다음 달인 11월에 홍건적이 쳐들어와 마침내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 탈환 작전에 참가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 관련 기록도 풍성해진다.
    하지만 당시 작전을 주도했던 것이 아니라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원래 고려의 방침이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 이하를 보내고, 크면 상장군과 장군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군현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이성계의 군사 활동이 이에 입각하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원 정치에 입각한 공민왕대의 초기 개혁이 목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많은 문제점들이 양산되면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홍건적의 격퇴 작전에서도 지휘부의 주축이 완료 직후에 정쟁으로 희생되었다. 이런 현상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웠다.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성계가 펼친 군사 작전의 내용과 그 성격, 그리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일차로 해명해야 할 내용이다.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그의 배다른 형인 원계(元桂)도 비슷한 시기에 전투에 참가했으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내린 포상은 이성계보다 아래였다. 이는 당시 그 집안의 복잡한 사정과 동북면의 현실을 감안했을 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던 사건이었다. 비록 혈연에 한정되었고, 동북면이라는 좁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위에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후의 성취에서 매우 귀중한 발판이 되었다.
    (2) 동녕부 정벌 이후의 성장과 지지 세력의 확대
    1370년 1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동녕부 정벌은 이성계의 군사 활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주도로, 물론 최고 책임자는 아니었으나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들어가 적들을 공격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크다. 우선 국내가 아닌 해외로 출동해서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이다.이로 인해 능력이 입증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의 핵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 명령을 받았다가 이제 최상층의 지휘관이 되어 휘하를 제대로 통솔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자신을 받드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야 한다. 이들의 도움을 제대로 받아야 뻗어 나갈 수 있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여러 층위의 사람들이 이성계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보았을 때 주변부 인물들이었다.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보탤 수 있으나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에는 곤란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3) 우왕대 전쟁의 총지휘 역할과 지원 세력의 성격 변화
    우왕대에 들어와 이성계의 활동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전반기에는 현지의 총지휘관이 되어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였다. 대표적으로 1380년(우왕 6)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여러 원수들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1382년에는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동북면 도원수가 되었다. 역시 여러 부대를 거느리고 출동하여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후반기에는 위화도 회군시에 보듯이 전국의 병력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활동상을 보면 이전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개인의 무용이나 현장에서의 기민한 전술 등에 힘입어 적을 물리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최대한 병력과 장수들을 동원해서 대처한다는 점이다. 그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펼치는 전략 전술이 면모해감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 이 시기 주요한 연구 내용이다. 후반기에 갈수록 작전에서 정치적 고려가 높아진다. 요동 정벌을 앞두고 건의했던 4불가론(四不可論)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의 군사 활동을 통해 정도전을 필두로 남은, 조인옥 등과 연계되었으며 심지어 반대파였던 정몽주와도 일정 부분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비록 관직은 높지 않았을 것이나 추진력은 다른 계층과 달랐다. 비로소 중심 세력과의 연계가 가능했다. 그 바탕에는 우왕대 외적과의 전쟁을 총지휘하면서 얻었던 성과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바탕을 충분히 마련되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시기를 구분해서 이성계의 군사 활동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검토하되 그것을 통해 건국 주체 세력의 결집상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이는 이성계 개인은 물론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의 결과는 서론과 본론의 3개 장.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돼 있다. 서론에서는 본 연구의 목적과 내용의 전개 방향, 그리고 의미 등을 언급하였다. 본론은 3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장에서는 초창기 군사 활동의 분석과 주위 세력 결집의 토대 마련, 제2장은 동녕부 정벌 이후의 성장과 지지 세력의 확대, 제3장에서는 위화도 회군 전후의 역할 변화와 지원 세력의 성격 변모에 대해 서술하였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전체 논문의 요약과 역사적 의의 등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제1장 초창기 군사 활동의 분석과 주위 세력 결집의 토대 마련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1361년(공민왕 10) 당시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였던 박의(朴儀)가 일으켰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것으로부터 이성계의 군사 활동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는 홍건적의 대규모 침입과 연관돼서 일어난 전초전격인 성격이 강했다. 바로 그 다음 달인 11월에 홍건적이 쳐들어와 마침내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 탈환 작전에 참가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 관련 기록도 풍성해진다.
