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구의 양상
대구는 사륙문과 율시 미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륙문과 율시가 왕성했던, 위진 시대와 성당시대는 대구의 수사학적 가치에 대한 탐구도 깊어졌으리라 추측된다. 위진시대의 유협(劉 )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당대의 원긍(元兢)의 『시수뇌』(詩髓腦), 교연 ...
1. 대구의 양상
대구는 사륙문과 율시 미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륙문과 율시가 왕성했던, 위진 시대와 성당시대는 대구의 수사학적 가치에 대한 탐구도 깊어졌으리라 추측된다. 위진시대의 유협(劉 )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당대의 원긍(元兢)의 『시수뇌』(詩髓腦), 교연(皎然)의 『시의』(詩議), 최융(崔融)의 『당조신정시격』(唐朝新定詩格) 등, 그리고 송대 위경지(魏慶之)의 『시인옥설』(詩人玉屑) 등은 모두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시학서인데 바로 여기에 대구 시학에 관한 한 거의 완정된 형태를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원긍 이하 최융까지, 당대의 대구 시학에 대해서는 일본 출신으로 입당하여 불교를 배운 승려 공해(空海)의 『문경비부론』(文鏡秘府論)에 잘 정리되어 있다.
유협은 언대(言對), 사대(事對), 정대(正對), 반대(反對)로 나누고, 사대를 다시 정사대와 반사대로 나누었다. 언대란 고사성어를 사용하지 않은 어구로써 대구를 이루는 경우를 말하고, 사대란 고사성어를 가지고 대구를 이루는 경우를 말한다. 반대란 서로 대립되는 내용에서 하나의 취지로 귀착하는 것이고, 정대는 사실이 다르면서도 내용이 공통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대구를 구성하는 어휘가 고사적 근거가 없는 언어로 만들어졌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누고, 대구가 짝을 이루어 반대를 이룸으로써 서로 양립하느냐 아니면 동일한 취지로 귀착되느냐에 따라 나눈 것이다.
그는 언대란 만들기가 쉬운 반면에 사대는 고도의 지식이 요구되므로 만들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 반대는 반대의 개념이 하나의 취지로 귀납하도록 하기 때문에 고도의 수법인 반면, 정대는 정반대인 언어를 서로 짝지으면 되므로 그 수법이 저급하다고 했다. 또, 그는 사대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내용이 서로 대립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취지로 귀납하는 反事對와 서로 반대되는 고사를 이용해 대를 하는 正事對를 나누었다. 반면 언대의 경우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의 분류 기준이 대구의 방식과, 대구의 재료로써 나누는 것으로 보면 그의 머리속에는 다음과 같은 대구의 분류 방식이 있지 않았는가 한다.
사대는 타당한 고사로써 미학을 만들어야 하고, 또 대구를 통해 변화감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고도한 수사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를 정사대와 반사대로 둘로 나눈 것인데, 이는 세분화된 대구의 미학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증거다. 이렇게 대구의 미학은 유협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열등한 대구라고 지적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구의 미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대를 하는 두 구[즉, 출구와 대구]가 서로 우열이 있는 경우라든가, 사실이 고립되어 대우로서의 가치를 상실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구만 남는 경우, 그리고 대우가 그다지 신선하지 않아 진부하게 된 것 등을 지적해 미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격식을 지켜야 하는 데도 대구는 포기할 수 없으며, 대구를 이어 문장을 연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두 가지 기준에 의해서, 네 가지 범주를 갖는 대구는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복잡해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금, 초당(初唐) 시대 대구 시학의 전모를 볼 수 있는 것은 『문경비부론』 덕분이다. 공해는 774년에서 835년까지 살다 갔던 일본의 승려이다. 그는 31세가 되던 해 입당 유학하였는데, 이때는 성당의 구가가 이루어졌던 때이다. 이때에는 많은 시론서가 나왔던 듯한데, 그가 거론하고 있는 원긍(元兢)의 『시수뇌』(詩髓腦), 교연(皎然)의 『시의』(詩議), 최융(崔融)의 『당조신정시격』(唐朝新定詩格) 등만 해도 일급 시론, 시학서임을 알 수 있다. 원긍, 최융 등의 저작이 일실되었으므로, 문경비부론은 초당시절의 시학의 수준을 알려주는 진귀한 저작이다.
공해는 중세의 경전과 문학을 배우는 일을 특히 중시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시학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당대의 시학을 정리하면서 열다섯 항목을 두었다. 이렇게 열다섯 항목으로 당대의 시학을 정리하면서, 공해는 대구에 관해서는 두 군데에 두었다. 열한번째인 29종대 항목에서는 당대까지 산발적으로 논의되었던 대구 양식을 정리했고, 열다섯번째인 대속 항목에서는 대구를 할 때 지켜야 할 일반적인 원칙을 말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당대에 유행하던 문학이론을 망라해 이를 간추리고 이용에 편하도록 이를 간추렸다.
은 일본의 시학사에서 가장 초기의 저작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당대의 시학을 압축적으로 요약하여 시학이 제대로 그러자 대구법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시문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원칙으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서 대구는 수사법의 하나가 아니라, 어떤 텍스트를 생산하는 중요한 법칙, 텍스트 생성의 문법으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송대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