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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忠淸南道 內浦地域 지역엘리트의 재편과 근대화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인문사회분야지원국내외지역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2-072-AM1008
선정년도 2002 년
연구기간 2 년 (2002년 08월 01일 ~ 2004년 08월 01일)
연구책임자 박찬승
연구수행기관 충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공동연구원 현황 이병희(한국교원대학교)
김경수(청운대학교)
전종한(한국교원대학교)
이연숙(충남대학교)
이진영(국가기록원)
곽호제
임선빈(충남발전연구원)
김수태(충남대학교)
김상기(충남대학교)
허수열(충남대학교)
정내수(충남대학교)
윤종빈(배재대학교)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조선후기 이후 1950년대까지 충청남도 내포지역근대화 과정에서의 지역엘리트(local elite) 재편과정을 다루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內浦地域'이란 충청남도 서북부의 가야산 주변의 지역을 가리킨다. 『택리지』에 의하면 내포지역이란 가야산 앞뒤의 10개 고을을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이에는 가야산 북쪽의 태안·서산·면천·당진, 가야산 동쪽의 홍주·덕산·예산·신창, 가야산 서쪽의 보령·결성·해미가 포함된다. 이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태안·서산·당진·홍성·예산·보령이 해당된다.
    지역엘리트(Local Elite)란 한 지역의 지배층 내지는 지도층을 가리키는 말로서, 조선후기에는 양반과 향리층이 이에 해당하였지만, 근대 이후에는 새로운 지역엘리트 - 지식인, 관료, 지역유지, 자본가, 지주, 예술가 등 - 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지역 사회에서의 근대화 과정은 지역사회 엘리트의 재편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회사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 가운데 역사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견해는 근대화의 두가지 길 이론, 즉 위로부터의 근대화와 아래로부터의 근대화가 서로 대립하면서 경쟁을 하였다는 이론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는 지주·자본가 등 지배층이 주도하는 근대화를 말하고,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는 민중(농민·노동자)이 주도하는 근대화를 말한다. 그러나 두가지 길 이론은 본래 경제사쪽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한국사회의 보다 큰 문제였다고 생각되는 신분제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못하였다. 즉 양반, 향리, 평민, 노비 등의 신분의 문제가 근대화과정
    에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국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문중, 마을 공동체의 문제 등도 충분한 고려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즉 현실에서의 사회적 갈등은 단순히 지주-소작농민, 자본가-노동자 간의 대립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분 간의 대립, 문중 간의 대립, 마을 간의 대립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지역사회에서의 근대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엘리트가 형성되는 과정은 그러한 복합적인 차원에서의 대립·갈등·경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의 근대화 과정은 이같이 다양한 요소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지방사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즉 한 지역에서의 구체적인 근대화 과정, 지역 엘리트의 재편 과정을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의 여러 샘플을 먼저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샘플들의 축적 위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근대화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미시적 접근'을 통해 '거시적 시각'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내포지방은 다양한 사회세력이 존재하였고, 어느 한 세력이 압도적인 힘을 갖지는 못한 지역이었다. 양반과 유학자 세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였지만, 평민들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19세기 이후에는 천주교와 동학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한말에는 신교육의 보급에 의해 신지식층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지식인과 민족운동가가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또 넓은 평야와 유리한 수운을 바탕으로 지주·자본가층도 다수 배출되었다. 또 식민지시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상당수 나왔으며, 형평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식민지 시기 이 지역은 충남 전 지역 가운데 민족운동·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건준·인민위원회 세력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몰락하고, 결국 보수세력, 우익세력은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로써 이 지역에서의 지역엘리트의 재편 과정은 일단락을 보게 된다.
    본 연구는 내포지역의 로컬엘리트들이 성장하고, 또 서로 세력을 이루어 경쟁하는 과정을 우선 구체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짚어나갈 것이다.
  • 기대효과
  • 1) 학문적 기여
    본 연구는 한국의 근대화과정을 설명하는 기존의 이론틀을 점검하고, 새로운 이론틀을 만드는 데에 한 사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로컬엘리트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또 한 지역을 대상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동안의 고립분산적인 연구를 지양하고, 학제간 연구, 협동적 연구를 실행함으로써 연구 과정에서도 새로운 틀을 만들어낼 것이다. 또한 본 연구 과정에서는 내포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 조사와 수집, 그리고 목록 발간 등을 계획하고 있어,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이 지역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또 이는 다른 지역과의 비교 연구를 촉발함으로써 타 지역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