    하지만 이 당시 기록들을 면밀히 분석하면, 작전을 주도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경향은 홍건적의 격퇴 작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커다란 전투, 예를 들면 1364년(공민왕 13) 덕흥군(德興君)의 침입을 저지했던 것, 그리고 1369년에서 그 이듬해에 걸친 동녕부의 공격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원래 고려의 방침이 정도전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계의 군사 활동이 이에 입각하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원 정치에 입각한 공민왕대의 초기 개혁이 목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많은 문제점들이 양산되면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각종 전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던 홍건적의 격퇴 작전에서도 지휘부의 주축이었던 안우·김득배·이방실·정세운 등이 도중에, 완료 직후에 모두 정쟁으로 희생되었다. 이런 현상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이런 내외의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성계가 펼친 군사 작전의 내용과 그 성격, 그리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일차로 해명해야 할 내용이다.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배다른 형인 원계(元桂)도 비슷한 시기에 전투에 참가했으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내린 포상은 이성계보다 아래였다. 이는 당시 그 집안의 복잡한 사정과 동북면의 현실을 감안했을 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던 사건이었다. 비록 혈연에 한정되었고, 동북면이라는 좁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위에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후의 성취에서 매우 귀중한 발판이 되었다.

    제2장 동녕부 정벌 이후의 성장과 지지 세력의 확대

    1370년(공민왕 19) 1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동녕부 정벌은 이성계의 군사 활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주도로, 물론 최고 책임자는 아니었으나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들어가 적들을 공격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크다. 우선 국내가 아닌 해외로 출동해서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전투에서 지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하다. 그런 낯선 지역에서 싸워 이겼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새롭게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이 되었다. 물론 장기간 원나라와의 특수 관계로 인해 해당 지역 정보가 충분했으며 요동에 고려인들이 다수 거주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결국 가능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능력의 입증은 대단히 중요했다.
    다음으로 이성계의 작전 능력을 중앙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정 사업의 성공은 전투 실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민한 상황 판단으로 적재적소에 병력을 효과적으로 투입하며, 불안할 수밖에 없는 원정군 병사들을 다독여서 명령에 즉각 복종하는 리더십 등이 발휘되어야 한다. 아마도 중앙에서는 이 부분에 주목했을 것이다. 전투 능력이 탁월한 자는 많았다. 하지만 전략 전술에 능하며 리더십을 갖춘 자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에 공민왕은 1371년에 당시 문신을 대표하던 이색과 함께 이성계를 문하성(門下省)의 관리로 임명하며 스스로 흡족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시기 중앙 관서에서 문하성의 위상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이제 통치의 핵심부로 진입했음을 의미했다.
    그 이후 여러 작전에 활약해서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과정에서 특히 1372년에 화령부윤(和寧府尹)으로 삼고, 이어서 원수(元帥)로 삼아 왜적을 방어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군사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아울러 원수를 겸하게 해서 이제 명실 공히 지휘부의 주축이 되어 여타의 장수들을 통솔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단순히 홀로 전투만 잘 해서는 안 되고 성격이 다른 장수들을 어떻게 다스렸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점이 앞선 시기와 달랐다. 더구나 고려 말기에 이르면서 사병적 속성이 매우 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휘하 군대와 장수의 통솔 방식이 이전과 달랐다. 그런 측면의 대처에 대해 자세하게 검토하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연구 내용이다.
