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지배했던 ‘암울했던 시절’(1940-44)이 끝난 뒤에, 프랑스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처벌과 숙청이 여러 방식으로 수행되었는데, 이 연구는 그러한 숙청의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행정숙청’, 즉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에 대한 ...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지배했던 ‘암울했던 시절’(1940-44)이 끝난 뒤에, 프랑스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처벌과 숙청이 여러 방식으로 수행되었는데, 이 연구는 그러한 숙청의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행정숙청’, 즉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에 대한 징계에 대한 것이다.
행정숙청의 규모를 보자면, 숙청의 반대자들이 ‘12만 명’의 공직자가 숙청되었음을 주장하고 정부측은 약 16,000명이 징계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독일 강점기(1940-44)의 대독협력을 이유로 징계를 받은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은 모두 100-150만 명 가운데 27,000명 이상(1.8-2.7%)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본 연구는 특히 두 공직 부문에서의 행정숙청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첫 번째 것은 ‘숙청자의 숙청’으로, ‘암울했던 시절’에 '국가적 부역'을 직접 수행하고 그 중에서도 주로 억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동시에 해방후에는 숙청 업무를 수행하게 될 도지사, 판검사, 경찰에 대한 숙청이고, 두 번째 것은 일상적 공직 부문, 특히 센 도 도청 및 부속 관공서들(군청, 시청, 면사무소 등)과 센 도에 위치한 공기업들에서의 숙청이다.
이 두 부문의 숙청은 여러 점에서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우선, 행정숙청이 지속된 기간이 달랐다. 즉, 부문별 숙청위원회의 활동기간을 보면, 지사와 판검사는 1944년 10월부터 1945년 4월까지, 경찰은 1946년 2월까지 숙청위 회의가 열렸던 데 비해 센 도청이나 그 지역 공사(公社)의 숙청위들은 1947년 봄까지도 활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는 지사, 판검사, 경찰관의 부역행위가 직무상 여타의 공직이나 공기업에 비해 훨씬 심하거나 자명해서 심사가 오래 걸리지 않았던 동시에 ‘숙청자의 숙청’이란 점에서 다른 부문들의 숙청에 비해 훨씬 시급했던 반면 일반 공무원들이나 공기업 직원들의 경우 부역행위 여부 심사가 보다 어려웠고 ‘숙청자의 숙청’만큼 시급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두 부문 사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측면은 무엇보다도 징계사유라고 할 수 있다. 지사, 판검사, 경찰관의 경우 비록 개개인의 구체적인 징계사유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간접적인 증거로 미루어보아 대체로 업무수행이나 직위와 직접 관련된 사유로 징계를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반면 센 도 행정숙청의 경우 대부분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행위로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센 도청과 시읍면사무소 직원들, 파리 지역의 공기업 직원들은 대부분, 근무시간 이외에 근무지 밖에서 벌였던 행위로 징계를 받거나, 근무중에 보였던 태도나 행위로 징계를 받더라도 자신의 직무수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요컨대 대부분의 센 도 도청 소속 공무원들은 ‘공직자’로서의 공무 수행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업무수행과 관련된 징계에서도 어느 부문이든 업무수행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 방식, 즉 상부의 지시나 규정을 시행하는 방식(혹은 지시를 내리는 방식)을 문제삼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시 정부 성립과정의 ‘합법성’―숙청당국은 공식적으로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이라는 과거 사실과 현재의 절박한 당면과제들, 즉 국가재건과 질서유지, 그리고 숙청과업 수행에 대한 필요성에 비추어 비시 공직자 전원을 숙청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