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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의 주인 살해와 젠더: 1855년 노예 첼리아 사건을 중심으로
Capital Crime and Gender of Female Salve: The Case of Celia, a Slave in 1855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7042725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9월 01일 ~ 2015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인선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미국 노예제의 역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명한 판결은 1857년 드레드 스콧 재판이다. 이것은 미주리 주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사건으로 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미연방대법원 판사 A. 레온 히긴보텀(A. Leon Higginbotham Jr.)은 미주리에서 가장 치욕스런 판결은 다름 아닌 1855년 노예 첼리아 사건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미주리 법정이 첼리아의 변호인단의 합법한 절차와 정당한 법조항 제시에도 불구하고 법이 부여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피고인 첼리아에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의와 진실을 가려야 할 법의 책무를 스스로 져버렸던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본 연구는 1855년 미주리 주 캘러웨이 카운티(Callaway County)에서 노예 첼리아(Celia, a Slave)가 백인남성 로버트 뉴섬(Robert Newsom)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노예제 시절 수많은 노예 범죄 가운데서 유독 첼리아 사건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19세의 어린 여자노예가 남부 노예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주인 살해라는 중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첼리아는 왜 주인 살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그녀는 심문에서 로버트 뉴섬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했기 때문에 그를 살해했다고 증언했다. 첼리아의 변호인단은 그녀의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열정적인 변호를 펼쳤다. 하지만 미주리 법정은 한 인간으로 첼리아의 기본적인 권리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첼리아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백인 남성이 여자 노예를 강간했다 하더라도 범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공표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첼리아 사건이, 백인사회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주리 주에서 유일하게 백인 노예주가 흑인 노예를 성폭행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재판으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실 노예제 아래서 흑인여성에 대한 강간은 무수히 일어났고 백인남성의 성적 착취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흑인여성은 성폭행이나 성적 착취의 경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언할 수 없었다. 법조차 흑인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묵인하는 상황에서 흑인여성이 어떻게 이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현실에 대해 여성학자 달린 클락 하인(Darlene Clark Hine)은 “흑인여성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주제이자 분석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강간의 피해자로서 흑인여성이 처했던 성적 취약성”이라고 강조한다.
    본 연구자는 첼리아 사건이 노예제 아래서 흑인여성이 대면한 성적 착취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적절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또한 첼리아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노예제 아래서 흑인여성의 저항의 독특한 방식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이 사건은 남북전쟁 이전 남부 노예제 사회의 법, 제도, 정치, 문화, 성적 위계제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볼 적절한 사례 연구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1855년 첼리아 사건에 대한 캘러웨이 카운티의 재판 기록과 당시 신문 보도와 같은 1차 사료가 다수 남아 있다. 따라서 첼리아 사건은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 미국 남부 노예제를 여자 노예의 입장에서 재조명하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의 기대효과는 다음과 같다.
    ① ‘미국 여성사’ 연구에 대한 관심 및 저변 확대
    미국사연구회는 2014년 2월 “미국 역사 속의 젠더”라는 주제로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것은 미국사 학계 내부에서 여성사에 대한 성원들의 관심 확대를 반영한 것이다. 근래 미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흑인사와 여성사를 다룬 출판물들이 대단히 활발하게 간행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흑인여성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바로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는 여전히 흑인여성이 미국사와 흑인사는 물론 여성사를 구성하는 한 주체로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본 연구는 미국 여성집단 내부에서도 최하층계급인 흑인노예여성에 대한 관심 확대에 기여하고자 한다.