    아래에서 명령을 받았다가 이제 최상층의 지휘관이 되어 휘하를 제대로 통솔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자신을 받드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야 한다. 이들의 도움을 제대로 받아야 뻗어 나갈 수 있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여러 층위의 사람들이 이성계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보았을 때 주변부 인물들이었다.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보탤 수 있으나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에는 곤란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아무튼 이 시기에 그 휘하에 포섭된 인물들의 성분을 조사해서 활동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제3장 위화도 회군 전후의 역할 변화와 지원 세력의 성격 변모

    우왕대에 들어와 이성계의 활동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전반기에는 현지의 총지휘관이 되어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였다. 대표적으로 1380년(우왕 6)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여러 원수들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1382년에는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동북면 도원수가 되었다. 역시 여러 부대를 거느리고 출동하여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후반기에는 위화도 회군 시에 보듯이 전국의 병력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활동상을 보면 이전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개인의 무용이나 현장에서의 기민한 전술 등에 힘입어 적을 물리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최대한 병력과 장수들을 동원해서 대처한다는 점이다. 흔히 군사 전략에서 말하는 우회, 포위 공격, 돌파, 기만전술로 인한 적진 혼란 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하고자 함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군의 기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지침을 내려주고 지시한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그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펼치는 전략 전술이 면모해감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 이 시기 주요한 연구 내용이다. 그리고 후반기에 갈수록 작전에서 정치적 고려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요동 정벌을 앞두고 건의했던 4불가론(四不可論)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특이 사항은 1383년(우왕 9)에 안변책(安邊策)을 조정에 건의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명한 무장으로써 내용이 충실한 정책 건의를 한 사람은 이성계 이외에는 없다. 물론 단편적으로 건의한 바는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풍부한 사실과 주요한 사회 문제를 문장화해서 제시했던 경우는 드물다. 기록의 부실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작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을 당시 합류했던 정도전이 도왔을 것이라는 연구 성과가 나와 주목된다. 아마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동북면에 이르러 정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와서 이성계에게 은밀하게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은 변혁을 꿈꾸었던 세력에게 큰 기대를 걸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군사 활동을 통해 정도전을 필두로 남은, 조인옥 등과 연계되었으며 심지어 반대파였던 정몽주와도 일정 부분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비록 관직은 높지 않았을 것이나 추진력은 다른 계층과 달랐다. 비로소 중심 세력과의 연계가 가능했다. 그 바탕에는 우왕대 외적과의 전쟁을 총지휘하면서 얻었던 성과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바탕을 충분히 마련되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시기를 구분해서 이성계의 군사 활동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검토하되 그것을 통해 건국 주체 세력의 결집상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이는 이성계 개인은 물론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영문
  • This study is to look into the military action of Yi Seong-gye(李成桂) in the late Goryeo dynasty. Also, based on this study, it is to look how his supporting group gathered through different stages.
    The first time Yi Seong-gye led an army and went into war was to suppress the riot of Park Eui(朴儀) in 1361. At such time, He acted as one of the main generals of the suppressing army. His last war in his life was the army march back from Wihwa Island(威化島回軍) in 1388. At such time, he was set as the head general that led the whole army. He has led numerous armies in numerous battles. At first, although the title of Yi Seong-gye was low, his title advanced gradually and become the highest official in command.
    However, when his title was low, that is, when he went into war as a general, he gathered people who were low-ranked generals into his supporting group. He only gathered people who were accustomed to the military activities. As his title advanced, he gathered people who were good at administration or who could be a supporter. When he became the highest commander during the army march back from Wihwa Island, he was able to secure the best politicians of the time.
    As such Yi Seong-gye gathered his supporting group through various processes. However, their background were all so different. Nevertheless, he united into one and succeeded in establishing a new nation called Joseon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고려말 이성계 군사 활동의 내용과 성격을 시기별로 구분해서 분석하고, 그 전개 과정에 보이는 조선 건국 주도 세력들의 결집 양상을 단계별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성계의 군사 활동상을 재조명해서 지금까지 주로 신흥사대부세력들을 중심으로 왕조 교체 문제를 논의하였던 경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려는 것이다.
    우선 1361년(공민왕 10) 당시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던 이성계의 첫 번째 출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동했던 1388년(우왕 14)의 위화도 회군에 이르는 시기 동안에 펼쳤던 활동들이 고찰 대상이다.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이성계는 작전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최고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무장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에 이르면 전체 상황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동시에 정치 상황의 변동에 따라서 이성계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해서 살펴본다면 그의 주위에 결집하는 지원 세력의 양상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바로 그 점에 주목해서 이성계의 군사 활동에서 나타나는 위상 변화가 지지 세력의 결집과 어떻게 연관되며 전개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주도하는 집단의 형성과 그 성격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는 조선 건국의 주체를 또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려말 이성계의 군사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대체로 2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이성계가 중심이 되어 펼친 작전에 대해 검토했던 성과들인데, 그 초점을 개인적인 활약을 부각시켰던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비록 이성계가 참가했으나 중앙에서 입안했던 정책과 전략에 의해 활동했던 것들에 대한 논고에서 묘사된 것들이다. 여기서는 이성계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이성계가 참가했던 이성계의 활동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 주변의 지원 세력 사이의 관계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군사 활동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성계의 지원 세력, 특히 그와 더불어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층들에 대한 연구도 상당하다. 이는 해방 전부터 이 문제를 다루었던 이상백의 󰡔李朝建國의 硏究󰡕가 나온 이래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각도에서 고찰했던 성과들이 제출되었다. 더불어 고려왕조의 붕괴 문제를 다룬 것도 그에 버금간다.