    2) 사회적 기여
    본 연구는 또 사회적으로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최근 중국과의 무역 증대,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 등으로 이른바 '서해안 시대'가 제창되고 있는데, 이 때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이 내포지역이다. 이미 이 지역에는 공업단지와 무역항이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홍주·서산(해미 포함)·태안 지역은 문화·생태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지는 개발 계획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조선후기 이후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대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내포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낼 것이며, 이에 기초한 '내포문화권'의 '문화적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3) 인력양성 방안
    본 연구의 또 하나의 목적은 본 연구과정을 통해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는 교수와 박사급 연구자 13명 이외에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학생 10명이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현지조사, 문헌자료 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자료조사의 방법론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현지 감각을 누구보다도 익히게 될 것이다.
    또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은 각종 사료의 목록 작성, 해제 작성, 또 근현대 신문자료의 정리, 정부기록보존소와 도청·시군청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의 수집과 정리 등을 통
    해 한 지역의 지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에 대해 기본적인 안목을 얻게 될 것이다.
    공동연구원과 연구보조원, 그리고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고문서 및 초서 강독'을 매주 개최하여 고문서의 양식과 내용, 그리고 고문서의 초서, 일본어 공문을 익히도록 한다.

    4) 교육과의 연계 방안
    본 연구진은 대학원 과정, 또는 학부과정에서의 지방사 연구와 관련된 과목의 교수와 협의하여 학생들의 현지 답사 기회를 만들고, 또 현지 조사에 동참하는 기회도 만들 계획이다.
    이는 지방대학의 사학과 학생들로 하여금 지방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이들이 지역의 지방사 연구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또 본 연구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의 정리하여 자료집을 만들어 이를 대학원과 학부에서의 지방사 강좌, 고문서 강좌, 근현대사 강좌 등에 곧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또 본 연구진은 초등학교에서 향토사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3차 년도에는 이와 관련된 자료집 제작과, 초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향토사 강좌를 교사연수 프로그램으로 설치하는 방안도 강구할 계획이다.
  • 연구요약
  • 1) 연구의 방법
    본 연구에서는 1) 자료의 수집에서는 문헌자료의 조사와 연구, 구술 자료의 채록, 영상자료의 수집과 채록, 통계자료의 정리 등에 중점을 두며, 2) 연구과정에서는 타 지역과의 비교, 내포 지역 내의 각 군별 비교, 문헌자료와 구술증언의 비교, 사진자료, 지도의 적극 활용, 공동 현지 조사와 연구진의 정보 공유, 토론, 중간 발표를 통한 점검, 학제간 토론 등에 중점을 둔다.