    ② 노예제 시기 흑인 여성에 대한 연구 자료 축적
    본 연구는 ‘문자’를 통한 기록 수단을 갖지 못한 흑인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첼리아 사건이 보여주듯이 흑인여성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노예제 아래서 ‘산 죽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예의 처지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행동이었다. 이들은 아무런 사회적,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한 노예의 상태로 사느니 차라리 타인을 살해함으로써 지배자와 노예제 사회에 맞서는 주체적 선택을 했다. 이것은 노예주에게 착취당하는 ‘고통스런 삶’을 끝내기 위한 의도적 행동으로서, 이들의 선택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기존에 지배집단의 주도로 기록된 흑인여성의 역사와는 완전히 차별적인 역사적 증거와 기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③ 인종, 계급, 젠더의 교차성 연구의 틀 제시
    이 연구는 미국사에서 인종, 젠더, 계급이 어떻게 맞물리며 복잡하게 연관을 맺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줄 것이다. 흑인남성노예가 백인여성에게 성폭행을 가한 경우에만 처벌하는 노예제 시기 법률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남부의 노예제라는 견고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백인남성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독점했다. 흑인여성은 물론이고 백인여성 역시 백인남성들의 성적 착취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 시기 흑인여성의 성적 착취에 대한 연구는 젠더, 인종, 계급이 맞물릴 때 어떤 다양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지 구체적 형태로 드러낼 것이다. 나아가 흑인여성의 주변 집단들이 어떻게 흑인여성의 성적 착취에 공모해서 이를 정당화했으며, 이를 통해 어떤 이익을 취했는지 실증적인 사례를 통해 제시할 것이다.
    ④ 역사의 저변 확대를 위한 대중서 출간
    본 연구의 성과물은 향후 책으로 출간한 계획이다. 연구자는 일반인이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는 대중서를 구상 중이다. 이미 연구한 마가렛 가너 사건과 본 연구계획서에서 소개한 1855년 노예 첼리아 사건과 향후 진행할 후속 연구들을 다듬어서 노예제 시기 흑인여성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을 수년 내에 출판하고자 한다. 이는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 흑인여성의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미국사와 여성사에 대한 관심 확대에도 기여할 것이라 본다. 나아가 흑인여성의 역사를 통해 한국에서 젠더, 인종의 문제에 대한 진일보한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성차별,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공감을 확대할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1855년 첼리아 사건을 젠더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첼리아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850년 미주리 캘러웨이 카운티에 거주하는 60세의 백인남성 로버트 뉴섬(Robert Newsom)은 14세의 흑인소녀 첼리아를 노예시장에서 샀다. 노예시장에서 그녀를 사서 농장으로 돌아오던 도중 첫 강간한 이후 뉴섬은 5년 이상 첼리아아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그녀가 합의할 때는 동의하에, 합의하지 않을 때는 강제로 그녀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었다. 이 5년 동안 첼리아는 두 명의 아이를 낳았고 둘째 아이의 아버지가 뉴섬이라고 증언했다.
    1854년 첼리아는 조지(George)라는 이름의 흑인노예와 교제를 시작했다. 조지는 첼리아에게 뉴섬과의 관계를 끝낼 것을 종용하면서 둘 중 한 사람을 택하라고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1855년 2월 첼리아가 셋째를 임신한 후 심하게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녀는 뉴섬에게 그와는 더 이상 성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고, 그가 강간을 멈추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를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1855년 6월 23일 오후 뉴섬은 첼리아에게 밤에 그녀의 오두막으로 건너가겠다고 말했다. 임신 중이던 첼리아는 자신을 능욕한다면 그를 공격할 것이라고 재차 경고했다. 그날 밤 뉴섬이 오두막으로 건너오자 첼리아는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뉴섬은 즉사했고 그녀는 그의 시체를 토막 낸 뒤 벽난로에 소각했다. 1855년 10월 미주리 법정은 일급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그해 12월 13일 성조차 갖지 못한 여성, 노예 첼리아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본 연구는 1855년 첼리아 사건의 핵심이 바로 젠더 문제라고 본다. 