    그런데 건국의 실제 주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계에 관한 검토는 그의 역할에 비해 다소 부진하다. 오히려 조력자였던 정도전이나 반대 세력의 상징적 존재였던 정몽주에 비해 떨어지는 수준이다. 최근에 들어와 이러한 문제점이 의식되었는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해서 조선의 건국 문제를 고찰했던 저서가 출간되었다. 김당택의 󰡔이성계와 조준․정도전의 조선왕조 개창󰡕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 동안 제대로 해명되지 못했던, 등장부터 시작하여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의 이성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상세하게 밝혔다. 그러므로 이 분야 연구에 여러모로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존의 성과들처럼 위화도 회군 이전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소 소략하다. 언급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도전이나 정몽주 등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이성계가 전면에 등장하여 이끌어갔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 이전에 왕성했던 군사 활동을 통해 자파의 세력을 결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전 시기에 걸쳐 이성계파의 결집 양상을 충실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고려말 이성계의 군사 활동의 내용과 성격을 시기별로 구분해서 분석하고, 그 전개 과정에 보이는 조선 건국 주도 세력들의 결집 양상을 단계별로 파악하고자 한다. 먼저 제1장 초창기 군사 활동의 분석과 주위 세력 결집의 토대 마련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제2장 동녕부 정벌 이후의 성장과 지지 세력의 확대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제3장 위화도 회군 전후의 역할 변화와 지원 세력의 성격 변모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로써 이성계의 단계적 활동상 변화를 통한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의 결집 양상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 조선의 건국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련된 기대 효과
    이성계는 군사 활동을 통해 주변부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중심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서술 구조는 중국과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더러 보이는 현상이기도 했다. 유사한 경우로, 지역은 같았으나 시기가 달랐던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시기는 비슷하지만 장소가 틀린 것으로 중국 명나라의 건국자인 주원장(朱元璋)이 본보기다. 이들은 각자 처했던 기반이 다르고 상황도 틀리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지만 비슷한 궤적을 그렸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성계의 왕조 개창을 향하여 밟았던 과정을 군사 활동과 연계된 주변 세력의 결집 양상에 대한 검토를 통해 파악한다면, 그 자체로써 비슷한 유형, 즉 왕건이나 주원장의 경우와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의 건국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출간된 여러 종류의 한국사 개설서의 서술 구조와는 다른 입장에서, 즉 상호 비교라는 관점에서 조선의 건국 과정을 이해하며 거기서 나타난 특징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려말 군사 활동의 현재성 부여와 역사 교육 현장에서의 활용
    고려말엽에 벌어진 전투 양상은 철저하게 전근대적인 시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연히 그에 대한 분석이 현대에 있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전개 배경을 살펴보면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우선 순전히 국내 문제만으로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외세의 일방적 개입만으로 발생했던 것도 아니었다. 내부의 사회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우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급격하게 변동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파생되었다. 대륙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를 포함하여 전체가 커다랗게 바뀌면서 제세력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일어났다. 이런 정황 때문에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의 국제 정세를 그 시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토대가 변하기는 했지만 국면에서 본다면 크게 바뀐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쨌든 시기적으로 군사 활동이 중대하고 절실하다. 자연히 복잡한 상황에서 절묘한 선택이 우리에게는 운명적으로 필요하다. 그에 요구되는 정보를 매우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었던 고려말의 군사 활동, 특히 성공했던 이성계의 그것에서 구해야 한다.
    이성계의 군사 활동이 현재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 보다 매우 복잡한 상황에서,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힘든 문제가 얽혀져 있는 가운데 자체 역량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체제의 수립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그런 각도에서 군사 활동을 면밀히 검토했을 때 현재에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본 연구가 오늘날에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 수업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일을 되새기며 교훈을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재성을 통해 오늘날의 풀기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에 적합한 소재 중의 하나가 고려말 이성계의 군사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안팎으로 얽혀 있는 난관들을 타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 색인어
  • 이성계, 군사 활동, 조선 건국 주도 세력, 무장, 지지 세력, 박의(朴儀), 위화도 회군, 신흥사대부, 정도전, 정몽주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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