    2) 연구의 내용
    본 연구는 크게 5개 분야로 나뉘어진다. 즉, 인문지리적 환경의 변화, 사회구조의 변화, 종교와 사상의 변화, 경제구조의 변화, 지역 정치세력의 재편 등이 그것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인문지리적 환경의 변화
    이 장에서는 그 동안 소홀하게 다루어온 경관의 변화와 그 주체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즉 농경지 개간(주로 해안 간척), 마을의 형성과 배치, 읍성의 치폐 등 경관의 변화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그 주체는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경관의 변화가 역으로 이 지역의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 향촌지배구조의 변화
    이 장에서는 그 동안 전혀 사례연구가 없는 이 지역의 조선후기 지배구조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즉 동족마을의 분포, 조선후기 서원의 치폐, 주요 문중의 발달 과정, 동계와 문계 등을 통해 사족지배체제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그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리고 그것이 해체되는 과정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 아울러 수령과 향리층의 동향도 살필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이 지역사회의 지배구조의 틀과 지배세력의 구체적 모습, 그리고 그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장에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조직과 활동, 그리고 농민군 지도자, 반농민군 세력의 구체적인 동향과 그 지도자 등을 확인하여 격동기 이 지역 민중들의 지도자와 지배층의 지도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지성계의 변화
    이 장에서는 우선 이 지역의 유교지식인의 학맥과 학풍·사상을 정리하여 충청도의 다른 지방과 비교하고, 그리고 19세기 후반의 대내외 정세에 이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위정척사 사상을 공고히 하면서 홍주의병에 참여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해주고, 또 이같은 舊學을 대표한 인물들이 누구인지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또 한말 이 지역에 새롭게 소개된 新學을 누가 어떻게 수용하였고, 또 이를 보급하기 위해 사립학교를 어떻게 세웠는지, 그리고 1910년대 이후 신교육은 어떻게 보급되어 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는 이 지역에서의 신지식층의 형성과정,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라. 종교와 신앙의 변화
    이 장에서는 조선후기 이래 이 지역의 불교계의 동향과 대표적인 승려들의 행적과 사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또 조선후기 이래 수용된 천주교가 일제시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확산되어 갔으며, 그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또 대한제국기 이래 수용된 감리교의 경우에도 그 수용의 주체와 확산과정에 대해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지역의 근대적 '종교지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 경제구조의 변동
    이 장에서는 조선후기의 場市의 형성과정과 보부상의 활동을 통해 이 지역의 상업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었고, 그 주체는 누구였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또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산업인 농업의 구체적인 양상과, 식민지시기 대두한 대지주들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또 예산의 지주·상인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호서은행·충남제사를 통해, 당시 이 지역의 지주·상인자본이 근대적인 금융자본·산업자본으로 어떻게 전환하고 있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또 그 밖의 각종 회사들을 통해 역시 이 지역의 중소 자본가들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바. 지역 정치세력의 재편
    이 장에서는 식민지시기 민족운동·사회운동의 구체적인 진행과정과 그 주체를 분석하여 식민지시기 이 지역의 민족·사회운동을 타 지역과 비교하고자 한다. 또 해방 이후 좌우익의 갈등이 식민지기 민족·사회운동자들과 친일·보수세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아울러 살필 것이다. 또 이 지역에는 중도파 세력은 없었는지도 역시 살펴야할 대상일 것이다. 이어서는 한국전쟁기 이 지역의 모습, 그리고 전후 1950년대 각종 선거과정을 통해 이 지역의 지역정치세력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이 타 지역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 장의 연구를 통해 본 프로젝트는 조선후기 이래 이 지역에서의 각 부문의 지도층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
  • 한글키워드
  • 동학,지방사,민족운동,인민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충남제,호서은행,사회주의운동,경관,일제시기,지역엘리트,예산,보령,태안,서산,당진,홍주,내포지역,지역사,위정척사,동계 호론,동족마을,서원,향리,양반,사회사,경제사,종교사,지성사,천주교,불교,근대화,근대,조선후기,지주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 국 문 〉
    내포문화권은 금강문화권에 비해 유교적인 보수성도 약하였고, 양반의 기반도 약하였다. 따라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천주교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내포지역이었고, 동학농민봉기 때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도 내포지역이었다. 근대적 교육이나 개신교의 도입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늦지 않았다. 내포지역은 또 예당평야라는 넓은 평야가 있는 동부지역과, 작은 산맥이 상하로 가로지르는 서부지역으로 나뉜다. 동부의 예산과 당진, 그리고 서부의 서산, 태안에는 상대적으로 부재지주와 재지지주가 모두 많았고, 홍성의 경우에는 평야가 적어 지주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예산, 당진, 서산의 지역엘리트 가운데에는 평민출신의 지주적 기반을 가진 이가 많았다. 예산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상업적 기반을 가진 엘리트도 많았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고 지역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신흥청년들도 지역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이들 신흥청년들은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에서 주역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고, 여기서 우익은 미군정과 경찰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여기서 우익청년운동에 참여하는 계층이 새로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좌익계로 간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고, 1950년대초 농지개혁을 전후하여 재지지주층과 이에 기반을 둔 지역엘리트도 몰락했다. 1950년대 그들 대신 새로이 등장한 지역엘리트는 우익청년단 출신이나, 상공업자 등 신흥 자산가계층이었다.
  • 영문
  • Modernization and the Change of Local Elite in the Naepo Area, Chungcheongnam-do

