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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활동
The Organization and Activities of the Dokripeuikumbu in 1910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우수논문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5S1A5A2A02049231
선정년도 2015 년
연구기간 1 년 (2015년 11월 01일 ~ 2016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성우
연구수행기관 충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1910년대 독립운동단체인 獨立義軍府의 조직과 활동을 규명하는데 있다. 독립의군부는 1912년 林炳瓚이 공주 유생 李侙으로부터 고종의 밀지를 받고 조직했으며, 장서투서운동, 태극기게양운동동, 향약실시운동, 양반유생층이 민중과 연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인 反日運動이라는 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들은 제한된 자료를 활용해 임병찬의 활동과 독립의군부 실체를 규명했다는 점에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하지만 기존 연구들은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임병찬의 문집인 {遯軒遺稿}의 「擧義日記」와 「管見」을 주요 자료로 이용했다. 하지만 임병찬은 독립의군부 전라도책임자였다. 따라서 독립의군부의 조직배경이나 활동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독립의군부연구가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임병찬이 조직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는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전국으로 확대된 조직이다. 조직주체도 임병찬이 아니라 郭漢一ㆍ李侙 등 재야유생들과 李明翔ㆍ田鎔圭 등 전직관료층들이 왕명을 받고 조직한 것이었다. 또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선언을 한다는 방략을 갖고 있었고, 관제인 「獨立義軍府 定憲」을 제정하고 擧兵을 추진하던 중 2차례에 걸쳐 발각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독립의군부원들의 「판결문」과 「愼懼堂年記」, 「衣帶詔」 등 새로운 자료를 활용해, 독립의군부의 조직과정과 배경, 주도세력과 성격, 활동 등을 새롭게 조명하는데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학계와 사회에 공헌할 것으로 본다.
    첫째, 1910년대 복벽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 연구 활성화에 기여.
    독립의군부는 한말위정척사운동과 의병전쟁에 참여한 유림들이 復辟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따라서 한말 유림들의 국권회복운동이 1910년대 독립운동으로 계승,발전되는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1910년대 복벽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연구는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 연구에 국한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1980~90년대 연구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연구가 정체되어 있는 것은 자료의 한계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본연구에서 활용한 자료는 독립의군부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로 이후 독립의군부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독립의군부의 연구의 새로운 연구 방향 제시.
    독립의군부연구는 임병찬과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독립의군부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독립의군부의 조직과정, 주도세력, 성격 등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았다. 본 연구를 통해 독립의군부는 임병찬이 조직한 것이 아니며, 서울에서 왕명에 의해 전직관료와 재야유생층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는 점이 새롭게 밝혀졌다. 아울러 경기도ㆍ충청도 등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의 독립의군부 조직과 활동을 규명하고, 고종이 황제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말에 설치한 원수부 관제에 따라 「정헌」을 제정하고 시행했다는 점도 새롭게 규명했다. 또한 독립의군부 조직주체들은 ‘復國’ 과 황제 재추대를 목적으로 활동했으며, 국제정세를 이용해 독립선언을 하고 전국적으로 擧兵을 추진했다는 점도 규명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것으로 독립의군부 연구에 새로운 연구방향을 제시했다고 본다.
    셋째, 독립의군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발굴.
    독립의군부는 380여명이 참여한 단체였다. 독립의군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사료의 부족이나 근거자료의 미비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본 연구에서는 독립의군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발굴했다. 따라서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정당한 평가와 예우를 받을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했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1910년대 조직된 독립의군부에 대한 연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규명했다.
    첫째, 독립의군부 조직과 주도세력이다. 독립의군부는 1912년 8월 국왕의 밀명에 의해 사전 모임이 있었고,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곽한일ㆍ이식과 같은 재야유생과 李明翔ㆍ李寅淳ㆍ李鼎魯ㆍ尹敦求ㆍ李承旭ㆍ田鎔圭 등 전직 관료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독립의군부는 조직된 후 경기도ㆍ충청도ㆍ전라도 지역에 李承烈ㆍ尹尙普ㆍ임병찬을 ‘순무대장’에 임명해 부원확보에 주력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경기ㆍ충청ㆍ전라도에서 다수의 부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독립의군부의 운동방략이다.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이들은 ‘①(인재를 모아) 단체 조직→②(일본정부에)서면상신ㆍ(鮮人에게 연설 등으로) 독립사상고취→③(시기를 보아)독립선언→④(列國과 협조해) 독립달성’이라는 방략을 갖고 있었다. 독립의군부는 첫 번째 단계인 단체를 조직한 것이며 適期에 ‘독립선언’을 발표하려는 구상도 갖고 있었다. 독립의군부는 전직관료층과 의병계열의 재야유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그럼에도 1910년대 초 일본의 정세변화를 이용해 독립선언을 계획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독립의군부는 장서투서운동이나 외교론적 방법론에 머물지 않고 ‘거병’을 추진했다. 독립의군부의 장서투서운동은 양반 유생층의 특권이 반영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독립의군부의 방략을 보면 列國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달성한다’는 외교론적 방법을 구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의군부의 방략 중 하나였으며 핵심 방략은 ‘거병’이었다. 1913년 3월 서울에서 일본의 정세변화를 이용해 거병을 준비한 것과 임병찬이 전라도 지역에서 ‘청년 및 해산병정’을 모아 ‘거병’하려는 것도 이와 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獨立義軍府定憲」의 제정과 시행이다. 독립의군부는 「관견」에 의한 관제가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13년 1월 「정헌」을 제정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자금을 모집했다. 「정헌」에 의하면 독립의군부는 원수부ㆍ경략원ㆍ초토영을 설치하고 各 道郡에 사령관ㆍ선유사ㆍ순무총장ㆍ총판 등을 두는 편제였다. 이것은 대한제국기 황제권 강화를 목적으로 설치한 원수부 관제를 따른 것이다.
    넷째, 독립의군부의 복벽주의적 성격이다. 독립의군부의 목적은 ‘復國’ 과 황제의 재추대였다. 독립의군부는 국왕의 의지가 반영되어 조직되었고, 주도세력들도 이를 추진했다. 독립의군부가 「정헌」을 제정하고 시행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독립의군부는 고종의 의지가 반영되어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이들은 밀조를 내린 주체와 추대할 황제를 순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섯째, 독립의군부의 1ㆍ2차 발각과정과 재기 과정이다. 독립의군부는 1914년 4월 수원군 대표 김창식이 발각되면서 조직이 와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3년 4월,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주도세력의 1차 발각이 있었다. 그러나 곽한일ㆍ이정노 정도만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전라도 조직을 중심으로 한 기존 세력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따라서 1차 발각 후 재기를 도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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