나아가 이 사건은 미주리 주에서 백인노예주가 흑인노예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첼리아는 노예제 시기 일상적인 성폭력에 시달린 유일한 인물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첼리아 사건은 흑인여자 노예가 대면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적절한 사례이다. 첼리아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 첼리아 주인 살해와 시체 유기, 이 행위에 대한 주인 가족들과 백인 사회의 반응, 첼리아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당시 논의를 지배한 담론은 노예제 아래서 여자노예란 어떤 존재였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연구는 첼리아 사건을 남북전쟁 이전 발생한 살해사건 중 여자노예가 기소된 주목할 만한 사건들과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선 일상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또 다른 폭력으로 맞서야 했던 여성의 선택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폭력은 오랫동안 터부시되어 온 주제였다. 특히 폭력을 행사한 여성은 사회에서 여성성을 상실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첼리아가 선택한 살인이라는 극한적인 폭력의 행사는 노예제라는 악명 높은 제도는 물론 백인남성의 탐욕스런 폭력을 폭로하면서 이들의 지배 아래 있는 여성들의 극단적 인간 소외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노예제 아래 흑인여성의 폭력이란 주제는 여성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자는 첼리아의 주인 살해가 궁극적으로는 노예제에 저항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이 선택한 대항폭력의 한 부분이었다고 본다. 끝으로 연구자는 첼리아 사건을 통해 노예제 아래 여자노예의 젠더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들이 젠더 개념에 대한 도전과 위반을 넘어 이분법적 젠더 개념을 뛰어넘었음을 고찰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851년 14세의 노예 소녀 첼리아는 로버트 뉴섬에게 판매되었다. 로버트 뉴섬은 미주리주 캘로웨이 카운티로 돌아오는 중에 첼리아를 성폭행했다. 이후로 뉴섬은 지속적으로 첼리아를 성폭행했고, 첼리아는 뉴섬의 아이로 추정되는 자녀 둘을 낳았다. 1855년 6월 23일 첼리아는 주인 뉴섬을 살해했고, 같은 해 11월 16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첼리아 사건은 남부에서 노예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노예제가 노예에게 강요한 사적 선택의 문제 또한 잘 보여준다. 나아가 이 사건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을 때조차 백인 여성과 달리 노예 여성이 어떠한 법적 권리도 누릴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미주리 법이 여성에게 제공했던 법적 보호를 첼리아 사건의 경우 재판정이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흑인 여성 노예라는 이유 탓이었다. 연구자는 첼리아의 선택을 백인 남성의 성적 착취에 맞선 적극적인 항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긴 했지만, 이것은 노예의 처지에서 명백히 주체적인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여자노예의 성적 착취에 대한 저항은 노예의 저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나아가 흑인여성노예의 다양한 저항전략은 ‘문자’를 통한 기록 수단을 갖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역사를 몸을 통해 드러낸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 영문
  • In 1851, Celia, A Slave, 14 years old, is purchased by Robert Newsom. Robert Newsom rapes Celia when he returns to Calloway County, Missouri, thus establishing the type of relationship they will have. During 1850 and 1855 Celia gives birth to two children, both probably from Newsom. On the evening of June 23, 1855, Celia killed Newsom with blows to the head and Celia was sentenced to death by hanging on November 16.
    Celia case really illustrates the realities of slave life in the South and the personal choices the institution of slavery forced on those enslaved. This case also depicts how enslaved women had no rights legally available to them, even when raped by their masters, who were often several years their elders. The Missouri statues at the time gave women legal recourse for being forcibly violated, yet the judge in this case would not instruct the jury to consider it because Celia was a black slave woman.