    In Comparison with the Geumgang Cultural Region, the Naepo Cultural Region has weak Confucian conservatism and a weak basis of the nobility. Therefore, it shows a liberal and open tendency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Roman Catholicism was first introduced to South Korea in the Naepo Area. In addition, the Naepo Area had the strongest power in Chungcheong-do during the Donghak Farmers' Uprising. Modern Education and Protestantism were introduced earlier than in the other areas. The Naepo Area is divided into the Eastern and Western parts referring to the vast plains called the Yedang Plains and to a small mountain range crossing north to south, respectively. Yesan and Dangjin in the Eastern part and Taean in the Western part have more non-residing and residing landlords than other areas. Hongseong has relatively few plains and few landlords. Accordingly,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many of the local elitesin Yesan, Dangjin, and Seosan are from the common people with basis of lands. Being a center of commerce, Yesan had elites with economic foundation. Having modern education, the newly emerging youth engaged in national and social movements in the area became local elites. The newly emerging youth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Founding Joseon and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ion after the liberation. However, they were divided into the left and the right wings and in conflict with each other. The right wing got support from the American Military Administration and the police and expanded its power. The class participating in the Right Youth movement newly emerged. Meanwhile, social movement activists in the left wing collapsed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early 1950s, around the time of theAgricultural Land Reform, residing landlord classes and local elites based on them collapsed. In the 1950s, instead of them, the former Right Youth members or the propertied classes such as merchants and industrialists newly appeared as local elit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내포문화권은 금강문화권에 비해 유교적인 보수성도 약하였고, 양반의 기반도 약하였다. 따라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천주교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내포지역이었고, 동학농민봉기 때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도 내포지역이었다. 근대적 교육이나 개신교의 도입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늦지 않았다. 내포지역은 또 예당평야라는 넓은 평야가 있는 동부지역과, 작은 산맥이 상하로 가로지르는 서부지역으로 나뉜다. 동부의 예산과 당진, 그리고 서부의 서산, 태안에는 상대적으로 부재지주와 재지지주가 모두 많았고, 홍성의 경우에는 평야가 적어 지주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예산, 당진, 서산의 지역엘리트 가운데에는 평민출신의 지주적 기반을 가진 이가 많았다. 예산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상업적 기반을 가진 엘리트도 많았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고 지역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신흥청년들도 지역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이들 신흥청년들은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에서 주역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고, 여기서 우익은 미군정과 경찰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여기서 우익청년운동에 참여하는 계층이 새로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좌익계로 간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고, 1950년대초 농지개혁을 전후하여 재지지주층과 이에 기반을 둔 지역엘리트도 몰락했다. 1950년대 그들 대신 새로이 등장한 지역엘리트는 우익청년단 출신이나, 상공업자 등 신흥 자산가계층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학문적 기여

    본 연구는 한 지역을 대상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동안의 고립분산적인 연구를 지양하고, 학제간 연구, 협동적 연구를 실행함으로써 연구 과정에서도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 또한 한국에서의 지방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을 새롭게 개발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밖에 내포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 조사와 수집, 그리고 목록 발간 등을 수행하였으며,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마을지 발간 등 이 지역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2) 사회적 기여

    본 연구에서 조선후기 이후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대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이른바 ‘내포문화권’의 성격규정에 어느 정도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내포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에 기초한 ‘내포문화권’의 ‘문화적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3) 인력양성 방안

    본 연구에는 교수와 박사급 연구자 13명 이외에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학생 10명이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현지조사, 문헌자료 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자료조사의 방법론을 터득하는 한편 누구보다도 현장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아울러 각종 콜로키엄, 팀별 세미나, 학술심포지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지방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 많은 지식을 터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 색인어
  • 내포지역, 지역엘리트, 예산, 당진, 서산, 홍성,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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