    I suggest that Celia’s choice needs to be considered as positive resistance against sexual exploitation and an independent action in condition of slave, although she took extreme measures. I think that she was a positive and subjective agency. Female salves wrote their history on physical bodies, because they had no means to write their history under slavery. So the history of African-American slave women's resistance to sexual assault was a document which they inscribed on their own bodies. Therefore the work that analyzes and interprets their choices and activities will be a different document and history from the established on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855년 미주리 주 캘러웨이 카운티(Callaway County)에서 노예 첼리아(Celia, a Slave)가 백인남성 로버트 뉴섬(Robert Newsom)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살펴보았다. 연구자는 1855년 첼리아 사건의 핵심이 바로 젠더 문제라고 본다. 나아가 이 사건은 미주리 주에서 백인노예주가 흑인노예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첼리아 사건은 흑인여자 노예가 대면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적절한 사례이다. 첼리아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 첼리아가 선택한 살인이라는 극한적인 폭력의 행사는 노예제라는 악명 높은 제도는 물론 백인남성의 탐욕스런 폭력을 폭로하면서 이들의 지배 아래 있는 여성들의 극단적 인간 소외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노예제 아래 흑인여성의 폭력이란 주제는 여성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자는 첼리아의 주인 살해가 궁극적으로는 노예제에 저항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이 선택한 대항폭력의 한 부분이었다고 본다. 끝으로 연구자는 첼리아 사건을 통해 노예제 아래 여자노예의 젠더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들이 젠더 개념에 대한 도전과 위반을 넘어 이분법적 젠더 개념을 뛰어넘었음을 고찰할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논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1장은 노예 첼리아의 주인 살해 사건을 살해 동기, 진행 과정, 첼리아 체포와 재판,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첼리아 사건에 대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1850년 미주리 캘러웨이 카운티에 거주하는 60세의 백인남성 로버트 뉴섬(Robert Newsom)은 14세의 흑인소녀 첼리아를 노예시장에서 샀다. 노예시장에서 그녀를 사서 농장으로 돌아오던 도중 첫 강간한 이후 뉴섬은 5년 이상 첼리아아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1855년 6월 23일 첼리아는 몽둥이로 뉴섬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1855년 10월 미주리 법정은 일급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그해 12월 13일 성조차 갖지 못한 노예 첼리아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2장은 1855년 첼리아 사건 이외에 남북전쟁 이전 미주리 주에서 여자노예가 살인죄로 기소된 총 5건의 사건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노예제 시기 흑인여성들의 저항방식으로 살인이 갖는 의미를 검토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인 개념의 폭력만이 아니다. 본 연구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노예제 아래서 사회구조적으로 자행된 폭력 광범위한 폭력 속에서 이에 맞서 극한의 선택으로 행한 ‘대항폭력’의 개념이다. 미국 노예제 아래서 흑인여자노예가 선택한 저항의 한 형태로서 폭력은 폭력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첼리아의 주인 살해가 갖는 다양한 역동성을 드러낼 것이다.
    3장은 첼리아 사건이 보여주듯이 노예제 아래 흑인여성이 선택한 다양한 저항에 대한 분석을 통해 흑인 여성의 젠더를 재정의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이분법적인 젠더 개념에 대한 해체 작업을 보여줄 것이다. 본 연구의 다른 한 축은 폭력의 주체로서 흑인여자노예가 보여준 젠더성에 대한 분석이다. 노예제라는 확고한 가부장적 질서 아래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남성과 여성으로서 양분화된 남성성, 여성성을 수용해야 했다. 하지만 첼리아 사건이 보여주듯이 노예제 아래 극단적인 선택으로 저항한 흑인여자노예들은 통상적인 여성성/ 남성성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여러 특징들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분법적 젠더 개념과 본 연구의 대상인 흑인여자노예의 젠더적 특성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들 흑인여자노예가 보여준 젠더성의 개념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젠더란 개념이 과연 실재하는지에 대한 오랜 논의에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의 활용방안은 다음 같다. 한국의 미국사 학계에서, 여성사, 특히 그 가운데서도 노예제 시기 흑인여자노예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주목받지 않은 분야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미국 역사학계의 흑인여성사 연구 성과를 국내에 소개하는 동시에, 미시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 노예제를 직접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는 19세기부터 남북전쟁 전까지 흑인여자노예가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총 6건의 재판 사건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대항폭력’과 ‘젠더횡단’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노예제 아래 흑인여성의 역사를 심도 있게 읽어내는 분석도구로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노예 첼리아, 노예제, 흑인여자노예, 젠더, 저항, 폭력, 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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